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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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는 디도서와 함께 목회 서신으로 분류됩니다.
영적 아버지이자 스승인 바울이 후임 목사인 디모데에게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 지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목회적 관점에서 쓰인 편지입니다.
목회적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목회 사역의 원리나 지도자의 자질에 관한 내용을 풍성히 담고 있습니다.
디모데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행16장에서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행 16장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 대한 기록인데, 2차 여행에 대한 기록에서 벌써 디모데를 ‘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따라서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중에 바울의 전도를 받아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시편은 작은 성경이라고 불려 마땅하다. 성경 전체에 담겨 있는 모든 것들이 지극히 아름답게 간략한 모습으로 담겨져 있다. 시편은 진정 뛰어난 안내서이다” (마틴 루터)

“이 보고에 얼마나 다양하고 휘황찬란한 부가 담겨 있는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나는 이 책을 영혼의 모든 부분을 해부한 책이라고 불러도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다 거울처럼 여기에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 칼빈)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디모데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먼저 믿음을 가졌고, 디모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전도와 성경 교육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치유했던 일, 복음을 전하며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지만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며,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2차 선교 여행 때 다시 재회하였고,
이때부터 디모데는 바울의 선교 여행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바울의 선교팀에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 중 다수는 선교팀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였는데, 빌립보서 1:1절에 의하면 감옥에까지 함께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석방 된 이후, 함께 에베소에 방문하였다가 에베소 교회를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많은 교회들에 거짓교사들이 침투하였는데, 에베소 교회에도 거짓교사들이 침투를 하였습니다.
그런 거짓교사들을 맞서서 어떻게 대항해야하는지,
어떻게 교회를 감독해야하고 사역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을 직분자로 삼아야 하는지,
등등 목회사역 전반에 대해 목회적 관점에서 디모데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을 한절 한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2절과 13절 이 두 구절만 읽게 되면,
이 두 구절이 바울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죄인이었고, 그런 그를 용서하시고, 직분을 맡기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찬양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은 단순히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그리고 그런 그를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그런 개인적으로 고백하고 있는게 아니라,
그보다는 좀 더 교리적이고,
좀 더 신학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앞 단락과 연결해서 읽게되면,
지금 바울은,
‘율법이 아닌 복음이다’
바로 이 한 문장을 간결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세워진 에베소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였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율법은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이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
등등 율법으로의 회귀를 설파하였습니다.
율법으로의 회귀를 설파하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수 천년간 이스라엘의 전통을 지배했던 율법이기에,
왠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아무런 수행도 하지 않았는데
공짜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것보단,
오히려 뭔가 고통스럽게 수행하고,
그만한 댓가를 치러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편이
더 상식적인 것 같고, 일반적인것 같아,
더 안전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렇게 율법으로의 회귀를 강요하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
에베소 교회가 흔들리고 있을 때,
바울은 그 모든 혼란을 잠재우는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는데,
지금은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라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사도인 내가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을 따르거나 잘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보세요. 나는 과거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적인 존재였던 내가
어떻게 사도가 되었습니까?
율법을 따라서입니까?
율법을 지켜서입니까?
율법을 따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와 자비로,
나의 모든 비방과 박해와 폭행을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4절 15절 입니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 중에 괴수인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과거 나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을 만한 은혜를
나에게 쏟아부으셔서,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나 뿐만이 아니라,
나같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그냥 들어오시면 됩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오직 죄인의 모든 죄를 덮는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외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분성에 대해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도 충분하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충분성’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도 충분할 수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 은혜로만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도의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우리를 덮었기 때문입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했던 그 은혜
일방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 은혜가 우리를 덮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아멘.
미쁘다 라는 말은 믿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믿어도 된다는 말은,
고려를 해보라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는 것은
충분히 믿어도 되는 진실이며,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어떤 죄인도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조금 더 나은 삶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단순히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거듭나 완전히 새로워진 사람이 되어
세상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은 믿어도 충분한 미쁜말입니다.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
12절을 잠깐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신 데 대해 3가지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능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능력을 받다’라는 의미입니다.
능력을 받았다 라는 것은,
바울이 이미 어느정도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
거기에 능력을 더해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울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유명한 고백인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고백에서도 동일한 단어로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여기다’라는 표현은 관계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인데,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우호적인 판단을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되다고 불린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을 감사해 합니다.
직분은 곧 사명이며, 책임감이며, 의무입니다.
그것은 바울로 하여금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끊임없이 사역하게 합니다.
끊임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하며,
끊임없이 외치도록 합니다.
그래서 직분이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부담이 될 수 있고, 어깨를 짓누르는 거대한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분을 맡겨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저 받고 누리기만 하는 수용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이자 도구로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드렸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사명의 사람입니다.
바울의 감사를 보며,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소망합니다.
어제 대부흥전도 주일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3주간 대부흥 전도를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 라는 사명을 주심에 감사하며,
그 사명에 충실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저 누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이자 도구로 마땅히 내어드리는 사명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시는 그 그림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16절입니다.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과거를 회고하며
예수님의 놀라운 인내하심을 깨닫습니다.
바울은 광분한 박해자였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을 때
주님은 심판자가 아닌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없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바울이 주님께 긍휼과 자비를 입은 까닭은
오직 주님께서 오래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오래 참으셨던 주님은
우리에게도 오래 참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인내해 주십니다.
우리가 의심하고 반항할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참으시고 우리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17절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주님은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썩지 아니하시며, 보이지 않으시며,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하도록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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