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질로
0 ratings
· 24 viewsNotes
Transcript
[다시 본질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령의 철학자 한분이 계십니다.
바로 김형석 교수님입니다.
그분이 한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종교는 본질에 충실할 때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본질에서 벗어날 때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추해질 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한국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던지는 질문이 매우 크다고 느낍니다.
최근 발표된 종교 관련 통계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는 불교나 천주교보다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저출산 대책’, ‘기후 위기 대응’ 같은 여러 사회 이슈가 언급되었지만,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 지목된 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도덕성 회복”이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기보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9장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며 우리는 과연 그것을 따르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비추어 보고,
기독교가 진짜 추구해야 할 본질과 길을 함께 찾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론1]
오늘 본문에 또 한 번 등장하는 지명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이제 고난과 죽음을 향한 마지막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 예수님은 제자 두 사람을 보내 이상한 명령을 하십니다.
“아무도 타본 적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너라.”
예수님은 그동안 줄곧 걸어서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새끼 나귀를 타시려는 걸까요?
스가랴 9장 9 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도성 시온아 기뻐하여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며, 온유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임을 드러내신 것이죠.
그러나 스가랴가 말한 메시아는 말을 탄 정복자가 아닙니다.
새끼 나귀를 탄 겸손한 왕입니다.
성경에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짐승’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특별한 용도로 구별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기 위해,
구별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왜 하필 새끼 나귀일까요? 왜 위엄 있는 백마가 아니라,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동물일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왕은 권력과 외모와 화려함으로 위엄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심으로 왕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38절에서 제자들은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 고백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천사들의 찬양(눅 2:14)과도 연결되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고백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자 ‘왕’으로 진심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로마를 몰아낼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맞는 고백이지만, 왜곡된 기대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바람을 더 믿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기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자,
내 인생을 축복으로 채워줄 분만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마태복음에 보면, 예루살렘 입성 즈음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요청합니다.
“주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 제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마 20:21)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영광의 자리로 데려다줄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마음속에는 자기중심적 기대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 내 문제 해결해주세요.”
“예수님, 이 길이 열리게 해주세요.”
“예수님, 제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내가 주인이고 예수님은 나를 돕는 조력자처럼 여기고 있진 않나요?
예수님을 태운 새끼 나귀가 되어야 하는 우리가 오히려 예수님을 태우고 내 뜻대로 몰아가려는 나귀처럼 행동한 경우는 없었나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어떤 메시아를 고백하고 있느냐? 너의 기대를 채워주는 예수냐, 아니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냐?”
[본론2]
사랑하는 여러분, 앞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찬양했지만,
여전히 왜곡된 메시아상을 품고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39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꾸짖으소서.”
이들의 요청은 단순한 불편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도덕적 교사, 혹은 특별한 랍비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찬양하자,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진짜 이유는 하나님을 오랫동안 ‘자신들의 틀’ 안에서만 이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해석 틀, 유대 종교 전통의 틀, 자신들의 종교적 자부심.
이런 신앙의 ‘껍데기’와 ‘옛 질서’에 갇혀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눈앞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바리새인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오늘의 바리새인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고, 바로 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익숙한 방식, 내가 경험한 틀 안에서만 신앙을 해석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 그랬습니다.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며 저만의 신앙 틀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틀이 나도 모르게 다른 신앙의 모습을 판단하고 제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외에서 여러 교회를 경험하며 그 틀이 하나씩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영국의 작은 지역교회는 50~60명 정도의 소박한 공동체였습니다.
기도는 토요일 아침에 조용히 영어로 돌아가며 짧게 하고,
주일 예배 때는 다리를 꼬고 앉아 듣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처음엔 이런 신앙이 매우 어색하고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 흐르는 진한 사랑과 신앙의 향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등록금을 내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때, 익명의 성도가 조용히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고위 공무원부터 불가리아 출신 정비사까지 서로를 품고 사랑하는 다양한 신앙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신앙을 어떤 틀에 가둬놓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진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제자들처럼 주님을 찬양하면서도 은밀한 욕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의 틀에 갇혀 본질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내 신앙의 틀은 진리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가로막고 있는가?”
[본론3]
앞에서는 환호하는 제자들, 그리고 항의하는 바리새인들을 보았습니다.
찬양과 분노, 기대와 오해가 뒤섞인 그 혼란의 중심에서
예수님은 홀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눅 19:41)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정말로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축구장 20개가 넘는 면적, 화려한 석조 구조와 금장식,
그리고 유대인의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 지구 종말이 올 것이라 믿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서,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은 왜 눈물을 흘리실까요?
그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을 놓쳐버린 사람들,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마음은 멀어진 예배자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이 담긴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환호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홀로 울고 계십니다.
분노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진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평화에 이르는 길을 네가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눅 19:4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단순히 분열과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샬롬’, 곧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가 치유되며, 세상과의 관계가 조화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며,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평화의 자리가 아닙니다.
45절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기도하는 집, 하나님과 교제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어느새 돈과 권력의 공간, 형식과 제도만 남은 장소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예배한다고, 하나님이 반드시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기도와 예배는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거대한 성전 앞에서, 예수님은 가장 낮고 초라한 길을 택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루시는 평화는 무력과 위세로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이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위에서 강요하는 질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이 한국교회를 바라보신다면 어떤 마음이실까요?
형식은 남았지만, 본질은 사라진 예배, 교회 안에서조차 분열과 탐욕이 넘치는 모습,
은밀한 욕망과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잃어버린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그러나 깊이 울고 계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두에 언급한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을 다시 떠오릅니다.
“종교는 본질에 충실할 때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본질에서 벗어날 때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추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때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을 놓쳤습니다.
제자들은 찬양의 고백을 했지만 은밀한 욕망을 감추었고,
바리새인들은 많은 지식은 있었지만 편견에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든 군중 한가운데서 홀로 눈물을 흘리십니다.
어느 누구도 평화에 이르는 길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인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진정한 평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평화가 그 어느때보다 중요한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좌우의 갈등, 남여의 갈등, 세대의 갈등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요?
신앙의 본질은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메시아를 원하고 있습니까?
화려한 백마가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진정 원하십니까?
우리가 가는 길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와 예배가 본질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삶의 변화가 없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를 보며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함께 걷는 교회 모든 식구들과 더나아가 한국교회가 다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