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 예수 라못 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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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5)라못(רמות, Rāmōṯ): “높임, 존귀 ,높은 곳”, “들어올려진” 혹은 “존귀하게 된”이라는 뜻입니다
biblehub.com. 라못은 히브리어 “룸”(רום, 높이다)에서 온 말로, “높임” 또는 **“높여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지극히 높임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임을 받으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다”**고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5장 31절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기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증언합니다. 라못이 “높임, 높이 듦”을 뜻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으로 높아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biblehub.com,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들려” 높여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요 3:14). 주석가들은 라못이 가리키는 “높임”을 예수님의 **승귀(昇貴)**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bibletruthchatroom.com. 하나님께 높임받으신 주님은 장차 우리 믿는 자들도 세상 권세 위에 높이 들리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선언합니다bibletruthchatroom.com. 그러므로 라못의 피난처 안에 거하는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고, 장차 주님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높임받으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 길입니다. 그분의 높임은 곧 우리의 피난처가 됩니다.
3)골란(גולן, Gōlān): “기쁨, 환희” 혹은 **“드러남, 나타남”**이라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원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가 약간 나뉘는데, 어떤 이들은 골란을 히브리어 “길라”(גילָה, 기쁨·환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즐거워함, 기뻐 뛰며 외침”**의 뜻이라고 합니다
biblehub.com. 실제로 매튜 헨리는 골란을 “기쁨 또는 환희”로 해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가 즐거워하고 자랑한다고 주석했습니다biblehub.com. 로마서 5장 11절 말씀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는 성도의 기쁨이 골란의 의미와 연결됩니다bibletruthchatroom.com. 다른 한편으로, 존 길 목사 등은 골란이 “갈라(גלָה)”, 곧 **“나타나다, 드러내다”**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말로서 **“나타남, 계시됨”**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bibletruthchatroom.com. 이 해석에 따르면 골란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신약에서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딤전 3:16).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나타나심으로(요 1:14)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죄인들은 그분을 바라보고 피난처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또한 예수님은 장차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실(재림하실) 것이고, 그날에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남”으로 풀이하든 “기쁨”으로 풀이하든, 골란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계시의 축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죄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우리가 이제 기쁨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골란 성에 피한 자가 안전함으로 기뻐하듯, 예수님 안에 피한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분이기에,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以上 살펴본 것처럼, 여섯 도피성의 이름 하나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의 다양한 측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이 도시들의 이름이 가리키는 거룩함, 짐을 짐, 교제, 요새, 높임, 기쁨과 나타남이라는 주제들은 모두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의 레위인들은 아마 문자적인 지리적 명칭으로 이 도시들을 불렀겠지만, 신약의 눈으로 볼 때 이 모든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적 제목들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biblehub.com. 성 어거스틴은 **“구약은 신약에서 그 베일이 벗겨진다”**고 말했습니다. 도피성의 이름들에 감추어져 있던 의미의 베일은 예수님 안에서 벗겨져, 그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와 도피성의 구속사적 의미
3. 예수 그리스도와 도피성의 구속사적 의미
이제 도피성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한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고찰해 보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도피성 하나하나의 이름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뜻을 지녔을 뿐 아니라, 이 제도 전체가 복음의 구조와 평행을 이룹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과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히 10:1). 실제로 히브리서 6장 18절에서는 신약의 성도를 가리켜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난처로 달아나는 자”****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도피성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biblestudytools.com.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도피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도피성 사이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구속사적 연결고리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도피성의 설립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합니다. 이 성읍들은 사람이 고안해낸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신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복음 역시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온 구원의 도피처입니다
bibletruthchatroom.com. 19세기 복음주의 설교자 D. L. 무디는 **“도피성들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또한 A. W. 핑크는 **“이 성읍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으로서 마련되었으며, 하나도 아닌 무려 여섯 개나 된다는 사실에서 은혜의 풍성함이 드러난다”**고 설명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bibletruthchatroom.com. 정말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 한 분만으로도 온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족한 충분한 은혜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여섯 곳의 도피성이 온 이스라엘에 고루 배치되었듯이, 신약에서는 한 분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달려갈 수 있는 구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위한 구주로 높임을 받으셔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선포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전국에 골고루 피난처를 두셔서 “어느 땅에서나” 사람들이 달려갈 수 있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biblehub.com. C. H. 스펄전 목사도 **“여섯 도피성이 있었던 것은 어느 지역에서나 가깝게 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고bibletruthchatroom.com, 무디 또한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어느 곳에서든지 죄인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항상 열려 계신다”**고 설교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고도 접근하기 쉬운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또한 도피성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습니다. 민수기 35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그들 중에 머무는 우거하는 자를 위하여 피난처가 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A. W. 핑크는 이를 가리켜 **“이 규례들은 그 땅의 모든 사람, 거민이든 외국인이든 위해 주어진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생각에 두셨다”**고 평했습니다
