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바울식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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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바울식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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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바울식설교

우리 시대에 회복해야 할 바울식 설교
설교자로서 설교를 잘 하고 싶은 갈망과 소원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고 생각합니다. 우리 설교에 있어서 최고의 모델 이 있다면 물론 예수님입니다. 그
러나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거리감을 늘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로서 ‘예수님’ 하면 얼른 초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림이 떠오르지도 않습니
다. 그러나 ‘바울사도’하면 훨씬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대상으로서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 다. ‘예수님 같은 설교자’ 하면 상당히 모호
하고 추상적일 수가 있지만 우리가 조금 노력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으면 바울같
은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바울 사도의 사역은 우리에게 커다란 귀감이 됩니다. 저는
바울 사도의 사역 중에서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역 가운데 하나가
설교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시대를 아는 자가 그 시대를 바꿀 수가 있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 이 시대 속에서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말씀
을 선포하는 소명을 받은 우리가 처한 시대, 우리가 직면한 이 시대를 제대로 파악
하는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설교하는 본문, 메시지, 소위 성경의 텍스트는 시대와 무관하지 않습
니다. 시대라는 콘텍스트 안에서 성경의 기자들이 살았던 시대 안에서 선포되었던
메시지라는 것은 성경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려고 쉽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분명한 사
실입니다.
설교 준비나 성경 연구나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 본문의 역사적 정
황, 삶의 자리, 역사의 자리, 상황의 자리를 이 해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이해하
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초점입니다. 시대를 무시하고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가 없
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시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려고 하는 설교자들이 우
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할 때 “시대를 이끄는 자,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자, 시대를 변혁할 수 있는 자로서의 리더십을 강단을 통해서 어떻게 발휘
할 수 있겠느냐”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지를 읽어보면 삼국지의 저자인 나관중이 유비와 제갈공명 이 만나는 정황을
기술하면서 그 시대를 유비에게 보여주려고 애썼던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유비
시대에는 난세의 영웅들이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정치판을 보면 삼국지의
군웅들이 출몰하던 시대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난세의 영웅들인
구룡, 십룡 등등 용이 자꾸 늘어나 “용이냐 미꾸라지냐”하면서 우리 시대에 많은 질
문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난 세의 영웅들이 할거하면서 경쟁하고 있었던 그
시대에는 많은 모사꾼들이 있었습니다. 저마다 잔꾀를 통해서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
고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영웅들이 할거하고 있던 시대 속에서 제갈공명이 유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그와 대화를 하고, 삼고 초려를 하면서 세 번씩 자기를 찾
아온 유비의 인격을 더듬어 생각하다가 “이 시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잔꾀를 부리는
모사 앞 에 상당히 지쳐 있는데 당신이라면 천하 통일은 몰라도 천하의 1/3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시대 사람들은 당신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다. 잔꾀에 지쳐있고 음모에 지쳐있는 이런 시대의 백성들에게는 당신 같은 새로운
리더십이 분명히 필요한 것이다. 내가 당신을 돕는다면 천하의 1/3은 아마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시대를 읽은 것입니다.
그 시대의 민중들의 음성, 갈구, 애환, 소원을 읽었고 있었기에 유비 곁에서 한 시
대를 이끄는 리더십의 자리에 서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바울의 시대
바울이 살고 있었던 시대 소위 초대교회가 태동하고, 생동하고, 세계 복음화에 가
장 중요한 모퉁잇돌을 놓을 수가 있었던 1세기의 시대를 어떤 시대라고 할 수 있습
니까? 저는 1세기의 시대를 가만히 생각하면서 그것이 우리 시대와 매우 방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신약 학자가 1세기의 시대, 초대교회가 잉태되던 시대, 초대교회가 생동하면
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그 시대의 특성을 세 가지로 묘사한 것을 기억합니다. 소위
‘팍스 로마나’ 로마의 통치 영역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있었던 그 시대의 상
황을 세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 1세기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와 함께, 로마의 헬레니즘을 배경으로 해서 새롭게 부상하는 로마의
문화와 함께 전 세계는 급속도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시
대와 조금 비슷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
가 ‘지구촌화’ 입니다. 세계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가 되
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한동안 미국 목회를 하다가 3년 반전에 다시 국내로 들어 왔습니다. 사실 국
내로 들어와서 새롭게 교회를 개척할 때 옛날 교회에 대한 향수가 많이 있었습니다.
