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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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위로다
심판이 위로다
지난 주 앗시리아, 성경에서는 앗수르라는 대제국이 창세기부터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내용도 살펴 보았고 요나와 함께 나훔을 살피면서 요나가 하나님의 설득 그리고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에게 요구하시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설정하여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배치해 두고 있다는 내용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에 반해 나훔서는 오히려 니느웨의 멸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요나처럼 니느웨에 회개를 요청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니느웨의 멸망 그리고 오늘 말씀으로 이어지는 앗시리아의 멸망까지 선언되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듣고 있는 대상이 유다요. 유다의 위로를 니느웨의 진노와 연결하고 있으면서 이 부분이 심판에 대한 우리의 어색함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에게 위로가 되는 핵심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2장부터 니느웨의 멸망을 살펴 보는 중이었습니다.
또한 심판의 강도가 갈수록 더 커지고 있는데 8절에 시작을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여기 노아몬이라는 지역은 애굽의 수도로 ‘테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수도에 대한 정보가 강물에 둘러 싸여 있고 큰 물이 방어벽이 되는 자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디오피아, 이집트, 붓과 리비아가 도와 주었다는 말은 주변 나라와도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집트는 예로 부터 지중해의 곡물 창고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나라들은 이집트와 늘 교역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집트를 침공해서 식민지하려는 움직임도 많았지만 아무튼 지정학적 위치와 국가간의 상호 협력이 잘되었기에 쉽게 무너질 상황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10절에 본문에 번역되지 않은 ‘감’이라는 부사가 맥락에 따라 여러 형태로 해석이 되는데 ‘그러나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앞서 난공불낙의 요새화 된 노아몬이라 자랑했지만 결국 함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러한 성읍의 주민도 사로잡혀 갔다 어린 아이들은 길거리 모퉁이 모퉁이에서 나동그라져 죽고, 귀족들은 제비 뽑혀서 잡혀 가고 모든 지도자가 사슬에 묶여서 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11절에 ‘너 또한’이라고 시작하면서 니느웨의 철저한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앗시리아의 왕아’라고 니느웨를 칭하던 표현은 왕을 직접적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19절 마지막절은 ‘너의 계속되는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형태로 마무리 합니다. 요나서 마지막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우리가 요나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에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라는 질문의 형태로 동일하게 끝내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의 회개 운동 그리고 100여년이 지난 시점에 나훔은 다시 멸망의 예언을 합니다. 물론 요나처럼 직접 외치러 갔다는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나훔의 예언 후 50년 이 지난 기원전 612년 3월에 616년부터 시작된 공격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니느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백년 전에 이스라엘의 한 선지자가 도성에 와 외쳤던 기록이나 그로 인해 물러간 진노를 겪어보지 못했으니 어떤 평가가 있었을까요?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중국을 배경으로 한 명의에 대한 이야기인데 하도 병을 잘 고치니 명의라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된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자신의 형이 둘이 있는데 첫째 형은 사람이 태어나면 그가 어떤 병이 걸릴지 알고 대처를 해주고 둘째 형은 그 사람의 눈 빛만 봐도 어떤 병인지 알고 약을 처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아프고 나서야 찾아오면 아픈 증상을 보고서야 처방을 해주는데 어떻게 자신이 명의겠느냐는 이야기 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팔려가 바로가 꾼 꿈을 해몽하고 적임자로 여겨 국무총리가 되어서 나라의 7년 흉년을 잘 대처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왕들이 몇 차례 바뀌니까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라고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1:8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니느웨도 그랬을가요? 아들에게서 다시 두 아들로 나라가 갈라질 상황과 자연적인 재해는 고대의 신과 연결된 모습이라면 백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명의의 이야기처럼 회개하고 진노를 피했던 니느웨는 어쩌면 아픈 증상을 경험하지 못했던 이유로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한 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3장을 시작하면서 화 있을진저, 즉 너는 망한다라고 외치며 니느웨 성을 이렇게 부릅니다. ‘피의 성’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 이 짧은 표현이 니느웨를 결정짓는 표현입니다. 