bibletruthchatroom.com.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자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라고 선포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예수님이라는 도피성은 문화적, 민족적 장벽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그리로 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지역뿐 아니라 이방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도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기꺼이 받아주셨고, 부활 후에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심으로 온 인류의 피난처가 되셨음을 밝히셨습니다. 편협한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보편적 구원 — 이것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도피성의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도피성에 피하는 자의 자세는 복음 앞에 나오는 죄인의 모습과 통합니다.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도피성에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고 즉시 피신해야 했습니다. 머뭇거리거나 자만하여 집에 머물다가는 피의 복수자에게 속절없이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즉시 예수님께 피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설마 나에게 심판이 닥치랴” 하고 미루다가 회개의 기회를 놓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보복자는 반드시 죄를 추적합니다. 죄인이 한시라도 빨리 그리스도께 달아나 숨지 않으면, 영혼의 원수 마귀와 율법의 정죄가 그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도피성의 길이 늘 열려 있었지만 그 성읍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어도 그분께 피하여 들어가는 자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롬 1:18)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은 자기 죄를 깨닫는 즉시 지체 없이 예수님께로 **“도망”**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6장 18절은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를 **“피난처로 달아나는 자”**라고 묘사합니다
biblestudytools.com. 이것은 우리의 달음박질과 예수님의 긍휼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시편 143편 9절에서 다윗은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0장 29절에 나오는 레위인과 제사장은 강도 만난 자를 돕지 않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출해 주었듯이,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선한 이웃이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를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께 피하는 것, 이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특별히 도피성 제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대제사장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과실로 사람을 죽인 자는 그 땅의 현직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거하다가,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자유를 얻었습니다. 왜 하필 대제사장의 죽음이 그를 완전히 해방시켰을까요? 유대 랍비들은 이 규례에 대해 여러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대제사장의 죽음이 하나의 속죄(at~onement)가 된다”고 보았고
en.wikipedia.org, 어떤 이들은 경건한 대제사장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보복자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려 복수를 포기하게 만든다고도 설명했습니다en.wikipedia.org. 그러나 신약에 와서 우리는 이 규례의 더 깊은 의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A. W. 핑크는 **“대제사장의 죽음이야말로 보복자에게서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방을 확보해 주었다”**고 설명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로버트 호커라는 신학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당신의 백성 모두를 해방시킨 속죄 제사가 아니었느냐”**고 반문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실제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며 운명하신 순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들이 열리는 등 우리의 구속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 한 번의 속죄 제사로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였고 더 이상 정죄받지 않게 만들었습니다(롬 8:1).
요한 길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에게로 피하는 모든 자들의 모든 죄를 속량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bibletruthchatroom.com. 예수님의 죽음은 도피성에 있던 자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준 대제사장의 죽음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에 머물던 사람이 대제사장의 죽음 소식을 들을 때, 그는 마침내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를 얻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bibletruthchatroom.com.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이상 죄와 두려움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속죄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도피성 제도는 여러 모양과 절차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18세기 주석가 로버트 호커는 “만일 그저 부지중에 피 흘린 자를 무죄 방면하는 것만 목적이었다면 이처럼 번거로운 성읍 제도 대신 장로들의 조사만으로도 족했을 것이다. 이는 분명 더 큰 무언가를 예표함이 아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bibletruthchatroom.com. 그가 지적한 대로, 도피성 규례는 단순한 사법 조치 이상의 구속사적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멸망시킨 우리 영혼을 살려내는 크신 구원의 도피처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영원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구약의 도피성이 일시적이고 공간적인 보호막이었다면, 예수님은 영원하고도 완전한 구원의 방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2편 12절의 권면대로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구약의 도피성을 향해 달리던 자처럼 예수님께로 달려가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4. 다양한 주석과 신학적 견해
4. 다양한 주석과 신학적 견해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이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깊이 있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교부 시대부터 이미 도피성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여겨졌으며, 중세와 종교개혁기를 거치면서 여러 신학자들이 이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종교개혁 이후의 주석가들을 살펴보면, 거의 한 목소리로 이 도피성들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청교도적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여호수아 20장 주석에서 **“이들 도시의 이름들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피난처 되신 그리스도께 적용될 것이다”**라고 전제한 후, 각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차례로 예수님께 연결시켰습니다
bibletruthchatroom.com. 그는 **“괜한 이름풀이로 끼워맞추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 경우 눈여겨볼 만하다”**고 하면서, 게데스는 “거룩”을 뜻하여 **“우리의 피난처는 거룩하신 예수”**라고 했고, 세겜은 “어깨”라서 **“정사가 그의 어깨에 있다”**고 이사야 구절을 인용했으며, 헤브론은 “교제”라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부름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bibletruthchatroom.com. 베셀은 “요새”이니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견고한 산성이 된다”, 라못은 “높음”이니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셨다”, 골란은 “기쁨” 또는 “나타남”으로 **“그 안에서 모든 성도가 즐거워하고,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식입니다bibletruthchatroom.com. 이같은 해석은 이후 설교자들과 주석서들에서 두루 인용되어 왔습니다.
