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 60-71절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우리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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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우리의 반응(요 6:60~71)
20250330 설교: 신동구 목사(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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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요? 7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연애결혼은 거의 어려웠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가정을 통해 자라난 아이의 됨됨이를 어느 정도 판단하여 결혼적령기에 이른 이들을 짝지어주면 그대로 따라야만 했습니다.
아직도 중동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 경우는 양가 부모의 합의하에 예비신랑이 예비신부의 집을 찾아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 여부를 결정짓는다고 합니다. 물론 예비신랑과 예비신부가 전혀 모르는 관계는 아닙니다. 대부분 친척 사이에 이루어지는 혼례이기에 신랑이 예비신부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결혼을 전제로 하는 방문입니다.
사우디에서도 거리를 두고 서로를 아는 것과 가까이서 아는 것에는 차이가 있어 이혼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엄청난 위자료를 지불해야 하기에 이혼을 못한다고 합니다.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잦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멤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주(主)가 누구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전자에 더 비중을 둡니다.
사회생활에서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을 통해 성급한 판단으로 관계를 쉽게 끊는 경우가 있듯이, 기독교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한두 번 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설교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가 요한복음 6장 66절입니다: “그 때부터 그(예수)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서 ‘12제자들’(눅 9:1)과 ‘70인 제자들’(눅 10:1)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다고 말하는데(요 6:66), 아마도 그들은 70인 제자들 중 상당수였을 것입니다.
70인 제자는 12제자처럼 이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경험한 이들입니다(눅 10:1~16). 그에 앞서 그들은 누가복음 9장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10장에서 그들이 전도를 나갔다가 많은 이적을 행하고 기쁨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 예수님은 2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이적을 경험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저버린다”는 것입니다(눅 10:16). 다른 하나는 “네게서 이적이 행해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는 것입니다.
무엇이 70인 제자로 하여금 예수님 곁을 떠나가게 하였을까요? 이유는 이적 경험의 신비보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의 주요 강화-4번째 강화-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반응하였으면 합니다.
I.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의 의미(48~51절)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는~이다’(I am)- 7가지 자기 계시 중 첫 번째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이 갖는 의미를 풀어주면서 나오는 자기 계시입니다.
여러분은 낯선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자신을 소개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아마 자신의 이름을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특정한 외모를 가지고 소개할 수도 있고, 고향과 연관하여 소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보여준 첫 번째 자기 계시가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알려집니다. 그 때가 유월절이기에 보리를 추수하는 때이며, 보리빵은 가난한 서민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 빵을 가지고 장정만 5,000명이 먹었으니,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주기에 아주 좋은 장면이 연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는 이 사건을 다루면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다고 알려줍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는 가르침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쳐주었다고 말합니다(요 6:59).
다섯 개의 ‘보리빵’과 ‘생명의 떡’은 서로 유비가 됩니다. 사실 ‘생명의 떡’(헬. 호 알토스 테스 조에스)을 직역하면 생명의 빵입니다. 이스라엘은 떡이 없지요. 옆 사진처럼 보리를 빻아 화덕에 구운 빵입니다. 히브리어로 ‘레헴’이라고 합니다.
벳새다 평원에서 다섯 개의 보리빵으로 약 2~3만 명의 무리를 먹이는 장면은 출애굽 당시에 모세를 통해 하늘의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급되는 것을 연상시키기 충분하였습니다. 40년 동안 매일 새벽마다 만나(manna)가 내려와 만나를 빻아 화덕에 빵을 구워 먹었던 것처럼 비록 자신들이 자신의 선조들처럼 40년간 그 만나를 먹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보리빵 5개로 2~3만 명을 먹였다는 것은 출애굽의 ‘만나 이적’을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도자 모세를 떠올리면서 모세의 위대한 예언 곧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킬 것이라”(신 18:15)는 예언이 기억나면서, 그 선지자가 지금 자신들 앞에 서 있는 나사렛 예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제사장 가문 출신의 유다 마카비가 혁명을 통해 하스몬 왕조를 이루었듯이 예수님은 임금으로 추대하여 로마제국을 대항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현장에서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가르침을 주지 못하고 황급히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분리하여 가버나움으로 보내야 했고, 당신도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해가 저물 때 가버나움으로 떠나던 제자들이 큰 바람과 파도로 사경을 헤메고 있을 때에 재자들을 구원하여 가버나움에 도착하신 주님께서 안식일을 맞아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예배하던 중 강론의 기회를 얻어 ‘당신이 생명의 떡 곧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의미를 가르치되,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 생명의 떡은 “(유대인만 아니라)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1).