미가 2:1–2 “1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새번역으로 보면,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고 마는 자들이다라고 보다 실감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발동시킨 것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하였으니 너희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목요일에 하고 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금요일에 할터인데 금요일에는 79년에 선포했던 계엄령이 46년만에 다시 선포되는 초유의 사태로 인한 4개월여 탄핵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탄핵 인용을 할 것이기에 목요일에 미리 설교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어찌보면 그 안에서 각자의 자유는 보장되고 선택하며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주보다 넓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저 미비한 것입니다. 마치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자전과 함께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동시에 태양계는 우리가 속한 은하를 공전하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움직임이나 생각이 움직이고 돌고 은하에 속한 어떤 것에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태양이 그 빛을 잃는다면, 달과 지구의 중력이 한치라도 변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적 표현처럼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도 의미가 있는 것이요 인류의 역사도 의미가 있는 것이요 오늘 인간 말종의 장난질에 놀아난 고통도 의미가 있는 것이자, 앞으로 어떻게 다시 헌법의 가치를 세우고 자유민주주의를 견고하게 할 것인가를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만들어 가는 것 역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회개할 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대 왕국이 1500년을 넘어서 4개의 시대적 구분할 정도는 후일에 비교되는 1200년을 버틴 로마제국 조차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지난주 경남 지방 30여곳의 동시다발적 산불로 인해 거의 10여일이 불타는 장면을 티비를 통해 보았습니다. 전문가가 불이 이렇게 빨리 번질지 몰랐다는 말이나, 차량으로 이동하면 안전할 줄 알았지만 불 길에 사로잡히는 일이나, 많은 인명 피해는 결코 우숩게 볼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문화 유산 그 중에서도 천년 고찰이 힘없이 전소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불자들은 그 앞에서 오열하고 통곡하는 모습도 뉴스에 소개 되었습니다. 그저 지나갈 사건으로 끝날지 아니면 기억될 지는 이제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듯 말입니다.
25년을 시작하면서 12선지서의 중심에 미가서를 살피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사는 것은 그저 몸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고통을 당하는 욥이 전능자를 만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37:5 “5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맞습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입니다. 천재지변으로 일순간 가족이 죽는 일이나, 자신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쪽박이 되는 일이나, 자신의 건강을 잃는 일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치인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죽음 만을 놓고 말한다면 그렇게 코너에 몰리자 죽음을 선택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을 발견한 사람들은 세상에서도 죽음을 넘어서 그 사람의 가치가 살아있고 사람들의 입에서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오고 가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신자는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욥은 그런 순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죽어서 전능자 앞에서 설 것이고 나를 판단해 보시면 알겠지만 결코 잘못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정금과 같이 될 것이라고 자신의 죽음을 놓고 벌이는 교만은 말씀드린 어느 정치인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욥과 단판을 지을 때 욥은 알았습니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최근 전국민을 눈물 바다로 만든 일면 ‘폭 삭’은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며 그 안에서 평범한 일상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민하게 들어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끝판 왕을 만들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눈물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헤아리고 싶다’라고 항변하는 듯 했습니다. 이런 일을 눈물로 설명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내 감정이야 말로 가장 솔직한 것 아니겠느냐는 헤아리고 싶어하는 철저한 몸부림도 보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현실로 돌아와서 볼까요?