옛날 한국 교회의 상황, 옛날 한국 교회 성도들의 열정, 하나님께 대해 간절히 갈구
하는 마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이민 목회를 통해서 제가 보람도 느꼈고 의미 있
게 목회를 했습니다만 그래도 한국 교회에 대한 향수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50을 넘
어가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고 하는데 고향 생각도
나고, 귀소본능도 있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동기가 제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또 이질적인 미국의 문화 속에서 제가 적응하면서 이
제는 좀 내 뿌리와 같은 조국의 문화 속에서 목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와서 6개윌간 목회 하면서 느낀 것은 ‘내가 생각했던 한국 사람이 아
니다. 너무나 변했다.’ 는 사실이었습니다. 오히려 미국 사람들보다도 더 미국적인
그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미국 사람이 싫어서 한국으로 왔는데 한국 사람들
이 미국화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분당에서 전세를 얻어서 목회하고 있는데 본당이 지하실 에 있어서 들어가려
면 1층에 있는 버거킹을 통과해야 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버거킹을 공식적인 레스
토랑이라고 합니다. 그 옆에는 KFC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날마다 버거킹과 KFC를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싫어서 왔는데, 김치 냄새가 그립고 된장 냄새가 그리워
서 왔는데 말입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서 어린이 선교대회를 가졌는데 어린이들에게 세계 음식 맛
보기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여러 나라 음식 코너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중국 음식 하면 자장면 하나를 만들어 놓고, 일본 코너 하면 우동 하나 만들어 놓았
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몰려가는 코너가 이탈리아 코너였습니다. 거기에 는 피자가 있었
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자라나던 시절에는 자
장면이면 만사가 형통하던 시대였는데 요즘은 피자로 변했습니다. 세계가 하나의 세
계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문화로 세계가 통합되고 있던 것이 1세기
의 한 특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그렇습니다.
둘째, 1세기는 급속도로 과학화와 산업화가 추진되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상황으로 봤을 때는 거의 혁명적이라고 할만큼 급속도의 혁명적인 변화
가 일어났던 시대가 바로 1세기였습니다. 소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해서
길을 닦고 전 세계를 하나의 도로망으로 묶기 위해 야심찬 로마의 과학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 던 시대였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그렇습니다
셋째, 가치관이 급속도로 변화되는 시기였습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거기에 따르게 되는 사람들의 생각의 틀이 변하게 됩
니다. 소위 패러다임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생각하는 유형, 문제를 풀어 가는 방식, 이런 일에 있어서 가치관이나 가치 실현
의 방법들이 급속도로 변화를 맛보고 있었던 시대가 바로 1세기였습니다. 저는 이런
시대적 배경을 만든 것도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만들고, 헬라어라는 하나의 언어를 쓰게 만들고, 세계
모든 도로망을 하나로 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바울과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의 문화권으로 급속도로 좁혀지고 있는 세대에 헬라어
성경을 가지고 전 세계를 뛰게 만드시고 그리고 전 세계로 통하는 교통망으로 복음
의 메시지를 들고 나갈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가 1
세기와 더불어 닳았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놀라운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위기
의 문제들이 우리 앞에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우리는 정말 위대한 도전을
해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도 학자들은 전도가 가장 잘 되는 사회는 아주 평안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 전도한다고 당장 목숨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상당
히 평화롭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이 평화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겠느냐, 뭔
가 터질 것 같은, 마음속에 해소되지 않은 불안감을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사회적 정황, 이때가 가장 전도가 잘 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1세기가 그
러했습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다 지배 해 버렸으니까 특별한 위협이 없습니다. 구
체적으로 일어나는 세계적인 위협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여기 저기에서 계
속해서 어려운 일이 터집니다. 그리고 이 평화가 언제까지 얼마나 더 계속되겠느냐
싶어 상당히 마음속으로 불안해합니다. 그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
음이 전해지기가 가장 좋은 절묘한 역사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소위 동서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사라진 시
대, 이제는 미국이라는 한 나라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칠 뿐 더 이상 첨예한 이데올
로기로서의 냉전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평안합니다. 그러나
평안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굉장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세기의 부흥을 우
리 시대에 다시 맛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에 시대를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
리고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이 시대 앞에 설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2. 헌시대의 상황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맞서서 설교하고 있는 우리 시대, 바로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설교학적인 관점에서 두리 시대를 관찰할 때 네 가지의 중요한 시대적
특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속주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지극히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현대를 살아가
는 사람들의 가장 절실한 문제는 ‘오늘’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누릴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여기입니
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관심의 세속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 천국에 대한 향수와 동경이 마음을 깊이 사로잡고 있었
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부흥이 올 때, 혹은 우리 시대가 아주 절박한 고통 앞에 시
달릴 때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심이 아주 세속화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천국에 대한 메시지를 포기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렇게 관심이 세속화된 시대에서 어떻게 여전히 ‘지금’ ‘여기’ 에 밖에 관심이 없는
청중들을 데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도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그들이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도전을 던집니까? 이
것이 바로 설교자의 과제입니다.
