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6 청년 생명의 주인(요11: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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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통

우리를 지금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참 사랑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오늘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와 같은 은혜가 언제나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걱정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없는 시절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어려운 상황과 사건들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요? 저는 이런 예고 없이 찾아오는 어려움을 통합적으로 표현해서 고통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의 순간을 마주하면 저마다의 개인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무지불식 간에 마주한 알 수 없는 고통의 문제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마치 한 번 빠지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늪과 같아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더 복잡하고, 어려워진다는 것인데요.
얘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생각하지 못했던 이별을 경험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모두 내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게 되면 번아웃이 오거나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죠.
그러면 다시 질문해볼께요. ‘여러분, 이런 고통이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가요?’

2. 사람의 시선, 하나님의 입장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되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말씀 속에서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의 입장과 시선에서 바라보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비교하며 우리들의 삶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방법에 대해서 그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예수님의 입장을 살펴보기 전에 본문의 상황과 배경을 잠시 나누겠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11장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다가 이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고난의 길에 들어서기 직전의 시점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스토리 중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한 절정과 클라이막스를 향해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관심과 종교지도자들의 갈등이 수직상승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사건인데요.
유대인 사회에서 앞서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과 온 열방의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알렸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았던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내 음성을 듣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므로 예수님만으로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요. 이 말은 유대 사회에서 굉장히 불경한 고백과도 같았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거론하며 말을하는데 더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표현하는 말은 유대사회에서 규정하는 신성모독의 기준에 딱 맞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해서 나가시죠. 이 사건을 통해서 현장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일부는 예수님을 더욱 믿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처벌의식이 더욱 강화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요단강 건너편에 위치한 마을로 가서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의 사건이 전개되는 것이죠.

3. 나사로

우리가 함께 살펴볼 고통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첫번째 인물은 바로 나사로입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는 예수님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세 남매들이었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과 친분이 있는 인물로 보여지는 대표적인 가정이 이 세 남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나사로가 병에 걸렸는데 그 병이 든 것을 고침 받기 위해서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나사로가 걸린 병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내용에 대해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병에 걸렸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마음 중에서 나무에 붙어서 잘 자라고 있는 중심 가지에 곁가지처럼 자라나는 마음이 있는데요. 이 곁가지는 중요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잘 자라나는 가지의 영양공급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죠. 그래서 잔가지, 곁가지들은 때에 따라서 잘라내야만 나무의 가지가 잘 자라고, 꽃이나 열매가 더 건강하게 맺힐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생겨나는 곁가지 같은 마음은 바로 ‘모든게 잘 되야 하나님께 영광이다.’라는 것이에요. 맞는 말같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셔서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이 오면 우리에게 신앙이 흔들리고, 낙심하게 되는 것이 신앙을 가졌으나 고통에 무너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사람과의 관계와 몸에 이상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게 되요. 생활습관이 잘못된건지 무얼 잘 못 먹어서 그렇게 된 건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답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찾더라도 우리의 질문은 풀리지 않고,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고통을 주셨는가?’라고 물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리로 돌아가게 되죠.
그렇다면 지금 병에 걸린 나사로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사로의 심정은 어떤 상태일까요?
병에 걸린 나사로가 지난 시간동안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나사로는 본인이 결코 원하지 않는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였고, 그렇게 맞이한 질병으로 인해서 나사로는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사로가 처한 상황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의 절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들이 지내던 동네는 베다니라는 동네였습니다. 이 동네는 히브리 원어로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의미로 사적 자료를 통해서 보면 그 당시 가난한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나병환자들이 있었던 동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도시 예루살렘에서 약 3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던 동네인데 나사로와 그 누이들이 그 동네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유대 사회에서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역할은 남성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그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나사로가 죽을 병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나사로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부르기 위해 요청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간절함을 들으시고, 바로 나사로에게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6절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음을 맞이한 것을 아시고,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고통의 절박한 자리에서 나사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예수님의 응답은 침묵이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내 삶에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어서 해결되길 바라며 우리 주님께 간구하지만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막막한 현실을 살아가는 지체들이 있으신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내 삶의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신다면 그 자리에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의 말씀을 다함께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그 모든 순간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는 침묵하시는 때도 있지만 그 때에도 주님의 타이머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틀림없이 진행하고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4. 마르다와 마리아

