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길을 선택하라 2025 0405 삼상2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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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18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1 Samuel 26:1–12 NKRV
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3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4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용서는 내가 죄 짓지 않도록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신뢰하는 영적 여정입니다.

들어가는 이야기

깊은 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있습니다. 3,000명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사울의 진영에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왕은 가운데 누워 있고, 그의 창은 머리맡에 꽂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움직입니다. 바로 다윗과 그의 충직한 부하 아비새입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속삭입니다.
1 Samuel 26:8 NKRV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복수의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울은 이미 오랫동안 다윗의 목숨을 노려왔습니다. 모든 상황이 완벽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대답은 예상을 뒤엎습니다.
1 Samuel 26:9 NKRV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이 극적인 순간, 바로 이 순간이 다윗의 인생을 정의하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그는 단지 적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밤중의 기로에서 나타난 용서의 본질, 그 영적 의미와 복음적 교훈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Ⅰ. 용서는 선택입니다: 다윗의 결단이 보여주는 용서의 본질

1. 용서는 감정이 아닌 의지적 결단입니다

1 Samuel 26:9 NKRV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에게는 정당한 복수의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끊임없이 추적했습니다. 수많은 날을 도망자로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에 대한 분노나 억울함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는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하기 어렵고, 그래서 위대하고 고결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용서에 관하여서 율법을 뛰어넘는 개념을 제시할 정도로 용서가 꼭 필요한 것임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왜 일곱번이라는 예시를 들었을까? 당시 유대문화를 이해하면 이 단순해 보이는 한번의 질문 안에 많은 맥락을 읽어낼 수 있다.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암 1:3, 2:1, Joma 86b).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또는 거룩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3번이나 7번 같은 제한적인 용서가 아니라, 무한(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으로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는 용서가 일회성 행동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무한한 복수심에 반대하는 지속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시켜 놓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상대방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자, 결단입니다.

2. 용서는 내가 죄 짓지 않도록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1 Samuel 26:9 NKRV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시 우리 본문에서 주목할 점은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라는 다윗의 말은 복수가 자신의 영혼에 가져올 상처를 깊이 인식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음으로써 사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사울에게만 유익을 준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다윗 자신의 영적 순결함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호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죄의 덫에서 보호하는 영적 자기방어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이 진리를 명확히 가르치셨습니다.
Matthew 6:14–15 NKRV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복수는 달콤해 보이지만, 결국 우리 자신을 죄의 순환 속에 가두는 독입니다. 마치 우리 몸에 들어온 독소가 서서히 장기를 손상시키듯, 복수심은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파괴합니다. 처음에는 정당한 분노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독은 쓰라린 감정, 원한, 분노로 변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방해받습니다.
복수의 독은 실제로 우리의 신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의학 연구에 따르면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를 품은 사람들은 혈압이 높아지고, 면역 체계가 약화되며, 스트레스 호르몬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용서의 극치를 보여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린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두 아들(손동인, 손동신)을 그저 기독교인이고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이런 상황에서 복수심을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주범 중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젊은이를 용서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순사건이 진압되면서 처형의 위기에 처했으나, 손 목사님은 그를 살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자로 입양까지 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그 아들들을 죽인 사람을 자신의 아들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용서의 모습이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한국전쟁 중 공산군에 의해 순교하셨지만, 그의 용서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이념,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던 안재선, 손 목사님의 용서를 통해 복수의 고리가 끊어지고,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은 목사가 되어, 순교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그 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해독제입니다. 해독제가 독소를 중화시키듯, 용서는 복수의 독을 중화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치유합니다. 주목할 점은 해독제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투여해야 하는 것처럼, 용서도 의도적인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라, 복음의 빛 속에서 내리는 결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육체적 고통 중에도 영적 자유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결단이었습니다. 용서하심으로 그리스도는 죄의 독이 자신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이해했기에 비록 손쉽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용서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했고, 하나님의 약속된 계획 안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복수의 독을 마시는 대신, 용서라는 해독제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타이밍을 100퍼센트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Ⅱ. 용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타이밍을 신뢰하는 삶

