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10) 영으로 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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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니고데모는 한 나라의 선생으로 불리울만큼 탁월한 사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한 대현자가 하늘에서 온 선생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을 찾아가서 나눈 대화를 우리가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이 대화는 보통의 대화처럼 가볍게 보고 넘겨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질문, 이 대답...하나 하나에 깊은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바로 바로 토하듯이 내뱉는 대화는 깊지 못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머리까지 닿기도 전에 본능이나 습관대로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로는 신앙의 정수에 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서는 가난한자와 과부와 고아와 창녀와 세리들까지 신분의 귀천과 배움, 지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상태로 머물러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비천한 우리를 고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믿음이고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거지와 무식쟁이들을 데려다가 왕과 같이 제사장과 같이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1. 복음은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1. 복음은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매우 단호하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아무리 도덕적이고 선하며 영향력 있고, 재물까지 풍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반대로, 아무리 비도덕적이고 악하며 미약하고 가난한 이라도 거듭나기만 한다면 된다.”
여기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너무 급진적으로 들리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부분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본질’을 바꾸려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서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요, 바리새인 중에서도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 인물입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조차 말씀하십니다:
“너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니고데모는 깜짝 놀라며 되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했기에,
거듭난다는 개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은 영적인 탄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분의 영으로 인해 우리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일입니다.
2.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 소크라테스와 거듭남의 통찰
2.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 소크라테스와 거듭남의 통찰
성철스님은 인간적으로 매우 깊은 사유의 소유자입니다.
그분이 이 구절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는 원래 산과 물은 본질 그대로 우리가 인식했다가
살아가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의 축적으로 인해 산과 물같은 대상들을 왜곡된 시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과 물은 그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해석에 따라 규정됩니다.
그러나 성철스님 자신은 모든 얽매임을 벗어 버리고
비로소 갓태어난 아이와도 같은 순수한 본성으로 산과 물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와 같이 육과 영도 그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인식되어야 하는데
이미 우리는 들은 것도 많고 본 것도 많고 여러 생각에 영향을 받아
본래 그대로 인식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니고데모도 육과 영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과 육체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의 생각의 틀에서 해석하니
최선의 답이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가서 태어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다시 설명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이 말씀은 단지 우리의 ‘육체적 기원’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세상 인식 방식과 존재의 근본을 구분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외모, 재산, 지위, 학벌, 도덕성, 성공 여부 등으로 사람의 가치를 단정짓곤 합니다.
소위 ‘육으로 난 것’의 방식, 즉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조건으로 인간과 세상을 파악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육적 관점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요.
존재의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끝없이 질문했습니다.
“네가 진짜로 아는 게 무엇인가?”
“너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참된 삶인가?”
그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한 ‘자기 인식’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무지와 유한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리와 선, 그리고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이 영혼은 본능적으로 진리, 선,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오직 육적인 관점에 머무는 사람은 이 갈망을 전혀 느끼지 못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쫓아가버리기 십상입니다.
이 통찰은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존재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 눈을 뜰 수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3. 거듭남은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신분
3. 거듭남은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신분
그러면 구체적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단지 “이제부터 교회 열심히 다녀야지” 하는 결심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1) 새로운 감각 (New Sense)
1) 새로운 감각 (New Sense)
신학자는 말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감각을 낳는다.”
이것은 감정 변화 정도가 아니라, 영적 세계를 감지하는 감각이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전에는 성경 말씀이 딱딱한 교리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 말씀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진리에 무감각하던 사람이 어느 날 말씀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게 됩니다.
교만과 냉소로 가득하던 마음이, 겸손과 사랑을 사모하게 됩니다.
세상의 일시적 아름다움이 아닌,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는 마치, 어두운 방에서 살던 이가 밖으로 나와 눈부신 햇빛을 처음 보고 깜짝 놀라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거듭남은 우리 영혼에 새로운 빛과 방향 감각을 선물합니다.
2) 새로운 신분 (New Identity)
2) 새로운 신분 (New Identity)
두 번째로, 거듭남은 신분의 완전한 전환을 가져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혈통, 학벌, 스펙 등 세상의 기준이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가족(가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안의 성(姓)을 물려받고, 그 가정의 보호와 양육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듭나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언어, 문화를 전수받고 누리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적 보호와 하늘의 자원을 누리게 됩니다.
