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플러스(눅17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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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별한 사순절 기간

우리들은 매년마다 사순절 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사순절하면 예수님과 십자가를 묵상하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에 의미를 두며 1년 중 이 40일만큼은 더욱 깊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시간을 보내게 되죠. 그런데 이 기간을 보내는 우리들이 처한 상황은 오롯이 예수님만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자의 처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른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하지만 큰 이유 중 한가지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들의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사순절의 특별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순절을 특별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난주 말씀을 잠깐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순절 기간동안 예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하는 사건이 무엇인지 나누었는데요. 먼저는 거듭나야 하는 것이고, 거듭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며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좁은 문을 향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삶이 선행되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살아갈 수 있는 비밀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길 원하는 믿음 플러스, 믿음 더하기라는 제목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가 이 사순절을 조금 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사순절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말씀의 은혜로 나누길 원합니다. 그래서 2025년 사순절이 저와 여러분에게 특별한 시간이 되기 위한 방법을 오늘 말씀에서는 ‘믿음을 더 하기’ 위해서 왜 더해야 하고, 어떻게 더해야 하는지 두 가지 주제를 살펴보면서 말씀의 은혜가 채워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2. 왜 믿음을 더해야 할까?

오늘 본문의 중심부에 위치한 5절에서는 사도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드려요.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왜 믿음을 더해달라는 고백을 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요청에 대해서 무어라 대답하셨을까요?
우리는 먼저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믿음을 더해달라는 요청을 드리게 된 것인지 그 당시 상황과 원인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의 상황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와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인이라는 지명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해서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도 같이 먹는다.’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죠.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양 백마리를 가진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마리를 두고, 길을 나설 것이라는 비유의 말씀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켠 여인의 비유의 말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의 비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 위해서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시선이 변화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죠.
그리고 나서 16장부터는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말씀과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16장 14절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기록하며 예수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것들을 듣고, 비웃었다고 하고 있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준수하고, 지키며 평생을 살아갈 것을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공감해야 하는 바리새인들이었지만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바리새인들을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는 말씀하시는 대상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데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슨 말씀인지 아시나요?
바로 마음의 상처를 주거나 어려움을 주고,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의 종교와 정치적 지도자와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누구였죠? 바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 힘을 쓰고, 노력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와 시험을 주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웃의 마음에 상처와 시험을 주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만약에 주변에 있는 지체들이 제자들에게 죄를 범하면 경고하고, 회개하면 용서를 해주라고 하십니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지었지만 일곱 번 회개하면 그 지체에 대해서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이죠.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라는 의미로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은 완전히 깔끔하게 용서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죠. 제자들은 이 용서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고, 예수님께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것이죠.

3. 용서의 능력

믿음이 더 해지길 요청하는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였던 것이죠. 적당한 잘못과 실수는 용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겠죠. 하지만 한 두번의 잘못이나 죄가 아니라 무슨 잘못을 할 때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매번 용서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삶이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해요.
제자들도 이와 같은 막막함이 생겼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주시길 요청한 것이죠. 그러면 한 번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무어라 정의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용서를 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처를 받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 하였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용서라는 것이 우리들의 삶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박애정신을 가지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 용서도 의미가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열린 문과 같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 어떤 역할을 맡기셨는지 고백하고 있는데요.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죄의 문제로 인해서 분리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화목제물의 역할을 맡기시며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관계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음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17세기 웨일스의 성공회 사제이면서 시인이었던 조지 허버트는 용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부수는 것이다’ -조지 허버트-
사랑하는 레브 청년교구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겪는 고통이나 슬픔을 감추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미움에 갇혀 삶의 평안을 잃고 주님께 나아오는데 서로가 서로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죠. 예수님을 통해 얻은 십자가 구원의 용서를 우리 모두가 삶으로 누리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저와 여러분 앞에 용서의 다리를 내려 주님께 진심으로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해결되어지지 않는 미움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드리고, 오늘, 용서함으로 주님 안에서 평안과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되는 저와 우리 청년교구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4. 겨자씨 믿음의 능력

앞서서 우리에게 왜 믿음이 더해져야 하는 것인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타인에 대하여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용서를 이루기 위한 믿음이 더해지길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믿음을 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완전한 용서가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나에게 악을 행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완전한 용서를 하는 것이란 불가능한 것처럼 다가온 것이죠. 그래서 제자들은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아마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주님께서 맡겨주신다면 제자들과 같이 믿음을 구하며 나아갈 것 같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아주 훌륭한 자세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만약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말씀하세요.
이 말씀은 마치 이런 말과 같습니다. ‘제자들아, 너희에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시는 것과 같아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을까요? 아니요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의 시간선을 따라 보았을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을을 다니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돌아왔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제자들은 삶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죠.
‘만약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말씀은 너희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이죠.
그러면서 그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무슨 일을 행하냐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뽕나무 더러 바다에 심기어라고 명령하면 그 나무가 순종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이 말씀은 작은 믿음이 있으면 슈퍼파워를 가지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행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5. 나의 변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겨자씨만한 믿음과 뿌리박힌 뽕나무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과 믿음을 실천하기 위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용서를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이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용서의 다리를 놓기 위한 발을 떼어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렇게 작은 믿음으로 실천하면 마치 뿌리가 박힌 뽕나무를 명령하여 바다에 심겨지라하면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들도 변화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나의 삶이 초자연적인 변화처럼 믿음으로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 믿음으로 순종할 때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으로 우리들의 믿음은 이전보다 더 해지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아름다운 레브 청년교구 여러분, 믿음을 더하는 방법은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해주신 우리 주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겨자씨만큼 작고, 초라해 보이더라도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으로 순종할 때, 믿음은 더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변화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계획하시고 계신 만큼 무한대의 스펙트럼으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작다고 주저하지 않고, 나는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으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주어진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을 더해가는 저와 우리 청년교구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6. 다 행한 후에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완전한 용서를 이루신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 위해 믿음이 더해지기를 구하고, 그 믿음이 더해지기 위하여 순종의 자리로 나아갈 때,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마지막 고백은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처럼 주님 앞에 서길 원합니다.
‘주님,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의 자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다리를 내리기 위한 순종의 걸음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믿음으로 살아가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나의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순종의 걸음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묵상하며 이 사순절을 보내실 때, 저와 여러분에게 작은 것처럼 느껴지는 믿음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믿음에 순종하며 삶에 놓인 용서의 다리를 내리며 믿음이 더해지는 삶을 이루는 2025년의 사순절이 어느때보다 특별해지는 저와 여러분의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프리뷰
Q1. 나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힘들어했거나 내가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힘들어본 적 있나요?
Q2.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의 어떤 모습이 깨어져야 할까요?
Q3.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삶의 영역은 어느 자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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