우리가 함께 살펴볼 고통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두번째 인물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인물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반응하는 서로 다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할텐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형제 나사로가 병에 걸렸음을 알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시지 않는 것이죠.
나사로가 죽음에 이르며 경험했던 예수님의 침묵 그리고 하나님의 부재를 마르다와 마리아도 고스란히 느끼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고통의 시간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 동네로 이동하는데요. 그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이틀을 더 계시지 않고,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하셨다면 무덤에 들어간지 이틀째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이 분명하고, 완전하게 이루어졌을 때, 출발하신 것이죠.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곧바로 예수님께 나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물으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여서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진리의 말씀을 마르다에게 전하시는데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다함께 읽어볼께요.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원자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죠. 마르다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마리아를 불러서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합니다.
마리아도 예수님께 급히 나가는데요. 이 때,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인지 아직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계셨어요. 그래서 마리아도 예수님께 나아가 마르다와 같은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구요. 그리고 마리아의 반응은 마르다와 다르게 예수님 앞에서 슬피 웁니다.
이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심령에 비통함을 느끼시고, 불쌍히 여김을 느끼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며 나아가십니다. 오늘 나사로의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새벽기도회 기간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예수님에 대한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 가운데 전해주신 비유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갑자기 우울한 비가 내리는 때가 찾아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비가 당장에 멈춰서 해가 뜨게 해주시면 좋겠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산들고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삶에 내리는 비를 피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니 그토록 나를 힘들게 내리는 비는 멈춘적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우산들고 찾아오시지 않았지만 내가 한참 비를 맞으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우리 주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그 비를 맞으며 걷고 계셨고, 그와 같이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의 상황에서 한 가지 질문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왜 마르다의 말에는 말씀으로 대답하시고, 마리아가 나오기 전까지 기다리셨으며 마리아의 눈물에는 왜 나사로의 무덤으로 나아가셨는가에 대한 질문입다.
이 질문에 대해서 제가 내린 결론은 바로 ‘예수님은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마르다는 마르다의 방식대로 예수님께 신앙의 고백을 드리며 나아왔기에 예수님도 진리의 말씀이 필요한 마르다를 위로하셨구요.
마리아는 마리아의 방식대로 예수님께 마음을 표현하며 나아왔기에 예수님도 그 마음에 반응하며 마리아를 위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셨던 이유는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에게 필요한 위로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 기다리셨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달려 나갔으나 마리아는 아직 집에 남아있었습니다. 그 집은 나사로의 죽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눈물과 애곡하는 심령으로 고통 가득한 집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그 곳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시는 것이죠.
그 마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시고 난 이후에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한 자리로 나아가십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절망과 슬픔이 우리들의 삶에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문 밖에 서서 기다리는 예수님께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며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허락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모든 고통을 내어드리며 주님께 맡겨드리는 시간과 자리에서 저와 여러분의 고통을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나를 만나주신 주님께서 내 삶에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청년교구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5. 제자들과 유대인들

세번째 고통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인물들은 바로 제자들과 나사로의 장례식에 모여있던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저와 여러분을 가장 많이 대변하고 있는 인물들이죠.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고통스러운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사로의 가족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사건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저희들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는 것이죠.
먼저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나사로의 죽음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지만 그 자리에 이틀을 더 머무르시는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일로 바쁘신가보다’ / ‘예수님이 생각보다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으셨나?’ /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닌데’ /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지 않으시는 걸보니 예수님이 보시기에 나사로가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가보네’
우리는 제자들에게 어떤 고민이나 생각이 있었을지 다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즉시 나사로에게 찾아가지 않으셨고, 나사로는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문 15절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이 기뻐하시는데 무엇무엇으로 기뻐하시는거죠?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신데요. 바로 몇 구절 앞에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 나사로의 옆에 있지 않았던 것을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신다는 거에요. 누군가의 고통으로 인해서 다른 이에게 기쁨이 된다는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으신걸까요?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4절에서도 이미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지 않을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아마 제자들은 아직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고 이해했을 것 입니다. 그러면 이제 장소를 베다니로 옮겨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듣고, 이틀 뒤에 베다니로 찾아간 제자들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상황에 대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뭐야, 예수님께서 잠들었다고 하셨는데 죽은지 4일째라고?’ /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긴장되는 분위기에 놓여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의문을 가지며 그 고통의 현장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말을 되네입니다.
‘나사로를 사랑한다고 했던 예수님이신데 맹인의 눈도 뜨게 하신 예수님이신데 나사로를 살리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던 것인가?’
이와 같이 애통하고, 복잡하고,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나아가셔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하시죠.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이 지났으니 돌을 옮겨 놓을 의미가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그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돌을 옮기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됨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내용을 보면 오늘 본문 42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죠. 여기서 그들은 바로 장례식 현장에 모인 제자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지금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는 그 것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나사로의 죽음과 고통의 시간은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했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을 보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고통스러운 죽음의 자리에 갈지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이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이죠.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 무덤에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과 시선이 어떻해야 하는지 전해주고 계십니다.

6. 고통의 세 자리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고통에 대한 세 가지 자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리, 고통을 지켜보는 자리, 고통의 소식을 들은 자리 이렇게 정리될 수있는 세 가지 자리들은 모두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어느 때에나 충분히 마주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때 우리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주님이 하실 일을 믿음으로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생명의 주인은 누구이신가요? 정말 우리들의 삶과 생명의 주인이 전능하신 하나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으로 살아가신다면 오늘 우리는 가장 좋은 그 때에도 가장 고통스러운 그 자리에서 주님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길 바랍니다.
그 기다림의 자리가 비록 죽음을 향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자리라고 할지라도 고통을 겪고 있는 가족과 이웃을 바라보아야 하는 자리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우리 주님께서 일하심을 기다릴 때, 저와 여러분을 가장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이 늘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 축도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맡겨주신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고백하며 나아갑니다. 삶의 한 구절 한 고비마다 우리들에게 경험하도록 하시는 그 시간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게 하여주셔서 결코 다른 길로 나가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드리는 예물들은 주님께 올려드리는 믿음의 고백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마음과 예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에 쓰여지는 예물이 되게 하여 주시고, 이 모든 것을 드리는 손길과 마음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날마다 풍족하게 채워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하심과 보혜사 성령님의 교통하심과 기름부어주심이 이 시간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생명의 주인되시는 주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레브 청년교구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 가운데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 설교 프리뷰
Q1. 나를 힘들게 하고,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소하나요?
Q2. 나는 요즘 고통의 세 가지 자리 중에서 어느 자리에 있는 것 같나요?
Q3. 주님께서 생명의 주인이 되시려면 나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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