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11:1-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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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느헤미야 11:1-14 찬송가 397장 “주 사랑 안에 살면” 예루살렘에 살게 된 사람들(1-10) 예루살렘 성벽을 우여곡절 끝에 재건했지만 그건 단지 성벽의 외형을 복원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 성벽이 훼파되어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었다보니 살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느헤미야 7장 4절,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은 희망찬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온전한 집도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성벽이라는 하드웨어를 복원한 것과 아울러 누구든지 예루살렘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시겠다고 한 이 곳에서 성전 예배를 회복하고, 황폐화되었던 땅을 가꾸어 옥토로 만들 뿐만 아니라 상실해버렸던 도시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누가 예루살렘에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입니다. (1-2)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먼저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합니다. 그들은 제비 뽑기도 아니었고,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제일 척박한 곳이었지만 “거룩한 성”,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구별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지도자로 부름받은 지도자들이 자신의 삶도 구별하여 그곳에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중에서도 제비를 뽑아 10분의 1은 예루살렘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예루살렘에 살기로 자원하는 이들은 모두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살게 된 이들에게 모든 백성이 복을 빌어줍니다. 구약 배경에서, 제비를 뽑는 행위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무책임한 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행위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문제 앞에서 해결을 위한 발걸음을 어떻게 내딛는가가 그 개인과 집단의 신앙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더욱 정밀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억지로”는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만지시고 움직이셔서 기꺼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이겨내도록 인도하십니다. 인간적인 부담감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예루살렘에서 살겠다고 결정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상황이 좋았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훼파되어 제대로 구비된 것이 없는 그곳에 살면서 감수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구획을 정비하여 살 집을 만들고, 예루살렘 성벽의 보수와 수비까지 책임져야 했습니다. 게다가 이미 마련해놓은 집과 생계의 수단을 다 내려놓고 이주해야 했으므로 그들 각 개인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절대 작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의미 있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하셨던 곳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부서지고 훼파 당하여 황무하던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다시 그곳에 임재하셔서 거룩한 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며, 그곳을 하나님의 도성이 되게 만드는 일에 그들이 부름 받았고, 그들은 부르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명자로서 합당한 삶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전심으로 주께 드린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드린 이가 전혀 아깝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눅18:28-30)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는 옆에서 드리라고 권면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각 개인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저항할 수 없는 신적 부르심 앞에서 행할 수 있는 거룩한 반응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으로 기꺼이 헌신할 때, 채우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절부터 24절까지는 예루살렘에 거하도록 제비 뽑혀진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크게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이 4절에서 9절까지, 제사장들의 명단이 10절에서 14절까지, 레위인들의 명단이 15절에서 18절까지, 그 외의 사람들이 19절에서 24절까지 기록되었습니다. 오늘은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의 명단과 제사장들의 명단까지 살펴보겠습니다. (4-6)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이니 그는 웃시야의 아들이요 스가랴의 손자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스바댜의 현손이요 마할랄렐의 오대 손이며 또 마아세야니 그는 바룩의 아들이요 골호세의 손자요 하사야의 증손이요 아다야의 현손이요 요야립의 오대 손이요 스가랴의 육대 손이요 실로 사람의 칠대 손이라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유다 자손은 모두 468명이었고, 모두 베레스 자손이었습니다. 베레스는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서 낳은 쌍둥이 가운데 먼저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이 베레스의 족보에서 다윗이 태어났고, 유다 왕가의 계보가 이어지면서 나중에 예수님도 태어나셨습니다. 이들은 비록 928명이나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된 베냐민 지파에 비해 수는 절반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두가 용사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수비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처음 언급되는 아다야는 그 뜻이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라는 뜻입니다. 조상들의 이름도 보면, 웃시야는 “여호와의 능력”,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아마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스바댜는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 마할랄렐은 “하나님을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모두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번역 자체는 아들, 손자, 증손, 현손, 오대손으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로는 모두 아들을 의미하는 “벤”일 뿐입니다. 