19세기 유명한 부흥설교자 D. L. 무디(D. L. Moody)도 도피성들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이라고 가르쳤고
bibletruthchatroom.com, 특히 그 이름들이 의미심장하다고 강조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같은 시대의 A. W. 핑크(A. W. Pink) 역시 도피성 주제에 관한 글을 남겼는데, 그는 **“도피성들의 이름이 보여주는 바는 곧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들”**이라고 말하며bibletruthchatroom.com, 각 이름의 영적 의미를 자세히 풀이했습니다. 핑크는 예를 들어 게데스를 언급하며 “그리스도는 거룩하시며 그의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주시는 분”(시 16:10 인용)이라고 했고, 세겜에 대해서는 “어깨 –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잃은 양을 어깨에 메어 돌아오셨다”(사 9:6, 눅 15:5 인용)고 설명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헤브론은 “교제 –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한다”(요일 1:9 등 인용)라고 했으며bibletruthchatroom.com, 베셀은 “요새 – 주님은 환난 날의 산성이시다”(나훔 1:7 인용)라고 하였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라못은 “높임 –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높이셨고 우리도 그 안에서 높여 주신다”(엡 2:6 인용)라고 했고, 골란은 “환희 –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롬 5:11 인용)라고 하면서 동시에 **“나타남 –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고 두 가지를 모두 언급했습니다bibletruthchatroom.com. 이러한 핑크의 해석은 철저히 성경구절에 기초하면서도 신학적으로 통찰력 있는 설명으로 평가받습니다.
19세기 말의 설교자 C. H. 스펄전(Charles Spurgeon) 역시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도피성의 영적 의미를 즐겨 다루었습니다. 스펄전은 특히 도피성까지 가는 길이 잘 정비되고 표지판이 세워졌다는 점을 들어,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 놓으신 쉬운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biblestudytools.com. 그는 만약 누군가가 도피성으로 통하는 길을 막거나 표지판을 엉뚱하게 바꾸어 놓는다면 극악무도한 행위일 것인데, 마찬가지로 복음으로 가는 길을 인간이 방해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ccel.org. 또한 스펄전은 예수님을 **“참된 도피성”**으로 선포하면서, 그 안에 피하는 자는 영원히 안전하다고 역설했습니다spurgeon.org. 그의 설교 *“죄인의 도피처”*에서 스펄전은 **“그리스도는 참 도피성이시며, 그에게로 피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하신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정하신 구주이며 능히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spurgeon.org. 이처럼 청교도부터 복음주의 설교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강해자들이 도피성 제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해석해 왔습니다.
근대의 학문적인 주석가들도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존 길(John Gill) 목사는 히브리서 6장 18절 주석에서, **“여기서 말하는 도피처로 피하는 자들은 분명히 도피성으로 달아나는 자들을 암시하며, 그 도피성들은 그리스도의 예표였다”**고 논평했습니다
biblestudytools.com. 그리고 도피성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와 일치함을 길게 주석하며 우리가 앞서 언급한 동일한 적용점을 제시했습니다biblestudytools.combiblestudytools.com. 심지어 자유주의 계열의 학자들조차도 도피성 규례의 인류학적 의의만 논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신학적 독해에서는 이를 예수의 구원에 빗댈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 자체가 히브리서 등에서 이 함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석적, 신학적 견해들은 우리로 하여금 구약을 볼 때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해석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듯이(눅 24:27), 성경 곳곳에는 직접적 예언뿐 아니라 예표와 모형으로 가리킨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습니다. 도피성들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부 신학자들은 지나친 알레고리 해석을 경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혹시 우리가 도피성의 세부사항 하나하나까지 억지로 그리스도께 연결하여 **무리한 영해(靈解)**를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건전한 주석가들은 도피성 제도가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모형임을 받아들입니다. 특별히 대제사장의 죽음과 연계된 점은 우연이라 보기 어려운 강력한 구속사적 힌트입니다. 왜 도피성에 얽힌 법률에 굳이 제사장의 죽음이라는 조건을 넣으셨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미리 가리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심어 두신 장치로 해석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주석가들의 통찰을 존중하면서, 도피성 제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풍성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5. 목회적 적용
5. 목회적 적용
이제 이러한 진리를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생활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묵상하며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첫째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전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피성 밖을 벗어난 피난자가 보복자에게 노출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밖에서는 단 한 순간도 영적 안전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biblegateway.com.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만 죄책과 심판으로부터 보호받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 안에 거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나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치 도피성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살 수 있었듯,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영생을 소유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의 영속성과 **견인(堅忍)**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 번 예수님께 피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리스도를 피난처 삼아 의지하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혹 여러분 중에 주님 품을 떠나 다른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면, 속히 돌이키기 바랍니다. 시편 32편 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주는 나의 은신처”**라고 고백했고, 주님만이 **“활란에서 보호하시는 구원의 노래”**가 되신다고 찬양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심을 믿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죄를 깨달은 사람은 즉시 예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도피성의 길이 항상 열려 있었지만 그 길로 달리지 않는 사람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었고 교회 문도 열려 있지만, 정작 죄인이 스스로의 죄와 위험을 깨닫지 못하면 그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의 도피성에선 부지중에 살인한 자만 보호받았지만, 예수님의 도피성은 고의로 범한 죄인까지도 회개하면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더 놀라운 은혜입니다. 비록 우리가 고의로 죄를 지어 하나님을 거역했을지라도, 예수님은 “아무라도 내게로 오면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주저할 필요 없이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속하고 진심 어린 회개로 주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죄의 자책감이나 수치심 때문에 망설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도피성으로 가는 길에는 푯말들이 분명히 세워져 있었고 길이 평탄했습니다