그 때 회당에 참여한 이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벳새다의 이적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이적의 현장에 있지 않던 회당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치 식인종의 교훈-”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으로 치부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참고. 계 2:11 등)는 태도로 당신의 살을 먹으라는 의미를 자세히 풀어주십니다: 54~5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永生)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고 말씀하시면서 회중들에게 당신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명심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54~58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만일 누구든지 영원히 살고 싶다면 곧 영생을 얻고 싶다면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하늘에서 신비로운 만나를 먹었어도 결국 죽었지만, 인자를 먹는 자는 죽어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자(그 인자[人子], the Son of man)라는 말을 좀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성을 다양하게 표현하셨는데, 가장 많이 사용한 정체성이 ‘인자’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 인자’입니다.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는 구약성경 다니엘서 7:13~14에서 나오는 용어입니다: ”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위 말씀은 바벨론제국 시절에 총리를 지내던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본 대목입니다. 그 인자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존재이며, 하나님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위임받은 자이며, 열방이 그 인자를 섬기며, 그 인자의 권세가 영원하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자신의 정체성 중 유독 즐겨 사용하던 것이 당신이 ‘그 인자’라는 것입니다. 이를 요한복음에 나타난 계시로 풀어내면, 예수님은 하나님 품속에 독생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으로(요 1:18)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요. 또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분이시며(요 1:14),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심판권을 위임받으신 분이십니다(요 5:22).
따라서 요한복음 6장 54~58절은 성경의 예언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속에서 성육신하신 그 인자인 당신의 대속(代贖)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그들을 영원히 살리리라는 부활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라는 의미입니다. 곧 무죄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의 죄값을 대속(代贖-죄값을 대신 지불하다)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온 세상에 전하는 복음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사람의 눈에는 저주스러운 것으로 보이지만(신 21:23)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사함을 위해 마련하신 지혜요 능력입니다(고전 1:18).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의 죄값이 다 지불되었다는 증표요, 죄값이 다 지불되어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다시 살아남’(부활)의 첫 열매의 증표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이들도 동일한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요 구원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주신 대속(代贖)의 죽음과 죄값을 다 지불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함과 영생 등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 진리가 믿어지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이 진리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셔야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요 6:43~44, 6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당신에게 연합된 이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십니다(요 6:44).
예수님은 직접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증거하십니다(요 6:45):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사야 54장 13절은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3장은 출바벨론과 관련된 예언이요 동시에 출세상과 관련된 예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바벨론의 위대한 여정을 계획하고 이끌어주시는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이제 때가 차매 그들이 바벨론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여호와의 교훈을 받으며 큰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예언은 이중성 또는 중첩성의 성격을 갖는데, 위 예언은 하나님의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를 통해 자녀들이 가르침을 받되 하나님 아버지게서 예수님께로 이끄심을 받는 자만이 예수님께 나아와 ‘풍성한 평안’(히. 라브 샬롬)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오심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영원히 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으로 오심입니다.