4. 팀 켈러 목사님과 한 여인의 이야기
4. 팀 켈러 목사님과 한 여인의 이야기
거듭남의 필요성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예로, 팀 켈러 목사님이 만난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인생을 다섯 가지 **‘신분’**으로 정리했습니다:
도덕적 자부심
보수적인 교회 환경에서 자라며, 스스로 꽤 선한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사랑받는 존재
연애를 통해 자존감과 의미를 찾았습니다.
성공한 커리어 여성
직업적 성취가 인생의 목표였고, 이를 통해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
다른 이를 돕는 선행과 자선이 스스로를 가치 있게 만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예상치 못한 일로 꼬이기 시작하자, 이 모든 신분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사랑에 실패했고, 직장에서 좌절을 겪었으며, 봉사마저도 지치고 허무해졌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고백합니다:
“제가 저를 구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떤 신분도 저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복음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참된 정체성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오직 영으로 거듭나야만 진짜 ‘나’가 될 수 있구나.”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전의 모든 신분들은 그 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자리’**에서 인생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5. 맺는 말: 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
5. 맺는 말: 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단순히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는 교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거듭남의 선포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아무리 도덕적이고, 선하고, 영향력 있고,
부자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죄 많고, 약하고, 실패하고, 가난한 사람이라도
거듭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아름다움이며,
복음의 경이로움이고,
복음이 주는 자유와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듭나야 하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육적인 것을 추구하며 거기에 매몰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거듭남으로 인해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육적인 것은 한시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육적인 것은 썩는 것이고
영적인 것은 썩지 않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은 사라질 것들이고
영적인 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육적인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은 금이지만
영적인 것은 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말씀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엎드려 간구합시다.
“주님, 나를 새롭게 하소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제가 육의 방식이 아니라, 영으로 사는 자가 되게 해 주소서.”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후로 감각과 신분에 대한 설명.
이번 설교는 거듭남이 영적으로 난 것이라는 설명
다음 주는 믿음과 회개
그 다음주는 심판과 행위
좋습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에서 말하는 '영혼(ψυχή)'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요한복음 3장 6절의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과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을지 심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자료를 조사한 후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영혼 개념과 요한복음 3:6의 연관성
소크라테스 철학의 영혼 개념과 요한복음 3:6의 연관성
고대 그리스의 영혼(ψυχή) 개념과 소크라테스의 혁신
고대 그리스의 영혼(ψυχή) 개념과 소크라테스의 혁신
고대 그리스에서 ‘영혼’(ψυχή, 프쉬케)은 처음에는 주로 생명이나 숨과 연결된 개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영혼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사람이 죽을 때 몸에서 빠져나가 저승으로 가는 그림자 같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살아있는 몸과 시신을 구분해 주는 것이 영혼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 영혼이 별도의 활동을 한다거나 사람의 성품을 좌우한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인들의 영혼관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영혼은 단순히 생사의 경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살아 있게 하는 원리로 이해되고, 인간의 정서와 도덕적 성품까지 담아내는 그릇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특히 영혼은 인간의 용기나 절제, 정의와 같은 도덕적 품성의 근원으로 간주되었고, 사람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품질이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요컨대, 소크라테스 시대의 영혼 개념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자아를 가리키는 말로 발전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돌보고 계발하는 일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습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에서 본 영혼의 본질과 기능