biblestudytools.com. 이와 같이 복음으로 가는 길은 믿음이라는 단순한 길입니다. 복잡한 의식이나 자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의지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분명한 이정표입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아직 예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오늘이 그 도피성에 입성할 날입니다. 지체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달려오는 영혼을 향해 예수님의 두 팔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참 자유와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죽음 이후 도피성을 떠나 자유인이 된 자는 얼마나 기쁨이 넘쳤겠습니까?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숨죽이며 지내야 했던 삶이 끝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때의 해방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안다면, 우리 삶에는 자유의 기쁨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제 형벌의 두려움에서 풀려난 참 자유인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죄책감이나 지나간 과오의 굴레에 자신을 가두어 둘 필요가 없습니다. 도피성에 있던 사람도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더 이상 그 성에 머물 의무가 없듯이, 예수님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죄과에 얽매어 있지 않습니다. 양심의 자유와 하나님 앞 담대함을 누려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거룩한 삶을 살 자유를 의미합니다. 죄와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다시 죄짓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기쁘시게 거룩함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립니다. 이 자유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골란의 뜻처럼 주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십시오(빌 4:4). 우리의 죄와 허물까지도 모두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신 주님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십시오. 핑크 목사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고 했습니다
bibletruthchatroom.com.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도 품어주신 그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그 감사와 기쁨이 우리의 예배와 삶에 넘쳐날 때, 세상 사람들도 우리의 피난처가 얼마나 든든한지 알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넷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도피성의 표지판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에게 길을 닦고 “피난처” 이정표를 세우라고 명하셨듯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세상에 분명히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께로 피하라”**는 푯말이 보이게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의 길을 찾지 못하거나 혼동된다면, 그것은 옛날 도피성 표지판을 돌려버리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잘못일 것입니다
ccel.org.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복음의 진리를 올바르게 선포함으로써, 갈림길마다 바른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 개개인은 선한 행실과 사랑의 섬김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고 주님께로 이끌리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또한 죄인들이 달려와 숨을 수 있는 은신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유지하면서도, 회개하는 심령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정죄와 배척을 당한다면, 그것은 도피성 문을 걸어잠그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교회도 그런 주님의 마음으로 열린 문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똑바로 전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의 빛을 비춤으로써, 아직 도피성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이 그 길을 발견하도록 돕읍시다. 이것이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복음 전도의 사명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의 도피성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함과 교제와 기쁨이 충만한 피난처요, 우리의 죄짐을 지시고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는 강한 요새가 되어 주십니다. 또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참 자유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께로 도망쳐 나와서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 품에서 쉼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의 삶에 어려움과 두려움이 닥칠 때마다, 다시 이 진리를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이 시편의 고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됩니다. 어떤 시험과 공격이 와도 예수님의 도성 안에 숨읍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담대히 앞으로 나아갑시다. 동시에 아직 성 밖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우리가 함께 손짓합시다. “이리로 오십시오! 이 성 안에 들어오십시오! 여기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분의 구원의 은혜를 널리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못 (רמות, Rāmōṯ) – “높은 곳, 높임”
다섯 번째 도피성 라못은 길르앗 지역, 곧 요단강 동쪽 갓 지파 땅에 있던 성읍(라못-길르앗)입니다(수 20:8). *רמות(라모트)*는 “높은 곳들”(High places)이라는 뜻으로, “높임, 높이 듦”을 연상시킵니다. 이 이름은 높이 들리신 주님, 곧 승귀하신(높여지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으로 만유 위에 뛰어나게 높임을 받으신 왕이 되셨습니다(엡 1:20-21, 빌 2:9).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기 오른손으로 높이시”어 인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5:31). 마태웨 헨리는 “라못은 ‘높은 곳’ 또는 ‘높여짐’이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자기 오른손으로 높이셨다”고 해석합니다
biblehub.com. 또한 라못의 의미는 예수께서 우리를 또한 함께 높이시는 것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죄로 가장 낮아진 자라도, 그리스도 안에 피하면 은혜로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사 하늘에 함께 앉히셨다고 선언합니다jesusplusnothing.comjesusplusnothing.com. 세상에서 죄책과 절망 가운데 낮아진 영혼일지라도, 도피성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지고(벧전 2:9) 장차 그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는 높임을 얻습니다(계 22:5).
