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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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누군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우리의 삶에서 어떤 대상을 깊이 생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사랑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연애를 시작할 때 어떻습니까? 상대방의 메시지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자꾸 확인하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과 작은 습관들까지 알고 싶어지고 또 기억하게 됩니다.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나도 모르게 내 일상 속에 녹아들기도 합니다. 연애를 지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시작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세상이 시작됩니다. 두 사람이 아니라 한 가정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더욱 깊이 생각하고 움직이게 됩니다.
  부모가 되면 그 대상은 아이에게로 갑니다. 저희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뱃속에 있는데도 아이가 밤새 잘 잤는지, 밥은 잘 먹는지 늘 신경을 씁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입학하면 또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해집니다. 부모가 어디에 있든지 부모의 관심과 마음은 늘 아이에게 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번 떠올리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그 대상에게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대상과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깊이 생각하게 될까요? 나와 연관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대상, 내가 잘 알고 있는 대상, 그리고 그것을 생각할 시간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본문을 읽으며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에서 시선이 멈추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예수를 나누며, 이 예배의 시간이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연관이 있고 관심이 있어야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 보통은 깊이 생각할 일이 없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미얀마에서 강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 같았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류태진 선교사님께서 계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국인에 대한 소식은 없나, 현재 피해가 어떠한가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와 연관이 있고, 내가 관심이 있는 대상일수록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위인, 기독교의 창시자와 같은 짧은 생각할 수 있어도 깊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은 우리가 예수님과 깊은 연관이 있는 존재라고 말해 줍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부른다라는 동사에는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부르는 사람과 부름을 받는 사람입니다. 내가 부르고 내가 대답하는 것을 우리는 부른다 라는 단어 대신 혼잣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부르심을 예배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단순히 ‘내가 가고 싶어서’ 예배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혼잣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는 분이 계십니다.우리는 그 부르심을 받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제게는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저는 초대받지 않고는 이 예배의 자리에 올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 예배마다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 초대가 바로 예수님으로 인해 가능해 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부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에서 육신으로 이 땅으로 오셨고 숨을 쉬고 사셨으며 죄가 없으시지만 동시에 죄가 없으시기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보혈이 저와 여러분을 예배의 자리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늘의 부르심은 다만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만 부르시지 않습니다. 보통 누군가가 우리를 부르면 우리는 부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거나 그 곳을 향해 갑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들으면 우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가게 됩니다. 예배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 마침내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본향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거룩한 자들만 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여 순종함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죄인이 아닌 죄에서 구별된 거룩한 존재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예수님께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알아야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알면 알수록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경기 규칙과 선수들의 플레이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더 의미 있게 바라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또한 평생에 예수를 더욱 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는 도리 즉,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도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성경 가운데 이 부분이 유일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독자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동시에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로마의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오늘 본문은 지혜롭게 이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며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부터 6절 전반부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켰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을 제정해 준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모세보다 예수님께서 더 뛰어나신 분이심을 설명합니다. 
  본문을 보면서 누구인지 모르지만 히브리서의 저자가 참 지혜롭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보통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는 그게 아니라 이거야.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 상대방에게 불쾌감이나 모욕감을 줄 수 있는 표현입니다.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인용하여 모세가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신실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듣는 입장에서 아 예수님이 그런 분이었어? 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묻습니다. 집과 집을 지은 자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귀하냐고 말입니다. 집은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더라도 결국 누군가가 지은 건물입니다. 당연히 집을 지은 건축자가 더 귀합니다. 집은 피조물이라면 집을 지은 자는 창조주입니다. 
모세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또 아론이 모세의 대언자로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지만, 시편 99편은 모세도 제사장이라 일컫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들'이십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지만, 아들은 그 집의 상속자로서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둘 다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지만, 그 격이 다르다는 점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누군가의 틀린 것을 고쳐줄 때에 누군가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교정해 줄 수 있는 이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예수님은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 왕이십니다. 
  모세로 대표되지만,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예수님보다 더 온전한 사도이자 선지자는 없습니다. 또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동물의 피로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죄인이었기에 죄를 전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동물의 피에 죄를 전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기에 단번에 희생제물이 되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영원토록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더욱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앞서 히브리서의 기자가 말했듯,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왕보다 더욱 높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나의 작음과 예수님의 크심을 보며 그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예수를 힘써 알아가고, 그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깊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애 시절,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가 있습니다. 저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연락이 잘 안 되는 편입니다. 그런 제 모습에 아내는 종종 서운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 서운함의 이유는 이랬습니다. “바빠서 연락을 못했다는 건 그냥 핑계야. 결국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잖아.” 설교를 준비하며 이 말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결국 ‘생각하지 않음’이 서운함의 본질이었던 것이죠.
  얼마 전 SNS에서 본 재미있는 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열심히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한 청년에게 묻습니다. “ㅇㅇ아, 지금 뭐하니?” 청년은 깜짝 놀라며 대답합니다. “아, 주님. 저야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하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 지금 누워 있잖아.” 
  오늘 우리는 ‘생각할 시간’을 갖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려면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기엔 너무 바쁩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할 일들, 넘쳐나는 정보와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파도에 휩쓸리듯 떠밀려 다닙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바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라는 말에,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쉽게 핑계를 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듯, 바쁜 삶 속에서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 ‘의도적인 시간’을 내야 합니다. 삶의 순간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실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극으로 가득한 이 시대 속에서 잠시 멈추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맘때쯤이면 자주 들려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금식입니다. 음식을 절제하기도 하고, 미디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기도 합니다. 물론 금식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금식은 단순한 ‘디톡스’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본질은,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확보된 그 시간을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데에’ 사용하는 데 있습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도 지금 금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던 황금 같은 연휴의 시작, 이 금요일 저녁을 구별하여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찬양과 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예배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구별된 시간’의 시작이 되어, 그 은혜가 우리의 일상에도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잠깐 멈춤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면 닮아갑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마침내 우리의 삶의 방향이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며 세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믿음의 뿌리를 내린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저희 교회 형제 중에서 버스킹을 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야외에서 하는 공연인 이 버스킹은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주변 풍경의 소리들과 사람들이 이야기소리까지도 연주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가운데 이 아름다운 연주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닮아가는 우리는  세상 가운데 노래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어지러운 세상이 노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의 마지막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고, 우리는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그러하니라.”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집 된 우리의 믿음은 소망의 확신과 자랑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확신’은 ‘담대함’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세상 앞에서 우리의 소망이 흔들리고, 두려움이 밀려올 때,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다시 깨닫고, 소망 가운데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소망을 ‘자랑’하게 됩니다. 자랑은 우리가 가진 것들 중 자랑할 만한 것에 대해 합니다. 아무도 부끄러운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부끄러워 보이는 것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그 부끄러움이 오히려 영광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나를 위해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서 부끄러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왕 되신 예수님께서 이제 나의 강함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우리가 가진 복음의 소망을 확신하며, 또 자랑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깊은 연관과 관심이 있는 자들임을 나누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더욱 풍성하고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더욱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야 하며,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예수를 닮아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나누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삶의 시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를 넘어 다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갈 때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담대한 자로, 자랑하는 자로 세상을 무대로 복음을 노래하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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