진짜 순차적으로 거슬러 올라갔는지, 아니면 특징적인 족보 몇 군데를 언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다야까지 내려오는 동안 그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담은 이름들이 이어진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마아세야도 그 뜻이, “여호와께서 일하시다”이며, 그 선조들의 이름도 신앙적인 이름들을 갖고 있어 아다야 가문과 마찬가지임을 밝힙니다. 이들 모두가 혈통으로는 왕가의 후예이지만 그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포로기를 통과하면서도 아들의 이름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담아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삶을 인도해주실 것을 기대했고, 그 믿음이 이어져서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7-9) 베냐민 자손은 살루이니 그는 므술람의 아들이요 요엣의 손자요 브다야의 증손이요 골라야의 현손이요 마아세야의 오대 손이요 이디엘의 육대 손이요 여사야의 칠대 손이며 그 다음은 갑배와 살래 등이니 모두 구백이십팔 명이라 시그리의 아들 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고 핫스누아의 아들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느니라 베냐민 자손은 모두 928명으로, 숫자로서는 유다 지파의 거의 두 배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원래 이스라엘이 최초로 땅을 분배했을 때 베냐민 지파의 기업이었고, 후에 사사기 1장 8절에 나오듯이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을 쳐서 정복했으며, 후대에 다윗이 다시 정복하여 개인 영지로 삼았음던 역사를 기억한다면, 유다와 베냐민 지파 다수가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9절에 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고, 유다가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는 두 사람이 정-부의 개념으로 베냐민 사람들을 다스린 게 아니라 구획을 나눠 다스리되 요엘이 넓은 구역을, 유다는 그보다는 작은 구역을 다스렸다고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렇게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합이 1,396명입니다. 이들은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로 부녀자들을 합하면 그 수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이제 고작 성벽만 재건된 예루살렘을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이들이 해야 할 수고가 참으로 큽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누가 살 것인가를 제비 뽑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 받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 노력과 의지의 발로가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 우리는 말씀 앞으로 나아왔고, 우리의 언행심사를 주님의 은혜로 다듬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예루살렘이 어디인지 부르심을 구하며 하루를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예루살렘에 살게 된 제사장들(10-14) 다음으로 예루살렘에 살게 된 제사장들의 명단이 소개됩니다. 이 명단은 역대상 9장 10절부터 13절의 기록과 병행됩니다. (10-14) 제사장 중에는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이며 또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이니 그는 힐기야의 아들이요 므술람의 손자요 사독의 증손이요 므라욧의 현손이요 아히둡의 오대 손이며 또 전에서 일하는 그들의 형제니 모두 팔백이십이 명이요 또 아다야이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블라야의 손자요 암시의 증손이요 스가랴의 현손이요 바스훌의 오대 손이요 말기야의 육대 손이며 또 그 형제의 족장된 자이니 모두 이백사십이 명이요 또 아맛새이니 그는 아사렐의 아들이요 아흐새의 손자요 므실레못의 증손이요 임멜의 현손이며 또 그들의 형제의 큰 용사들이니 모두 백이십팔 명이라 하그돌림의 아들 삽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느니라 역대상 기록에는 여다야와 여호야립과 야긴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느헤미야서에는 아들이라는 히브리어 “벤”이 첨가되었습니다. 이는 필사상의 오류라고 추정합니다. 처음 언급된 요야립은 다윗 시대 24반열의 제사장 가운데 첫 번째 반열의 대표이고, 두 번째 여다야 역시 두 번째 반열의 대표로 소개됩니다(대상24:7). 개인 이름이 아니라 돌아온 이들의 가문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의 스라야는 가문의 이름이면서도 동시에 그 가문이 구체적으로 했던 일도 소개됩니다. 스라야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였는데 쉽게 풀면 성전 지도자, 곧 대제사장이었음을 밝힙니다. 스라야는 대제사장 가문으로 그 후손들은 그의 이름을 딴 가문임을 밝힌 것입니다. 스라야 가문에 속한 사람은 모두 822명이었고, 모두 “전에서 일하는 그들의 형제”라는 기록으로 봐서 제사장이 성전에서 감당하는 고유 직무를 담당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이어서 소개되는 아다야 가문은 242명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형제의 족장된 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가 족장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은 제사장 고유의 업무, 곧 제사를 담당하는 일 외에 수많은 부가적인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3절 하반절에는 아맛새 가문이 소개되는데, 모두 128명으로 큰 용사였다고 밝힙니다. 이들은 성전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성전을 지키는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제사장의 총합이 모두 1,192명으로 이 또한 부녀자들까지 포함하면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 그룹으로 나눠져서 각각 맡은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일과 작은 일이 없습니다. 각자 부르심에 맞게 하나님이 주신 일이 있고, 그에 충실하는 것이 제자로서의 도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되 어떠한 마음과 자세를 갖기 원하실지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가 머물러야 할 예루살렘이 어디인지를 살피는 하루 보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벽은 복원되었지만 그 속은 여전히 황무했다는 예루살렘의 모습은, 겉은 영락 없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사라져 성전으로서 역할 할 수 없는 병든 신앙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과연 오늘 나는 성전 된 존재로, 하나님을 모신 존재답게 하나님과의 교제의 풍성함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부분, 곧 허물어진 부분을 보수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버린 길을 닦고, 구획을 정비하듯 일상을 정비하여 “거룩한 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한 날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기도하게 하시되 특별히 머물러야 할 예루살렘이 어디인지, 누구인지 깨달아 주님의 손발로 사는 오늘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우리의 삶을 드릴 때,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삶을 이어가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크신 경륜으로 이스라엘의 삶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함께해주시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믿음으로 담대히 말씀을 살아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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