골란 (גולן, Gōlān) – “환희, 기쁨 (또는 자유)”
여섯 번째 도피성 골란은 바산 지역, 곧 요단 동편 므낫세 지파 땅에 있었던 성읍입니다(수 20:8). *גולן(골란)*이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쁨, 환희”(exultation, 즐거워 함)이나 “완전한 해방”의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biblehub.com. 마태웨 헨리는 골란을 “기쁨”으로 풀이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광 중에 즐거워한다”고 주석했습니다biblehub.com.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두려움에 떨던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도피성에 무사히 도착한 자가 죽음의 위협에서 해방되어 안도의 기쁨을 누리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피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기쁨의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롬 8: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하신 말씀처럼, 주 예수 안에는 참된 해방의 환희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환난 중에도 빼앗을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합 3:18).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 때, 골란이라는 이름처럼 우리 심령에 성령의 환희가 가득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랑과 즐거움입니다(롬 5:11). 골란 성읍의 이름은 우리를 즐거움과 자유의 삶으로 초대하는 복음의 면모를 비춰줍니다.
以上 여섯 도피성의 이름 하나하나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사역과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게데스의 거룩, 세겜의 어깨, 헤브론의 연합, 베셀의 요새, 라못의 높임, 골란의 기쁨 —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주 예수께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도피성이 생명의 피난처였던 것처럼,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죄인들의 피할 곳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더 풍성히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도피성과 예수님의 관계를 구속사적인 큰 흐름 속에서 조금 더 정리하여 살펴보겠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와 도피성의 구속사적 연결
3. 예수 그리스도와 도피성의 구속사적 연결
도피성 제도는 그 자체로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법률 장치였을 뿐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하는 풍성한 모형(types)이었습니다. 많은 성경 주석자들은 하나님께서 도피성들을 통하여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미리 보여주셨다고 강조합니다
biblehub.com. 히브리서 6장 18절에서 신약 성경 저자는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난처로 도망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명백히 도피성을 염두에 둔 복음 설명입니다feedingonchrist.com. 이처럼 도피성 →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구속사적인 연결 고리를 몇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도피성은 오직 하나님의 준비로 제공된 피난처였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인간이 고안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마련하라고 명령하신 은혜의 도피처입니다(수 20:2)
biblestudy.org. 마찬가지로 죄인이 구원받는 피난처 또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피난처는 태초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길이지, 사람이 마련해낸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부터 죄인을 위한 도피처를 암시하셨고(창 3:15의 원시복음), 구약의 제사 제도와 예언을 통해 한없이 자비로운 피난처 되실 메시아를 예표하셨습니다. 결국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피난처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갈 4:4-5).
둘째, 도피성에 들어가려면 빨리 도망해야 했습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은 지체하지 말고 곧장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도망쳐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 길에서 머뭇거리거나 지체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지요. 이처럼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는 일은 시급한 생명의 문제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 143편 9절에서 다윗은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라고 고백했는데, 우리 모두 급히 주님께 숨지 않으면 안 될 죄의 문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존 오웬은 죄책을 느끼는 영혼이 **“죽음과 멸망이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것을 보고 있는 힘을 다해 주 예수님의 품, 곧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유일한 도피성으로 달아난다”**고 묘사했습니다
feedingonchrist.com.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피난처로 도망쳐 오는 자들을 결코 내쫓지 않겠다고 맹세로 보증하셨기에 그들이 얻는 위로는 더욱 든든하다고 설명합니다feedingonchrist.com.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아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담대히 피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체하지 않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께 피난처를 구하지 않고 망설이는 영혼이 있다면,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속히 나아와 그 품에 숨을 때 비로소 안전합니다.