이것은 설교학에서 ‘상황화’ 입니다. 이 시대의 상황을 읽고 어떻게 상황에 적합
하게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느냐의 과제입니다.
파스칼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를 제대로 읽고 메시지를 말하던 그 시대의 변증
가, 철학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팡세」에 보면 파스칼이 천국에 대한 설명을 한 가운데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내일 매우 불길한 예감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예감 속
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 내일 어쩌면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 내일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내일 무
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전혀 모르는 미지의 내일에 대
한 생각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또 한 사람은 내일 결혼 날짜를 받
아놓은 사람이 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구의 오늘이 가장 감격스러운 하루가 될
수 있느냐고 파스칼은 명제를 제시합니다. 저는 그 시대를 읽으면서 파스칼이 천국
을 아주 잘 변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시대에도 우리 시대와 비슷한
관심의 세속화가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여러분, 천당에 대한 소망을
가지십시오.”라 는 메시지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여러분, 천국에 대한 소망은
천국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여기에서 여러분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는 전략을 가지고 메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속주의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설 수
가 있느냐? 이것이 설교자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멀티미디어의 시대입니다.
소위 MM시대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MM’하면 매스 미디어를 뜻했습니다만 매스 미
디어는 옛날 얘기입니다. 이제는 멀티 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자라던 시대는 소위 라디오의 시대입니다. 귀로 듣는 것에 의해서
생각을 만들고,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귀로 듣는 것에
상당히 익숙합니다. 그러나 요즘 이 시대에 자라고 있는 신세대 어린이들은 더 이
상 귀로만 의존해서 자라나지 않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컴퓨
터, TV등 오늘 어린이들의 최대의 스승 역할을 하고 최대의 영향력을 갖는 것도 바
로 텔레비전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시편23편은 “,TV는 나의 목자시니”입니다. TV가
그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많이 배우는데 얼마나 TV에 익숙해져 있으면 선생님
이 “야, 너 알파벳 외워봐라. T자 다음이 뭐니?” 하니까 “V죠”라고 대답했다고 합니
다 얼마나 TV에 익숙해져 있으면 그렇게까지 TV문화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
겠습니까. 보는 것에 의존해서 자라나는 세대, 이런 시대의 청중들 앞에 서서 설교
자들이 성경 한 권 들고 단조롭게 들려주는 설교를 어떻게 그들이 효율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느냐, 이것이 이 시대의 설교의 문제입니다.