용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신뢰하는 영적 여정입니다

1 Samuel 26:10 NKRV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다윗은 그 밤에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시간표를 신뢰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실 것"이라는 다윗의 고백은 자신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전략적 결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이 가졌던 깊은 영적 통찰력은 "때"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우리 삶에서 때로는 "아니오"라고 느껴지는 하나님의 응답이 사실은 "지금은 아니다"라는 응답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전도서 3장 1절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는 데도 "때"를 두셨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즉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인들은 큰 항아리 여섯 개를 물로 가득 채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물을 길어와 항아리를 채우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모든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찼을 때에도 여전히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제 떠다 주어라하고 하인들이 그것에 순종했을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빚어가십니다.
용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모든 감정이 즉시 치유되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항아리를 물로 가득 채우는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제 그만 채우고 싶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끝까지 순종을 요구합니다. "가득" 채우고 말씀을 붙들고 “떠다 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권세가 있으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신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복수는 우리에게 통제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마치 다윗처럼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통제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용서의 영역이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아니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낙심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거의 포기하려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이제 때가 됐다"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용서의 여정에서 지치지 마십시오. 우리가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순간,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있습니다.
다윗의 용서는 그를 단순히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간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그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는 신적인 성품의 표현입니다. 다윗의 행동은 수천 년 후에 오실 메시아의 용서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그 용서를 우리가 지금 받았습니다.

Ⅲ. 용서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용서가 다시 쓰는 이야기

용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피해자'에서 '회복자'로 변화시킵니다

1 Samuel 26:12 NKRV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다윗이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져간 행동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사울의 생명을 취하는 대신, 자신이 사울의 생명을 취할 수 있었다는 증거만을 가져갔습니다. 이 순간 다윗은 자신의 이야기를 '복수자'에서 '자비로운 미래 왕'으로 다시 썼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사울에게 쫓기는 피해자'가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회복자'가 되었습니다.
피해자 정체성은 우리를 과거의 상처에 묶어둡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자신의 가치를 상처로 정의하게 됩니다. 반면에 회복자 정체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목적을 부여합니다. 이제 질문은 "이 경험을 통해 어떻게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로 바뀝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가 되었지만, 나중에 그들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은 '피해자'에서 '회복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후 다윗과 사울의 만남(삼상26:17-25)에서 우리는 관계의 변화도 목격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다윗을 축복했습니다. 비록 사울의 마음이 완전히 변화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다윗의 용서는 그 순간 두 사람의 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1 Samuel 26:25 NKRV
25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이것이 바로 용서의 변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속한 피해자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회복자가 됩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용서는 자신을 억압하는 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상처를 준 사람의 감정적 지배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쓸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쓰는 사건이었습니다.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친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이 변화된 정체성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용서를 통해 자신과 관계의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고통과 상처의 이야기가 은혜와 회복의 이야기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우리를 피해자의 자리에서 회복자의 자리로, 고통의 순환에서 은혜의 순환으로 옮겨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결론: 내려놓은 창이 써내려가는 새 이야기

용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사울의 생명을 살려준 놀라운 이야기를 통해 용서의 본질과 능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삶에 이 진리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용서는 감정이 아닌 의지적 결단입니다. 다윗에게는 정당한 복수의 이유가 충분했지만,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해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용서는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결단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죄의 독에서 보호하는 행위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처럼, 우리도 복수의 독을 마시지 않고 용서라는 해독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용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신뢰하는 영적 여정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기 위해 항아리를 가득 채워야 했던 것처럼, 용서도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과정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오"가 아니라 "지금은 아니다"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실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복수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게 됩니다.
셋째, 용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피해자'에서 '회복자'로 변화시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사울에게 쫓기는 피해자"가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회복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상처를 준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과거의 상처를 통해 다른 이들을 회복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창을 내려놓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지금 여러분은 가득 채워야 할 항아리가 너무 많다고 느끼시나요? 하나님께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 다윗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용서의 모든 순간이 의미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이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순간은 여러분의 믿음을 빚어가고 있습니다.
용서의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는 일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그분에게서 얻습니다.
Ephesians 4:32 NKRV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오늘, 용서의 여정을 시작함으로써 여러분의 이야기가 다시 쓰여지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 창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식으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다시 써나가실 것입니다. 복수와 분노와 원한의 이야기가 아니라, 은혜와 화해와 회복의 이야기로 말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여러분이 마지막 항아리를 채우려고 할 때,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이제 때가 됐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여러분의 용서는 여러분과 다른 이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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