셋째, 도피성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그 땅에 머무르는 타국인이나 나그네에게도 동일하게 개방되었습니다(수 20:9)
jesusplusnothing.com. 민족이나 신분에 차별 없이 “누구든지” 피할 수 있었지요jesusplusnothing.com.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롬 10:12-13). 복음의 피난처는 모든 족속, 모든 신분의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 초청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선포합니다. 마태웨 헨리도 “이방인이라도 도피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feedingonchrist.com.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롬 10:13). 교회는 차별 없이 모든 죄인들을 환영하는 피난처의 문을 열어놓음으로, 예수님의 포용적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넷째, 도피성은 어디서나 가까이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하나님은 도피성을 이스라엘 땅 전역에 골고루 배치하셔서, 사람이 어디에 있든 하루 만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feedingonchrist.com. 또 유대 전승에 따르면,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넓고 평탄하게 정비하고 이정표를 세워 누구나 길을 잃지 않고 신속히 도달하게 했다고 합니다biblestudy.org. “미클라트(מקלט, 도피처)”라고 적힌 표지판이 교차로마다 세워져 있었고, 길에 장애물이 없도록 늘 수리해 두었다고 합니다biblestudy.org.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가까이 열어 두셨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 8절은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고, 우리가 어디서나 마음으로 주 예수를 부를 때 곧 구원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를 구원하기 어렵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jesusplusnothing.com. 십자가 복음은 온 세계에 전파되었고 누구나 듣고 믿기만 하면 되는 가까운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행하기에 쉬우니라” (신 30:14)고 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피난처는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마음만 돌이켜 결단하면 언제든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맡은 우리 목회자들은 마치 레위인들이 도피성 길을 관리한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오는 길에 걸림돌을 치우고 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jesusplusnothing.com. 복음전파의 표지판을 분명히 세우고, 사람이 만든 장벽을 제거하여, 절박한 영혼들이 쉽게 예수께로 달려올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도피성 안에 거해야 끝까지 안전했습니다. 도피성에 들어온 자라도 그 안에 머무를 때에만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성 밖으로 나가 머무르면 보호를 상실하게 되었지요(민 35:26-28)
biblestudy.org.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한때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피했다 할지라도, 다시금 그분을 떠나 옛 삶으로 돌아간다면 구원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물론 참된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지만, 이를 남용하여 함부로 죄로 돌아가는 것은 성경이 경고하는 바입니다(히 10:26-27). 그리스도 안에 거함은 곧 믿음의 인내와 견인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5:4-5). 도피성에 있다가 나가버린 자가 보복자의 칼날에 노출되듯이, 그리스도를 떠난 영혼은 다시 심판에 놓이게 됩니다feedingonchrist.com. 반면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입니다 (롬 8:1).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에 의해 보호받으며”(벧전 1:5) 주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것을 확신했습니다(살후 3:3).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고, 주 밖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피난처 되신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려 할 때 경고하고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아직 주 안에 거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면 속히 그분께로 들어오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섯째, 도피성의 보호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생존해 있는 동안만 그 성읍 안에 머물러야 했고, 대제사장이 죽으면 죄값이 치러진 것으로 간주되어 완전히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수 20:6, 민 35:28)
biblestudy.org. 이 규례는 아주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죄한 대제사장의 죽음이 피난자에게 자유를 주는 모습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는 것을 예표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범죄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죽임 당하심으로 죄인들에게 속죄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순간, 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렸던 것은 (마 27:51-52) 마치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갇힌 자들이 풀려나는 영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청교도 설교자 니콜라스 바칭크(Feeding on Christ의 필자)는 “예수를 바라볼 때 그분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 죽으신 위대한 대제사장임을 깨닫는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보호하시며, 친히 백성 대신 죽으시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feedingonchrist.com. 그러므로 우리 큰 대제사장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도피성 제도의 그림자를 완성하는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 피하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형벌이 없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주님이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에(히 9:12), 우리는 양심의 죄책에서도 해방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도피성 안에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갈 5:1).
以上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의 도피성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구원의 모형이었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을 집행하시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죄인에게 그 형벌을 피할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으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합니다(롬 8:1).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도피할 수 있는 강한 위로의 근거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피난처를 찾으려고 달려가 붙잡은 소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jesusplusnothing.com.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도피성”**이십니다. 그분은 죄의 형벌에서 우리를 숨겨 주시고, 사탄의 고소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참 피난처입니다.