보는 것도 그냥 보는 것이 아닙니다. 리모트 컨트롤을 가지고 마음에 안 드는 프
로그램이면 10초, 20초 동안에도 몇 번씩 채널을 바꿀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단조롭게 30분, 40분 말씀을 가지고 외쳐서 어떻게 목소리 하나로 그들을 붙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의 대안으로서 요즘 소위 현대 설교에서 계속 등장하는 이야기식 설교가
중요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설교여야 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그림 그리기를 상실하
면 청중을 놓쳐 버립니다. 귀로만 들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생생한 묘사, 살아있는 묘사, 움직이는 그림, 이 그림이 없이 어떻게 이
시대의 스피드 문화, 색채 문화, 칼라와 변화를 가지고 있는 청중들의 마음속에 우
리가 다가설 수가 있느냐 이것이 이 시대의 설 교의 과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시대의 설교에 모든 희망이 이야기 설교에 있다고 생각하지
는 않습니다. 강해 설교가 이야기식 설교의 내용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
리의 강해 설교가 좀 더 생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강해 설교의 패턴을 벗
어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림과 움직임과 변화와 리듬과 율동과 다이나믹한 변화
를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생동성이 없이는 강해 설교도 청중들을 놓칠 수 있습니
다. 시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멀티 미디어의 시대입니다.
셋째, 상대주의의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의 구체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상대주의입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의 시대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우리 앞에 어필하기 훨씬 오래 전에
금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요, 전도자였던 프랜시스 쉐퍼 박사는 이미 이런 시
대적 변화를 먼저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언했습니다.
쉐퍼 박사의 유명한 얘기 가운데 하나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현대인
들은 절망의 선을 넘어섰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쉐퍼
박사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너는 안돼. 너는 틀렸어, 그것 하면 안돼.” 하는 얘기가 똑같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불신간에 함께 절대적 가치관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말입
니다. “살인하는 것은 나쁘다, 간음하는 것은 나쁘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하면 믿
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공유하는 가치관이 있었고, 절대적인 가치관으로 받
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현대인들은 그 선을 넘어섰습니다. 가치
가 상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인하는
것이 왜 죄냐? 간음? 그것이 왜 죄야?”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질문을 제
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꼭 남녀가 함께 살아야 돼요? 남자끼리는 결혼생활 못해
요? 여자끼리는 결혼생활 못 해요? 이런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현대
입니다.
한 4년 전에 뉴욕에서 출판된 초등학교 교과서 중에 한 장의 제 목이 “my
partner”였습니다. 내가 함께 살고 있는 남자 친구, 소위 동성연애를 결혼의 한 패
턴으로 사회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이야기가 미국의 초등
학교 교과서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이런 물결이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
는 이미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
고 있고, 이런 시대의 청중들을 대상으로, 이런 신세대가 있는 가운데서 아직도 변
함이 없는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과 맞서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게 “살인은 죄입니다 회개하십시오.”하는 식의 단순한 메시
지만 가지고 설 수 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말씀이 선포하고 있는
절대적인 진리가 이 시대에 여전히 절대적일 수 있는가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 없이
어떻게 현대인들을 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설교 구성에서 제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서론과 본론을 잇
는 접속 부분에 있어서의 전환 문장, 서론에서 본론으로 전환될 때 던지는 질문입니
다. 예를 들어서 “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결해야만 합니
까?”이런 질문을 제기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끈질기게 추적
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대답이나 처방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답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논리(logic)입니다. 그것을 가
지고 본론을 구성하는 것이고, 소위 아우트라인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주보를 통해서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보면 ‘논리’가 없습니다. 왜 아우트라인을
그렇게 정했는지 제가 아무리 묵상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도대체 이 목사님
이 왜 이렇게 ‘논리’를 잡았을까, 이 논리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도대체 왜 첫
째, 둘째, 셋째가 나왔을까? 이 첫째와 둘째 사이의 연관성이 무엇일까? 왜 이런 질
문을 던졌을까? 좀 이해하려고 애를 써봐도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이해가 안 되는
데 청중들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이렇게 설득될 수 없는 자기 나름대로의 불균
형의 논리를 가지고 포스트모던 시대, 가치가 다양화되고, 상대화되고, 수없이 많은
가치가 저마다 자기의 진리성을 주장하고 나오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도 소망, 능력, 구
원, 생명이라고 큰소리치며 청중들에게 다가설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주 앞에 더 엎드리고, 더 묵상하고, 더 사고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의 검, 이 칼을 더 날카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리한 무기, 예리한
칼이 되지 않고 어떻게 이 시대 정신과 더불어 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
시대에 말씀의 승리와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 실용주의 시대입니다.