소크라테스 철학에서 본 영혼의 본질과 기능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진정한 자아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여러분의 영혼을 가능한 한 훌륭하게 만드는 일에 첫째 가는 그리고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라. 그리고 그 일을 다 하기 전까지는 몸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말라”라고 평생에 걸쳐 권면했다고 전해집니다 (Socrates - Care of the Soul). 그는 영혼의 탁월성, 즉 도덕적 덕과 지혜를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으라고 역설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영혼은 단순한 생명 원리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주체였습니다. 따라서 영혼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참된 본질이며, 육체는 영혼이 머무르는 일시적인 거처에 불과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에서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은 우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몸의 감정이나 욕구를 절제하고 다스리는 역할을 합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본래 신적이고 불멸하는 것과 친화성이 있다고 자주 말합니다. 예를 들어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눈에 보이지 않고 분해될 수 없는 비물질적 실체이므로, 결국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고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그는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며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고 확신했는데, 그 말에 제자 글라우콘이 깜짝 놀라 되묻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소크라테스는 여러 가지 논증을 통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서도 지성적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고 역설했지만, 무엇보다도 영혼이 생명 그 자체의 원리이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플라톤의 설명에 따르면, 영혼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지닌 것이기에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다시 말해 영혼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 곧 불사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신적인 것에 참여한다고 보았습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영역의 진리를 붙들 수 있고, 우리 안에서 몸을 다스리고 이끄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성질이 마치 **신적(神的)**인 것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영혼은 육체를 움직이고 삶을 주관하는 주체로서, 신이 우주를 통치하듯 한 사람의 영혼은 그의 육신과 삶을 통치하는 **왕자(王者)**와 같다는 것입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그래서 영혼이 육체의 감각에 이끌릴 때는 제 기능을 못 하고 혼미해지지만, 순수하게 자신만의 힘으로 이성적 진리를 탐구할 때는 흔들림 없이 지혜에 도달한다고 보았습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즉, 영혼은 진리와 선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것을 바라볼 때 자기 본성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렇게 영혼이 자기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면 지혜롭고 안정되게 되지만, 감각적 쾌락이나 욕망에 사로잡히면 혼돈에 빠진다고 본 것입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이러한 사상은 훗날 플라톤이 말한 “이성적인 영혼이 욕망을 제어하고 덕로 단장해야 한다”는 철학으로 발전합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무엇보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도덕적 순수함과 탁월성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는 악한 행동을 하면 영혼을 해치는 것이고, 선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면 영혼을 이롭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영혼을 최대한 선하고 지혜롭게 가꾸는 것이 영혼이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했습니다 (Plato, Phaedo, page 107
). “영혼이 불멸이라면 우리는 이 생에서뿐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시간 동안 그것을 돌봐야 합니다. … 이제 영혼이 불멸인 것으로 드러난以上, 영혼은 가능한 한 선하고 지혜롭게 되지 않고서는 악에서 달아날 수도 없고 달리 구원받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Plato, Phaedo, page 107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영혼을 돌보는 일이 일생뿐 아니라 영원에 걸쳐 중요하다는 깨달음이며, 영혼이 선과 지혜를 갖추는 것이 곧 영혼의 구원과 직결된다고까지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소크라테스 철학에서 영혼의 본질은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자기 자신이며, 그 기능은 진리를 알고 덕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혼관은 육체의 쾌락이나 물질적 부보다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으로 이어졌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돌봄”의 대상을 오로지 영혼에 두고 평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6 –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의 의미
요한복음 3:6 –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의 의미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하신 말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거듭남(重生)**의 비밀을 설명하는 핵심 구절입니다. 니고데모가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육신의 출생과는 별개로 영적 출생, 곧 성령으로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요 3:3-5). 여기서 “육으로 난 것”이란 부모로부터 육체적 생명을 태어나 받는 자연적 출생을 가리키고, “영으로 난 것”이란 **하나님의 영(聖靈)**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대조하시면서, 인간이 단순히 육체를 따라 태어나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으며 반드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요 3:3, 5).