4. 개혁주의 및 역사적 주석이 주는 통찰
4. 개혁주의 및 역사적 주석이 주는 통찰
이러한 도피성과 그리스도의 연결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교회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깊이 있게 다루어져 왔습니다. 초대 교회부터 많은 해석자들은 여호수아의 도피성 규례에서 구주 예수의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파 주석가들과 청교도 설교자들은 도피성의 영적 의의를 풍성하게 펼쳐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히브리서 6장 18절을 주석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죄인이 예수님 품으로 피신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feedingonchrist.com. 그는 죄의 자각에 놀란 영혼이 “파멸의 위협을 보고 오직 예수님의 품(유일한 도피성)으로 도망쳐 오는” 것이 곧 참된 믿음의 행위라고 설명했습니다feedingonchrist.com. 그리고 하나님께서 맹세로 “그 도망쳐 오는 자들을 기꺼이 받아 주시겠다”고 보증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품에 달아날 때 강한 위로와 확신을 얻는다고 강조합니다feedingonchrist.com. 오웬의 이러한 설명은 도피성이 예표하는 바를 신학적으로 잘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속에서 죄인이 믿음으로 피하는 그리스도의 품을 생생히 느끼게 합니다.
또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그의 주석에서 여호수아 20장을 다루며 “이 도피성의 모형 안에 복음의 많은 선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하였습니다
feedingonchrist.com. 그는 일곱 가지 측면에서 도피성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앞서 부분적으로 인용한 내용들입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다시 상기해보면: (1) 도피성 여러 곳이 온 땅에 배치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어디서든 가까이 계셔서 우리가 반나절이 아니라 순간이라도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는 분이시며feedingonchrist.com, (2) 도피성에는 이방인과 나그네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고 누구든 믿음으로 피하면 안전하며feedingonchrist.com, (3) 심지어 도피성 성읍 경계에 들어서기만 해도 보호를 받은 것처럼(수 20:Touch),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 온전한 믿음의 확신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그리스도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얻는다는 영적인 적용feedingonchrist.com 등입니다. 헨리는 “도피성 제도라는 그림 언어 아래 복음의 많은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평하며, 히브리서 6:18의 '피난처로 도망함'이 바로 이 도피성을 가리킨다고 주석했습니다feedingonchrist.com. 이러한 역사적 주석들의 통찰은 우리가 구약을 단순한 옛 이야기로 넘기지 않고, 거기서 그리스도를 찾는 눈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개혁주의 해석자들은 일찍부터 율법 조항마저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음을 강조해 왔고(요 5:39), 도피성은 그 대표적 예시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개혁주의 주석과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도피성을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예표로 이해하며, 이 본문을 통해 복음의 영광을 선포해 왔습니다. 이러한 선배들의 통찰을 배우며 우리도 성경을 더욱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는 나의 도피성”이라는 주제는 결코 억측이나 과장이 아니라, 교회 역사 속에 증언되어 온 복음 진리의 정수인 것입니다.
5. 목회적 적용과 권면
5. 목회적 적용과 권면
마지막으로, 이 진리를 목회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지 몇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도피성의 교훈을 통해 얻은 신학적 통찰을 신대원 학생으로서 장차 목회에 활용하고, 성도들의 삶에 접목시켜 열매 맺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 전도의 사명입니다. 도피성 이야기는 죄인을 향한 긴박한 초청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도망하여 피하라”**는 외침으로 죄인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마치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이 살기 위해 전력 질주했듯이, 죄의 자각이 있는 영혼에게 즉각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촉구해야 합니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심판의 현실을 깨닫게 하고, 오직 예수님께 피하는 길만이 살 길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도피성과 예수”를 연결지어, 구약의 그림자를 들어 예수님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옛 이스라엘에게는 무고한 자를 위한 도피성을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는 죄인을 위한 도피처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처음 듣는 이들의 흥미를 끌고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좋은 비유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 성도들은 구약 이야기에 익숙하므로, 이를 복음적으로 재해석해 주면 마음에 쉽게 와 닿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신자들에게 주는 위로와 확신입니다. 이미 예수님께 피한 성도들도 여전히 죄책감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도피성의 교훈을 일깨워줍시다. 로마서 8장 33-34절의 말씀처럼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정죄할 이는 없나니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시니”라는 선언을 붙들게 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때때로 넘어지고 실수할 때라도 다시 속히 도피성 되신 예수께로 달려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너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이 너를 덮고 있으니, 그 안에서 안식하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해야 합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가 성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듯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양심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6장 18절의 약속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다는 두 가지 불변의 맹세로 강한 위로를 주셨음을 상기시키십시오
