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9 유치부 교사모임_오늘날의 요셉으로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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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9:7-9>
(창 39:7)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창 39:8)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창 39:9)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시편 68:5> (시 68:5)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아멘.
오늘 본문인 창세기 39장은 요셉의 인생에서 축복과 역경이 뒤섞이며 인생이 갑자기 꼬이는 장면입니다. 보통 우리가 기억하는 믿음의 인물들은요, 기드온이나 다윗처럼 밑바닥에서 시작해 점점 회복되며 올라가는 흐름이 많잖아요?
그런데 요셉은 그 반대입니다. 처음엔 형통으로 시작했지만, 유혹과 모함, 그리고 감옥을 지나면서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떨어지는 인생이죠. 그 흐름이 창세기 39장 전체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생각해보면, 만약 요셉이 주인의 신뢰를 받는 안정된 삶을 원했다면 그 유혹 앞에서 한 번쯤은 눈 감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사실 잠잔다 해서 티도 안 나고, 오히려 주인 아내의 신임까지 얻어 더 편안해 질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요셉은 눈앞에 있는 죄가 당장의 편안함을 줄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옳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정직함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요셉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정직함을 지켜냈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작은 양심이 큰 유혹을 이겼다.

본문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지만, 지금 보디발의 유혹은 그냥 가볍게 눈짓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7절에 보면 그녀는 요셉을 향해 ‘눈으로 계속 찡긋찡긋하며 “나랑 동침하자” 유혹하고 있죠. 단순한 말 한마디가 아니라 아주 적나라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유혹 앞에서 잠깐이라도 흔들리지 않고 분명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ᄁᆞ요?
그의 마음속에는 깨어 있는 ‘양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주인 보디발에 대한 충성과,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창 39:1-2)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되고, 인정도 받았죠. 그런데 성경은 요한삼서 1장 2절에서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다시 말해 “영혼이 잘되면, 모든 일이 잘된다, 형통하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형통했던 이유는, 그의 영혼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떻게 살아나고 잘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마음 속 ‘양심’이 살아 있을 때, 영혼이 살아나고 잘 될 수 있다고 시편 51:10절에서 말씀하죠.
요셉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마음속에 있는 미세한 양심의 소리에 집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근데 그게 너무 어려워요.
예를 들어, 일주일 내내 직장과 가정일에 치이다가, 겨우 주말에 교회왔더니 유치부에서 이거해라, 교구에서 이거해라, 또 남녀선교회에서 이거해라 하면 마음속에 먼저 피곤함과 부담이 밀려올 때가 있죠. 그럴 때, 저기에 가선 “아우, 유치부 때문에 바뻐~”, 그리고 여기에 와선 “저쪽 일이 많어~” 하면서 양쪽에 핑계 대고 빠져나가기도 하죠. 얼핏 보면 작은 거짓말 같지만, 이런 작은 타협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양심이 조금씩 무뎌지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분별력도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때,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설 수 있는 힘은 이런 ‘작은 정직함’과 ‘양심을 따르는 훈련’에서 나오는 것이죠. 보디발의 아내 면전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9절의 요셉의 거절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 살았기에, 그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거룩한 고백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일을 감당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도 요셉처럼 작은 소리로 울리는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앞에서 늘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신앙으로 이겼다.

보디발의 아내는 분명하게 거절당했는데도, 속된 표현으로 대차게 까였음에도 불구하고, 10절을 보니 “매일같이 요셉한테 ‘나랑 동침하자, 침대로 올라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유혹했습니다.
근데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남자면 저렇게 추파 던지고 할 수도 있다 쳐도, 근데 저는 안 그래요. ’싫어? 그럼 말어‘, 여튼 근데 여자가 자존심도 없나? 왜 저렇게까지 하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6절을 보니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더라”라고 나오죠. 여기서 ‘아담하다’는 작고 귀여운 아담함이 아니라 남들이 요셉을 보는 순간 ‘야 쟤 미쳤다, 쟤 봐봐’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가졌던 사람이 요셉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때 요셉의 나이가 29이니 파릇파릇했겠어요, 근데 거기에 장관급인 보디발 집에서 수석비서 역할을 맡을 만큼 능력까지 다 갖췄으니 보디발의 아내가 눈이 돌아가서 손짓, 발짓, 오만 짓 다 하면서 어떻게든 침대로 데려오려고 꼬셨겠죠. 하지만 요셉은 그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는 ‘요셉은 믿음이 있으니까 이겼겠지?’ 막연히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수기 25:1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요셉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는 죄에 빠집니다. 이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방 여자들을 보는 순간 눈이 뒤집히며 넘어갔죠.
결국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누군가는 유혹에 무너지고, 누군가는 이겼습니다. 그럼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거냐?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서 옵니다. 요셉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수준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것을 ‘큰 악’으로 여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창 39:9절). 그래서 보이는 유혹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며 살아온 요셉이었기 때문에 그는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죠.
따라서 우리도 교사로서 또는 저마다의 직분자로서 매 순간마다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살고 있는지 각자의 양심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해보며, 요셉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갖고 하나님만 선택하는 모두가 되길 소원하겠습니다.

3. (결론) 오늘날의 요셉은 우리다

앞선 대지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셉은 치열했던 유혹들을 끝까지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양심을 따라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형통이 아니라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철저히 홀로 버려지는 고독이었죠.
요셉은 창세기 37장 24절에서 이미 자기 친형제들에 의해 깊은 구덩이에 던져지는 억울함과 외로움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두 사건 모두 공통점은 요셉이 죄를 지은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노예가 되어야 했고, 강간 미수범으로 몰려야 했죠. 그게 만약 우리라면, 하루아침에 강산 미수범이 됐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수치스러울까요?
그렇게 요셉이 갇혔던 구덩이와 감옥은 사방이 다 막혀,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외로운 자리였습니다. 사람도, 말도, 위로도 닿지 않는 그곳에서, 시편 68편 5절,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이 말씀처럼 사람은 다 떠났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셨고, 그 깊은 자리까지 찾아와 주셨습니다. 요셉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졌을 때, 고독한 자를 찾아와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고독은 요셉만 겪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태복음 8:20절) 말씀하셨죠. 예수님의 외로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상황에서, 가족과 형제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심지어 메시아 오시는 길을 예비해야 했던 세례 요한마저 예수님을 의심했죠. 이것처럼 예수님만큼 매일매일이 고독했던 분도 없습니다.
그 고독의 절정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실 때 아까 시편 68편 5절 “고독한 자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고독한 성자 예수님을 친히 찾아오셔서 기도에 응답해주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진리는, 고독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시는 축복의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사순절은 단지 무언가를 끊는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고독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에 예수님의 고난을 따라가고, 그분의 외로움을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찾아오시는 자리가 고독한 곳이란 것을 잊지 마시고, 남은 사순절 동안 고난 속에서도, 고독 속에서도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과 요셉을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모두가 되기를 소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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