지난 주 어떤 목사님의 아내분이 취업을 앞두고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형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4주간 24-28회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을 예정이니 기도해달라고 톡이 온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 될까요? 슬픔에 감당하지 못할 감정을 쏟으면 마음이 편해질까요? 그 다음이 있어야 ‘헤아릴 수 없는’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탄핵 소추라는 관문을 넘기 위해 눈물 뿐만 아니라 탄핵봉도 있어야 했고 키세스도 있어야 했고 갖가지 슬픔이 쌓인 채 함께 웃으며 노래 부르던 현장이 사실은 삶에서 더 뜨거운 현장이 아닌가요? 결국은 ‘탄핵 심판’이 이루어지니까 불면증도 고쳐지고, 여행도 가고 다시 시시콜콜한 농담도 주고 받는 것이 된 것처럼 이어지는 말씀에 ‘큰 일을 행하신다’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해결할 절체절명의 방법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6가지의 기도제목을 알려주시면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때론 무너지는 작은 마음이 기도의 동역자분들의 기도로 다시 일어날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동역자분들이 계심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때론 무너지는 작은 마음은 우리가 처하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기도의 동역자들, 그런 이들이 있음에 대한 감사’가 하나님께서 행하실 큰 일의 시작이 아닐까요?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이 ‘위로’였습니다. 심판은 동시에 위로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우리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눈물 바를 날이 없는 인생을 살다가 떠납니다.’ 가장 큰 위로는 결국 나를 아는 배우자의 ‘수고하셨습니다’이겠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큰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도가 있고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가 되는 최사모님의 간절한 감사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위로임을 믿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탄핵 결정을 앞두고 금요일이 아닌 목요일에 준비하다.
내용을 바꾸지 않고 마음에 정한대로 준비하다.
선한 능력으로 // 디트리히 본회퍼 / 루터교회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개신교 가문에서 출신. 중요한 점은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1945년 입니다. 년도가 의미하는 바가 있죠. / 당시 교회는 히틀러를 구세주로 고백했고, 맹목적으로 우경화되던 시기였다. . 그래서 ‘고백교회’를 설립해서 올바른 신학과 신앙을 가르쳤던 분이다.
당시 여차한 혜택으로 반드시 군복무를 해야했던 그가 소속 정보원 자격으로 영국으로 복무대신으로 파견형태로 가서 영국의 정보를 보고하는 일을 했고. 그러나 상황이 악화되자 망명을 할 권유를 받았고 미국 신학교에서도 제안을 받았지만 대부분 독일을 탈출하는 의미에 있었고 그는 ‘동포들이 어둠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누군가는 그들을 섬겨야 한다’라고 거절하면서 독일로 귀국한 후 체포 위기에서 지하로 활동하다가. 1944년 히틀러 암살 사건에 참여했지만 미수로 끝나고 종전 한 달을 앞두고 1945년 4월 9일 새벽에 교수형으로 처형 되고 그의 묘비에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의 말 중에 ‘악을 대면하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죄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
그의 별명에는 목사, 스파이, 암살자 라고 ‘선한 능력ㅇ으로’는 옥중에서 약혼녀에게 썻던 편지의 일부 시 내용입니다.
선한 능력이 조용히 우리를 감싸며
기이한 평안 속에 우리를 지키시니
이 날들을 당신과 함께 살아가며
새해를 소망으로 맞이하리라
고통의 기억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무거운 짐이 마음을 짓누를지라도
주여, 불안에 떠는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구원으로 평안히 품으소서
만일 우리에게 쓰디쓴 고난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 해도
우리는 떨지 않고 감사히 받으리
당신의 선하고 사랑스러운 손에서
그러나 다시금 기쁨을 허락하신다면
이 세상과 그 찬란한 빛 속에서
지난 날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우리 삶을 온전히 당신께 드리리
오늘도 촛불을 따스히 밝히소서
당신께서 우리의 어둠에 두신 그 빛
만일 가능하다면 다시 함께 모이게 하소서
당신의 빛이 밤에도 우리를 비추나니
이제 깊은 고요가 우리를 감쌀 때
우리는 들으리, 충만한 그 음성을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나라에서
모든 자녀들이 부르는 찬양을
선한 능력이 놀랍도록 우리를 감싸시니
다가올 모든 날을 담대히 맞으리
하나님은 저녁에도, 아침에도 함께하시며
그리고 모든 새로운 날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