실용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실용주의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현대인들의 삶 속에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실용주의
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실용주의가 묻지 않은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소위
실용주의의 가치 체계가 침묵하고 있는 중요한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이 얼마나 진리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당한가 하는 질문은 던
지지 않습니다. 실용주의가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것
이 얼마나 나를 편리하게 해줄 수 있느냐, 이것이 얼마나 나를 유익하게 해줄 수 있
느냐, 이것이 얼마나 나에게 더 수지를 맞게 해 줄 수 있느냐?” 끊임없이 그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침묵하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 진리냐. 이것이 정당하냐
“입니다.
우리 설교자들은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관을 갖고 오늘 이 시대의 청
중들 앞에 서서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습니다 1
시간 동안 나와서 앉아 있을 만한 가치가 얼마나 있느냐를 따집니다. 5분이 아까워
서 축도를 안 받고 사라지는 현대의 청중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의 교인들이나 현대인들이 설교를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설교자들은 저마다 자기 설교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확신은 물론 필요한
것이지만 청중을 설득할 수 없는 자기 도취적인 확신은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얼마
나 내 설교에 대한 확신을 갖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확신이 청중들과 얼마나 커뮤니
케이션 될 수 있느냐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확신만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김
영삼 대통령이 확신만 가지고 일하다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까? 그 확
신을 밀어붙이는 전략과 방법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설교
라는 작업은 매우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비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싸우다가도 가끔 골목길에서 이런 소리를 합니다. “야, 지금
나한테 뭐 하는 거야? 나한테 설교하지 마.” 던 져지는 말속에 비치는 설교의 뉘앙
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인들이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주관적
확신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누군가 그러는데 오늘의 설교자들 가운데는 너무나 선
구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뜻은 ‘선’ 선천적 ‘구’ 구제 불능, ‘자’ 자
아도취증 환자라는 말입니다. 자아도취증 환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전
략이 없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검토가 없습니다. 그러면 허공
을 치는 설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도취하다가 끝나버리고 맙니다.
3. 바울의 설교
이렇게 급속도로 변천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설교로서 이 시대의 사람들
앞에, 그리고 시대 앞에 서야 합니까? 사도행전 17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
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
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
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17:1∼3)
짧은 본문입니다만 바울이 어떤 정황 속에서 설교를 했으며 어떻게 설교를 했으며
구체적으로 바울의 설교의 스타일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 부분처럼 명료하게 보여
주는 대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이런 설교와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전
도의 영향력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
매”(행 17:6)
저는 초대 크리스천들에게 붙여진 별명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러운 별명 중의 하나
가 바로 이 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던 사람들”, 번역을 매우 소극
적으로 했습니다만 영어 성경을 읽어보면 ‘천하를 어지럽히던 사람들’ 이 ‘have
turn theworld up side down(세계를 한 바퀴 뒤집어서 엎어놓았다)’로 되어 있습니
다. 1세기에 세계를 뒤집어놓았던 사람들, 초대 그리스도인들, 그 한복판에 바울이
라는 거목이 있었습니다.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어떤 설교를 했기에 우리 시
대와 아주 방불한 1세기의 시대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뒤집을 수 있었습니까? 역
사를 바꾸고 있었던 바울의 설교의 특성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첫째, 강해 설교였습니다.
2절에 보면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
지고 강론하며”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성경을 인용하지 않았습니
다. 본문을 한 번 읽어놓고 자기의 철학이나,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변증하기 위
해서 성경을 인용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강론
했습니다. 성경을 봤습니다. 성경 속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성경의 혼 속으로 들
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 저자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 영혼과 부딪쳤습니다. 그
리고 진리를 끌어냈습니다. 그 진리를 가지고 증거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강해설
교입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아직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따로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변증하기 위해서 성경을 찾고 있습니까? ‘아, 여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구나!’ 그래서 적당히 성경 구절을 가지고 뜯어 맞추는 설교를 하고 있
는데, 바울의 설교는 성경에서 출발했습니다. 성경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 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그 말씀, 생명의
말씀, 그 권능의 말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말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바로 그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강해설교의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 이토록 위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바울의 설교의 특성, 그것이 강해 설교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이 강해설교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합니다.