신학적으로 볼 때, “영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 내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 본성을 부여받았지만, 타락 이후로 그 영적 생명은 억눌리고 죽은 상태와 같이 되었습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주석가들은 여기서 말하는 “영”(spirit)이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주는 요소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자리하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그러나 자연적 상태의 인간에게 그 영은 거의 잠든 상태와 같아서 스스로는 참된 영적 생명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사람 안에 잠자고 있던 영이 성령의 역사로 활성화되어 새 생명을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마치 육체적 생명이 출생을 통해 시작되듯, 영적 생명도 성령에 의한 영적 출생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난 것”은 곧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영적 존재를 뜻하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이제 영적인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한 해설자는 “육에서 난 것은 여전히 육에 지나지 않지만, 성령에게서 태어난 것은 영적인 존재, 하늘에 속한 존재, 그 출생시켜 주신 분(성령)을 닮은 신적인 속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인간의 영혼은 성령의 형상대로 빚어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새 본성을 얻게 되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신비이며,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요약하면, 요한복음 3:6의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씀은 성령을 통한 영혼의 새 탄생을 가리키며, 육신에 속한 옛 삶이 아닌 영에 속한 새 삶이 시작되어야 함을 선언한 구절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영혼관과 영적 거듭남의 연결 고찰
소크라테스의 영혼관과 영적 거듭남의 연결 고찰
이제 소크라테스의 영혼관과 예수님의 가르치신 영적 거듭남을 함께 놓고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철학적·신학적 연결점이 드러납니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그로부터 수백 년 후의 것이지만, 둘 모두 인간 존재에 있어서 육체보다 영혼/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재산이나 육신의 즐거움에 몰두하여 정작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참된 삶은 눈에 보이는 육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 존재, 즉 영혼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Socrates - Care of the Soul).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니고데모에게 눈에 보이는 육신의 출생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혼이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이는 결국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삶(쾌락, 명예, 재물 등)에 집착하는 삶을 반성하고 영혼을 선하게 가꾸는 삶으로 방향 전환할 것을 요구했고,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하신 셈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영혼관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영혼의 신적 기원과 목적에 대한 통찰입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영원 불멸하며, 진정한 선과 지혜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Plato, Phaedo, page 107
). 영혼은 하나님과 유사한 것을 담고 있어서, 올바르게 산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신의 품성에 가까운 상태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묘사하며(창세기 1:27), 타락으로 그 형상이 훼손되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다고 가르칩니다(에베소서 4:23-24 등). 소크라테스가 말한대로 영혼이 최대한 선하고 지혜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담는 영적 성숙으로 연결됩니다 (Plato, Phaedo, page 107
). 다만 소크라테스는 그 방법으로 철학적 성찰과 덕의 실천, 즉 인간의 노력과 깨달음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려 했던 반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영혼이 거듭남으로써 참된 선과 거룩을 이룰 수 있다고 선언하신 차이가 있습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소크라테스의 관점에서는 사람의 영혼이 스스로 진리를 사랑하고 악을 떠나 선을 행해야 했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야 비로소 사람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온전히 따라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관점이 주는 통찰의 조화는 주목할 만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당대에 사람들의 영혼을 각성시켜 도덕적 갱신을 촉구한 “철학적 영적 산파”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무지와 부도덕으로 인해 병든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대화와 질문을 통해 사람들의 내면을 일깨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심으로써, 영혼의 근원적인 변혁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의 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치유와 새 창조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소크라테스가 던진 “당신은 영혼을 돌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나는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되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육체적 쾌락이나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혼의 선함을 추구할 때 가장 인간답게 됩니다 (Ancient Theories of Sou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신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때 비로소 창조 목적에 맞게 참 삶을 누리게 됩니다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결국 소크ра테스의 통찰과 요한복음 3:6의 계시는 모두 인간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며,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의 방향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내용을 설교나 강의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에는, 소크라테스의 예를 통해 보편적 진리를 끌어올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조차도 알았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며 그것을 잃으면 온 세상을 얻고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영혼이 새 생명으로 거듭나야 함을 가르칩니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로 영혼을 성찰하지 않는 삶의 위험을 경고했는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삶의 한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눈을 들어 영원한 것을 추구했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복음의 부르심을 따라야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영으로 나야만” 참된 생명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진리는, 결국 인간 영혼의 참된 본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나야 살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사랑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그 본래 목적을 이룹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 철학의 통찰은 복음의 진리를 비추는 예화가 됩니다. 철학자가 더듬었던 영혼의 길을 완성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여 죽을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은 소크라테스가 평생 추구했던 영혼의 선과 지혜가 성령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보여주는 선언이며, 우리에게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초대입니다.
이러한 철학적·신학적 통찰을 통합하여 설명할 때, 듣는 이들은 인간 영혼의 가치와 목적을 깊이 깨닫게 되고 동시에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거울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거듭난 영혼의 삶을 누리도록 초청하는 것이 바로 본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 하겠습니다. 영혼의 본질을 깨달아 육이 아닌 영을 따라 사는 삶,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바라본 지혜로운 삶이자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생의 길입니다. (Plato, Phaedo, page 107
) (John 3:6 Commentaries: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