요나서 강해 05
Notes
Transcript
어떻게 하여야 잔잔하겠느냐?
요나서 1:11-13
요나는 선장의 책망과 제비뽑기 이후에 선원들에게 자신의 신분과 폭풍의 원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단단히 망신당했습니다. 이제 이 모든 재앙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백하며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 정도로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은 했지만, 하나님께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진실로 회개했다면 요나는 자신의 행선지를 니느웨로 변경했어야 맞습니다. 물론 지금 폭풍을 만난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상황이 못 되었을 겁니다.
아니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든지의 행동이라도 보였어야 맞는데, 요나는 전혀 그런 태도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적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입술로 자신의 죄를 말했다고 그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닫고 비참한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했다고 죗값을 모두 치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했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쳤다면 잘못된 일이 바로 잡힐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합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다면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실수로 문제가 생겼다면 그 문제의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 실수한 사람의 몫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먼저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다시 바로잡으려는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나에게는 그러한 자세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참된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입으로 신앙고백을 좀 했다고 받을 수 있는 용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한 정도로 징계를 멈추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다가 점점 흉용 해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멋대로인 요나를 대충 눈감아 주며 넘어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참사랑은 자식의 탈선을 눈감아주지 않습니다. 진정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징계의 회초리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잠언 3장 1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잠언 13장 24절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폭풍을 만나시거든 하나님이 여러분을 미워해서 치신다고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아직도 사랑하셔서 회복의 채찍을 치시며 여러분의 회개를 기다리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선원들이 바다가 더 흉용해지는 것을 보고 요나에게 물어봅니다.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잔잔하겠느냐? 선원들의 말이 원문과 한글번역 상의 차이가 조금 있습니다. 한글번역에서는 “너를 어떻게 하여야”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를 직역하면 “너에게 무엇을 하여야”입니다.
즉, 선원들은 요나를 어떻게 해볼 생각으로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요나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바다가 잔잔해질 수 있을지를 물어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폭풍을 던지신 하나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고, 또한 그를 섬기던 선지자이기에 요나가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에게 올바른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선원들은 살기 위해서 요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폭풍을 멈추기 위해서 우리가 너에게 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선원들은 요나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이 섬기는 신들에게 기도도 하고, 짐을 바다에 던지기까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선원들이 이제 살길을 찾고자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요나의 대답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여야만 해결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의 답변입니다. 그런 답변을 들었던 선원들은 바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듣고도 선원들은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미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가 이방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해서 생명을 구원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는데, 요나는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싫어서 도망을 쳤고, 지금은 그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의 생명을 살리고자 힘써 노를 젓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히브리 사람인 요나보다 이방인 선원들이 더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던 요나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더 힘써 노를 젓는 이방인 선원들로 인해서 더 부끄럽게 된 겁니다.
11절에서는 바다가 점점 흉용해졌는데 13절에서 선원들이 요나를 살리고자 노를 힘써 저었더니 바다가 점점 더 흉용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배를 육지로 돌리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생명을 살리고자 선원들은 노를 저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분명 의도는 좋습니다. 훨씬 더 인도주의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생각입니다. 값진 물건들은 바다에 던졌지만,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못했던 선원들은 그 요나를 살리겠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허사였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선원들이 요나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과 배를 육지에 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인간의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모습에서 신약성경의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에 관해서 물었던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당시에 수많은 랍비가 있었겠지만, 이 사람은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보다도 영생에 대해서 더 확실히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계명들을 다 지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자신은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마태복음 19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기록을 합니다.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해서 가장 정확히 알려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의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듣고 놀라면서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26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여기에 바로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곧 영생을 얻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셔야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해주셔야만 합니다. 선원들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힘으로 힘써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요나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을 배역한 죄에 대해서 죄의 심판 곧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넣으라고 말했던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는 반드시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 죄인이 죽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의 전부를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기만 하면 전부를 다 어긴 것과 같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작은 거짓말을 한 것이 세상에서는 별일 아닐지 몰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 작은 거짓말로 인해서 사형이 선고 될 것입니다.
요나가 죽어야 폭풍이 끝난다는 말을 들었던 선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으로 죄의 대가를 치룰 수는 없습니다. 살리겠다고 노를 힘껏 저었지만, 바다는 더 흉용해져서 헛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세상 법정에서 대가를 치루기 위해서 벌금을 낼 수도 있고, 훌륭한 변호사를 선임해서 죄의 형량을 줄이거나 무죄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인간들의 노력은 무엇이든지 허사입니다. 어떠한 것들로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의 죄인이 최고의 노력을 다해서 선을 행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셀 수 없이 가져다 바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들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그 죄의 대가는 반드시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 우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것들을 피할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게 됩니다. 선원들은 인간적인 마음에 요나를 죽일 수 없었지만, 그 요나가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죄를 지었기에 우리는 죽음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당연히 찾아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은 우리에게 죽음, 곧 죗값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어떠한 노력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길이 유일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죗값을 모두 치른 것이고, 예수님께서 얻으신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삼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고,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적용하십니다.
요나는 참으로 끔찍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말씀을 맡은 종으로써 큰 책임이 있고, 은혜를 입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포기하고 도망친 사람입니다. 도저히 신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상태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추적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징계와 함께 회개의 길을 열어주시고, 또한 구원의 길도 열어주십니다. 또한 그렇게 불순종하는 요나를 통해서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점점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코 요나보다 더 낫지 못합니다. 어쩌면 요나에 비하면 우리는 더욱 끔찍하고 추한 죄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도 또한 우리에게도 당장 죗값을 위한 죽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의 길을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더욱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망하지 않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추적하여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낙망하기보다는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과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실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열매를 맺으며 살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해서 순종함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지금 전혀 그렇지 않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