확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 강해설교가 우리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충실할 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만이 소망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저의 철학 앞에 실망한 사람입니다. 제 생각 앞에 좌절한 사람입니다. 스스
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의 앞으로 나아 왔습니다. 성경의 주인이신 그리스
도,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이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성경은 성경입니다. 저는 강해설교의 생명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였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
니” (2-3절). 성경을 가지고 말씀을 풀어나갔는데 궁극적인 초점은 그리스도입
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소위 복음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우리 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나를
바꾸시고, 우리 시대를 바꾸시고, 세상을 바꾸시는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살아계신 그리스도 여기에 오시는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십자가가 바로 바울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
심의 설교였습니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대부분의 설교는 소위 이슈나 제목 설교, 도덕설교입
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목사님들 설교의 대부분은 목회적 필요에 끌려 다니는 설교
입니다. “목회 캘린더가 이것을 요구하니까 나는 이것을 설교합니다.” 그런데 그리
스도가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가운데 그리스도보다 더 필요로 하는 것
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근본적 필요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아직
도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한다면 그리스도 외에 무엇을
강조한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설교 속에서 얼마나 피묻은 그리스도
가 드러나고, 십자가가 드러나고, 복음이 드러나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다
시 사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영광이 증언되고, 복음의 승리가 얼마나 우리
의 설교 가운데 선포되고 있습니까? 저는 바울의 설교, 또 바울과 그와 함께 했던
제자들의 전도가 그 시대를 바꾸었던 것은 바로 그 설교의 핵심이요, 설교의 주제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에서는 얼마나 이 예수 그리
스도가 강조되고 있습니까?
셋째, 복음 전도적 설교였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
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
나”
이 말씀에서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좇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전
도를 받고, 권함을 받고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설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복음 전도적 설교였습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님을 발견했어요. 제가 구원받았어요. 목사님, 제가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제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어요. 제가 하나님의 자
녀가 되었습니다 “ 최근에 믿지 않던 사람 가운데 설교를 통해서, 우리의 메시지를
통해서 이렇게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의 결실이 얼마만큼 있었습니까? 저는
바울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복음 전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가 숫자가 줄어든다, 위기다 하여 우리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
어 있습니다.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제발로 교회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따라
서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할 때입니다. 또 그것을 주께서 명하셨습니다. 복음을 갖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다가가려고 하는 노력, 또 우리의 설교 자체가 믿
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설교 안에 복음의 메시지가 용해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와 함께 강해설교를 하시는 목사님 한 분이 조사를 했습니다. 한국 교회 목사님
들의 주일 설교 가운데 전도적 성격을 가진 설교가 몇%냐면 통계 결과가 4%미만이라
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설교의 96%는 목회적 필요, 이슈 설교, 제목 설교에 끌려
다니고 있지 정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전도적 성격을 가진 설교는 4%미
만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부흥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시대를 끌고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제가 가끔 강사 초빙을 받을 때 “목사님, 우리 복음화 대회에서 설교해 주세요.”
라고 해서 가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제목
만 복음화대회입니다 그래서 복음화대회는 안 가기로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전도
설교하려고 가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없고 다 믿는 사람들만 와서 하는 잔치입니
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는 교회,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려는 의지
를 가진 교회, 그런 의지를 가진 목사님, 그런 의지를 가진 강단이 너무나 부족합니
다.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의 구조도 전도를 위해 바뀌어야
하고, 설교도 전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저는 바울의 설교가 그 시대를 흔들
었고 그 시대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
니다. “강해적 설교였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였다, 복음 전도적 설교였다.” 결국
설교를 제대로 한다면 교회 부흥은 저절로 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에 한국에 나와서 개척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장소는 강남이었습니다. 그
런데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까 한국의 실정도 제대로 모르고 그래서 저와 함께 개
척을 원하는 몇몇 사람들이 부탁을 해서 강남에서 장소를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열
심히 찾았습니다. 미국 교회 같은 경우는 개척할 때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많이
시작합니다. 그래서 학교 강당을 열심히 찾았는데 빌릴 곳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공립학교는 강당이 없고 있어도 안 빌려주고, 또 몇 군데 있었는데 보니까 이미 다
른 교회가 쓰고 있었습니다. 빌릴 데가 없었습니다. 전혀 없었습니다. 몇 달을 찾았
는데 돈도 없고 개척할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남에서 자꾸 내려오다 보니까 제
친척 되는 분이 분당의 고속도로 건너편 수지 쪽에 선경 마그네틱 이라는 강당이 있
는데 강당 5층에 조그마한 복지관 강당으로 안내했습니다. 한 3, 4백 명 들어가는
강당이 있는데 그것을 빌릴 수가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의 산
속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지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기 전이었습니다. 산
속에 덩그러니 공장이 하나 있고 5층에 강당이 있고 주변에 인가는 하나도 없고, 물
론 고속도로 건너편에 가면 분당이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분당과 상당히 떨어져 보였
습니다.