II.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의 의미(62~63절)
이어지는 예수님의 강화 중 하나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2절) 곧 다니엘서 7장 13~14절에 계시된 그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고(“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십자가에서 구속(救贖)을 다 이루시고(요 19:30-‘다 이루었다’)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너희는 어떻게 반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6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자꾸 땅의 일에만 신경을 쓰는데 당신이 가져오시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 권력자들의 나라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칼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온다(팍스 로마)고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데, 그 시각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육(헬. 사륵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헬. 프뉴마)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육체는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됩니다. 몸을 뜻하는 ‘소마’(σωμα. body. 마 10:28)와 타락한 육신을 뜻하는 ‘사륵스’(σαρξ. fresh. 요 6:63)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body)가 무익한 것이 아니라 ‘죄성을 가진 육신’이 무익하며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가진 우리의 육체는 결국 죄값으로 사망을 경험합니다. 곧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혼은 불멸합니다. 다만 범죄한 영혼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본향으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스올(陰府, hell, 저승)로 내려가 슬피 울며 이를 갈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통해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장차 인자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실 구속의 도리와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의 영을 살리는 것이요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육체가 타락한 죄성을 가졌다고 해서 그 육체를 함부로 대하라는 가르침을 주시 않습니다. 어떤 헬라 철학자들은 육체의 무익함을 말하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육체를 타락의 도구로 사용하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우리의 육체가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어서 무가치하다면 우리 주님께서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의 아들(요 4장)과 38년 된 베데스다 빗물저장소의 병자(요 5장), 그리고 친구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주실(요 11장)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하여 질고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사 53:4).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육체가 타락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된 우리의 육신(사륵스)이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에 환골탈퇴하여 새로운 몸 곧 부활체를 입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살전 4:13~17). 우리는 이러한 말로 서로를 위로해야 합니다.
III.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의 의미(65절)
예수님의 강화 중 우리가 주의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과 65절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두 번 반복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위대한 진리임을 알려줍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우리가 위의 두 성경 구절을 통해 명확히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 가수가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였듯이 세상에서 우연한 만남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입니다.
하물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범죄자가 경찰을 피하듯이 또는 학교규칙을 어긴 학생이 선생님을 피하듯이 우리의 양심은 범죄할 때마다 의로운 자 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영물인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어떤 사람들이 뻔뻔하게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자신의 의로움을 많은 사람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누구일까요? 외식주의자라고 지탄을 받는 바리새인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참고로 “외식하는 자”(헬. 휘포크리테스)라는 단어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를 가리킵니다. 70인 헬라어 역본에는 ‘무법의’ , ‘신의가 없는’, ‘두 마음을 가진 자’, ‘거짓 입술을 가진 자’로 사용됩니다.
벳새다에서 수많은 이들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이 장차 오실 ‘그 선지자’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그들이 벳새다에 모인 것도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에도 수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움직인다는 것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터치해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의미를 생명의 떡으로 표현하시면서 그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을 하자 많은 이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66절). 떠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파격적이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식주의자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못 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신성모독죄로 판단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노동규례를 어긴 것으로 단정하고 정죄하였습니다(요 5:18).
이에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익히 아시고 무리들에게 변명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이 말씀의 뜻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합니다. 구원은 타락한 인생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타락한 인생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쁘신 뜻이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송하기 위함이라고 증언합니다(엡 1:3~6).
둘째, 그리스도에게로 나온다는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5~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따라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자는 이적을 경험했다고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은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당신이 선택한 12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가 당신을 팔 자라고 말하며, 그를 ‘마귀’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는 측근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가룟 유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온전히 알 수 없었음을 알려줍니다.
셋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때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시점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자가 있으며. 전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종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에 달린 어떤 강도와 같이 임종 직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언제,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일지 모르기에 만민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오래 참음으로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IV.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의 의미(68절)
인자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유적인 가르침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미리 이야기하신 것이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70인 제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날 것이냐?”(67절)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헬. 퀴리에), 영생(永生)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헬. 하기오스 투 떼우)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절)
요한은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이름 앞에 ‘시몬’을 붙입니다. ‘시몬’은 그의 아버지 ‘바요나‘가 지어 준 이름으로 ’듣다‘를 의미합니다. 그 이름대로 그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강화를 제대로 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그에게 계시의 영이 임하자 그는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모든 제자를 대표하는 견고한 반석과 같은 고백이지만 가룟 유다의 고백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병이어(五餠二魚)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록된 말씀(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오병이어의 의미가 ’당신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는 생명의 떡이심‘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생명의 떡에 관하여 설명하시면서 그 인자로 오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진리를 한 번만 듣고 단숨에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기록된 성경을 상고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복음서는 제자들이 반쪽 믿음 곧 성숙하지 못한 믿음이었으며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이적의 깊은 의미를 풀어주신 예수님의 강화를 들은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곁을 떠나렵니까? 아니면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 도를 더 배우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