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9)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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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한복음 3장은 2장23-25절과 이어지는 본문이다. ‘그런데’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하지만 그를 믿으면서 뒤에 ‘그러나’가 붙은 신앙으로 인해 더 깊이 더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다. 주위를 멤도는 신앙생활은 표적도 보고, 말씀도 듣고, 치유도 볼 수 있지만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거나 새로운 삶을 경험할 수는 없다.
3장의 말씀은 그렇게 ‘그러나’를 달고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크리스찬과는 달리 ‘그런데’를 품고 예수님께로 온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도 아닌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우리 시대로 예를 들자면 천주교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국회위원과 같은 고위직 사람이었다. 그런 지도자가 젊은 목사에게 하나님에 대해 물으러 온 것이다. 이것은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행동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님을 못만나는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한다.
‘나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그러나 나는 다른 종교의 지도자이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야. 내가 어떻게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젊은 목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물을 수 있겠어?’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몸을 의탁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나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그러나 나는 다른 종교의 지도자이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야. 내가 어떻게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젊은 목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물을 수 있겠어?’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에’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께 찾아와서 물었다.
이렇게 유력한 사람의 방문은 예수님 측에서는 가슴 떨리고 설래이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 시장이나 도지사님이나 국회의원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젊은 목사인 저에게 조언을 구하고 배움을 청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성도들과 제자들은 똑같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저 같아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요? 아무런 미동이 없습니다.
세무소장인 삭개오가 왔을 때도 부자청년이 방문했을 때도 심지어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왔을 때도 병자나 거지나 죄인들을 만날 때와 하나도 틀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만나러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심지어 저의 반응에 마음 쏟지 마세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니고데모는 사회적인 위치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상대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 대면합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과의 진실한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주요 종파 중 하나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불결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무리를 일컫습니다1. 이들은 '파리사이오스'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분리된 자' 또는 '거룩한 자'를 의미합니다1.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와 경건한 생활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큰 존경을 받았으며, 회당 조직을 통해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1. 그들은 성경 연구와 율법 순종을 강조했고, '장로들의 유전'이라 불리는 구전율법에도 특별한 권위를 부여했습니다2. 바리새인들은 모든 유대인이 제사장 수준의 성결 규례를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그들의 식사 전 손 씻기 관습 등에서 드러납니다2. 그러나 그들의 엄격한 율법주의와 분리주의적 태도는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과 자주 대립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123. 바울 사도도 회심 전에는 열심 있는 바리새인이었으며, 그의 배경은 그의 사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본래의 의미와 달리 부패하고 변질되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이 찍혔다. 세례요한은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라고 다 싸잡아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바리새인 중에도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있다. ‘천주교’가 많이 비교가 되는데 천주교가 모두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중에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있다.
기독교라고 모두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기독교인들 중에 ‘그러나’의 신앙을 가진 사람도 많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그사람의 종교와 환경과 과거의 이력으로 특히 그렇다.

밤에

밤은 여러가지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니고데모처럼 밤을 활용해보라!
낮에는 일하느라 바쁘지만 밤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밤은 두 가지로 자기 전 ‘밤’이 있고, 일찍 일어 난 ‘밤’이 있다. 둘 다 예수님을 만나기 좋은 시간이다.
이때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고, 목회자와 대화도 해라.
엊그제 한 성도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동안 여럿이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속깊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 중에 한가지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이기도 했을 것이다.
‘밤’은 시간을 이야기한다.
‘여가’라고도 불리는 시간,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주어진 시간이다. 일하는 시간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일을 하지 않고 다 재쳐두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오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기 일을 게을리하며 교회에서만 생활함으로 인해 바울이 편지를 써서
2 Thessalonians 3:10–12 NKRV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그러므로 낮에는 힘써 일하고, 자기 할 소명을 철저히 한 이후에 ‘밤’에 여가시간에 예수님을 찾으라.
그때가 하나님을 만날 때이다.

아나이다

니고데모의 말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특징 한가지가 발견된다.
‘내가 무엇을 안다’라고 확신의 어조로 말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태도이다. 특히 하나님에 관해서는 그렇다.
1 Corinthians 8:2–3 NKRV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 대해서 자기가 아는 부분으로 판단하면 그 외에 알지 못하는 부분은 더 깊은 그림자에 가리우게 된다.
부분적으로 아는 것으로 자신이 안다고 판단하고 행동하면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더욱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의 공부 끝에 내린 결론이 ‘내가 지혜로운 것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어설프게 알면서 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들만큼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은 드물다. 흔히 술취한 사람들이나 하나만 아는 사람들이 목소리가 크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그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이라는 최고의 종교국가에서도 선생이었다. 하나님에 대해 누구보다도 안다고 자부할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있게 내가 보니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자 예수님은 카운터 펀치를 날리신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잘 알아? 그런데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어!’
니고데모는 ‘거듭남’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그래서 바로 말이 바뀐다.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겸손한 태도이고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이다. 어설피 아는 지식으로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성숙해지는데 큰 걸림이다. 말하기를 더디하고 듣기를 속히해야 하며,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고(가난하면 가난하다고, 모르면 모른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약하면 약하다고), 어떻게 해야할지 질문하라!
니고데모의 말에서 틀린것이 무엇인가? 여러번 지적해서 알아본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2절에서 자신있게 ‘당신은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말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늘로부터 오신’것은 정확하게 맞췄다. 그러나 ‘선생’은 틀렸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선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의 수준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해되거나 해석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순간 그분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놓은 신이 된다. 꼭 나무나 돌로 조각을 해서 섬겨야 우상이 아니다. 내가 디자인해서 확고하게 만들어놓은 이미지를 섬기는 순간 그것은 우상신이 된다.
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는 내 가족의 병을 안고쳐줬을 때 가짜신이나 나쁜신이 되고, 날 부자로 만들어주는 신, 성공이나 행복을 주는 신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배우라.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모습이다. 일이년에 내가 하나님에 대해 정복하겠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평생을 두고 계속 배우고 그 배우는 즐거움을 경험하라. 인생에 가장 큰 행복 중에 한가지이다.

거듭남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아노센은 위로부터와 새롭게 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둘 중에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니고데모의 말때문에 거듭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위로부터가 더 가깝게 보여진다.
‘아노센’은 신약에서 12번 사용되는 단어인데 3:3,7에서만 ‘거듭’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다른 곳에서는 거의 ‘위로부터’라는 의미로 쓰인다.
‘아노’란 ‘위로’라는 뜻인데 2장에서 사용된다.
John 2:7 NKRV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때에 ‘아귀’가 바로 ‘아노’이다. 즉 물을 채우는데 적당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위까지 가득 찼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신앙생활의 목적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과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깊이 있는 대화를 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성숙한 성도의 말과 행동은 모든 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미숙한 성도의 말과 행동도 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성숙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삶에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한다.
미숙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신앙의 성숙이란 결국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것으로 완성되고 온전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의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할 수 없는 상황에도 할 수 없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해내는 사람.
함부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
유력한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한 사람이나 똑같이 보려는 시선.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 섣부르게 안다고 판단하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교회에서 배우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살아내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 준비했고 참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미래를 우리 자녀들에게 살도록 해주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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