feedingonchrist.com. 이는 곧 구원의 확신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내 의가 아니라 피난처이신 예수님의 신실함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확신을 갖게 될 때, 믿음의 삶을 담대히 살아갈 힘을 얻을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의 역할과 목회의 사명입니다. 구약 레위인들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도피성 제도를 운영하며 사람들을 도왔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는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도피성으로 가는 큰 길을 만들고 이정표를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biblestudy.org, 우리도 복음의 이정표를 뚜렷이 제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전하는 설교와 가르침은 언제나 십자가의 도를 가장 분명하고 곧은 길로 제시해야 하지, 인간의 전통이나 율법주의, 세속적 지혜로 그 길을 흐릿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우리 자신의 사역 태도가 복음의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천국 문을 닫고 사람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 23:13). 반면 좋은 목회자는 마치 도피성의 성문을 열어주는 제사장처럼, 찾아오는 영혼들을 반갑게 맞이해야 합니다jesusplusnothing.com. 여호수아 20장 4절에 보면, 도피성의 장로들이 성문으로 달려온 사람을 들여보내어 자기들에게 장소를 주어 거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 공동체도 회개하며 나아오는 영혼들을 기쁨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정죄와 배척이 아니라, 환영과 돌봄의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여기가 내 안식처다” 하고 느낄 수 있는 영적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바른 복음을 전할 때 그 안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목회 현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도피성처럼 운영해야 합니다. 언제라도 상한 심령이 달려올 수 있는 안전지대로 교회를 세워가십시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가 될 때, 교회는 세상 속에 빛나는 피난처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넷째로, 성도의 삶의 실천입니다. 도피성의 영적 의미를 깨달은 성도라면 마땅히 감사와 거룩함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먼저 감사와 기쁨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골란이라는 이름처럼 기쁨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 32편 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은신처”라고 고백하며 구원의 즐거움에 찬송했습니다. 우리 역시 “나의 도피성이신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생활에 넘쳐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함과 순종의 삶입니다. 예수님 품에 피한 우리는 함부로 죄 가운데 머물 수 없습니다. 게데스의 의미대로 거룩하신 주님 안에 거한다면, 우리도 점점 거룩해져야 합니다. 이는 곧 피난처 되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을 뜻합니다. 또한 헤브론의 의미대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와 예배의 삶에 힘쓰십시오. 도피성에 있던 사람이 성 안에서 레위인들의 가르침을 받았듯
feedingonchrist.com,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겜의 교훈대로 우리의 짐을 주께 맡기고(벧전 5:7) 서로 짐을 져주는 사랑을 실천하십시오(갈 6:2). 베셀의 확신 안에서 날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 담대하십시오. 라못의 소망 가운데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의 고난을 견디십시오. 이처럼 도피성 각각의 영적 교훈을 성도의 삶의 미덕으로 적용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다섯째로,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증언입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가 성 밖의 친지들에게 자신의 살아남음을 증언하듯이, 우리도 세상에 나가 우리의 피난처를 자랑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와 두려움 가운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친구, 이웃, 가족 중에는 부지중에라도 죄의 짐에 눌려 괴로워하는 영혼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담대히 **“나도 한때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두렵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났더니 평안과 자유를 얻었다”**고 간증하십시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안전과 기쁨을 전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이는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의 책임이자 특권입니다. 피난처를 발견한 자로서, 아직 위험 속에 있는 자들에게 그 피난처를 알려주는 것은 사랑의 마땅한 표현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증언에 힘쓸 때, 교회는 이 땅에서 도피성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마 5:14) 하신 말씀처럼, 세상 속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환난당한 자들의 등대와 피난처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결론
결론
사랑하는 신학대학원 동역자 여러분, 도피성과 예수에 담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완전한 도피성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주어진 것이고, 그 실체가 우리 주님 안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두려운 도피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담대한 도피자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또한 그 품 안에서 참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자신의 구원 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죄책감과 영적 공격으로 인해 흔들리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께로 피하십시오! 그분 안에 피하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내쫓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고백한 시편 기자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노래가 되길 바랍니다. 피할 길 없는 세상에서 방황하던 우리에게 예수라는 문이 활짝 열렸으니, 이제 담대히 그리로 들어가 합시다. 그리고 이미 그 안에 들어온 우리는 이 놀라운 피난처를 세상에 전하는 표지판 역할을 충실히 감당합시다.
끝으로, 히브리서 6장 18절과 19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피난처를 찾으려고 달려가 붙잡은 소망을 얻도록, 하나님이 약속과 맹세로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가 영혼의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