나와서 거기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여기에서 과연 되겠느
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아무래도 그쪽으로 인도하
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카세트 테이프를 만드는 공장이니까 화학 물질 냄새가 심
히 코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5층도 계단 하나하나가 얼마나 가파른지 모릅니다.
제가 첫날 예배를 드리면서도 과연 여기에서 교회가 되겠는가 싶어 나도 시작하면서
확신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가지고 있는 것은 성경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
나 말씀을 가지고 성실하게 설교를 했습니다.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사람들이 늘어
났습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1년 반 동안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 반만에 정확하게 어른 출석
이 천 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동원 목사의 이름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이름 가지고 한두 번은 오겠죠.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모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지독한 악취 냄새를 맡으며 5층까지 걸
어 올라올 때 불평을 하면서 올라옵니다. 그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올 때마다 “내가 이 놈의 교회 다시 오나 봐라,” 하고 생각했는데 설교 듣고 축
도 받고 나면 “다시 와야지.” 하면서 돌아간답니다. 그런데 또 그 다음 주일날 교회
에 오면서 “내가 이 교회에 다시 오나 봐라.” 그랬다가 또 설교 끝나면 “다시 와야
지.” 이것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제가 숫자나 제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런 의도는 없습니다. 단지 개척을 하면서도 저에게 유일한 무기가 있었다면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꼭 한두 사람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래서 자꾸 커갔습니다. 우리가 1년 반만에 분당으로 옮겼는데 지금 지하
에서 전세로 있는데 그곳도 좋은 장소는 아닙니다. 도처에 기둥이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강대상에 서 있는 저를 바라볼 수 있는 코너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수
지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옮긴 것입니다. 거기에 서 다시 1년 반이 지나
갔습니다. 3년이 되니까 정확하게 장년만 3천6백 명이 모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씀에 갈한 사람
들, 말씀에 목마른 사람들,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생명과 안식과 소망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희 교회 같은 경우에도 많은 신도시 교
회처럼 믿는 성도들의 이전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목숨을 걸고 몸부
림치고 뚫고 나가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느냐 입니다. 내 설교가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겨냥하느냐, 그들에게 소망 있
는 설교를 던질 수 있느냐 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옵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커다란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4. 강해설교의 특징
어떻게 강해적 설교를 하느냐? 이 시간은 전체적인 도전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한 분야 분야를 자세하게 언급할 수 있는 시간은 없습니다. 강해설교가 아닌 것이
무엇이냐부터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본문을 읽어놓고 “1절은요, 2절은요, 3절은.
4절은” 하면서 한 구절을 간단 간단히 코멘트하고 지나가는 설교는 강해설교가 아닙
니다. 제가 생각하는 강해설교의 이론은 적어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해설교 하면 그런식으로 성경 구절을 코멘트 하는 것으로 생각합
니다. 영어로 ‘러닝 코멘트리 프리칭’ 입니다.
이런 설교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작품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리듬이 없
습니다. 그냥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지나갑니다.
핵심이 없습니다. 목표가 없습니다. 설교에 뚜렷한 지향점이 없습니다. 한 중요한
메시지, 그 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 앞에 성도들의 가슴과 영혼이 부딪칠 수 있는
파괴력이 없습니다. 부산합니다. 여러 가지 얘기하다가 끝나버립니다.
또 본문을 정하고 거기에서 몇 가지 아우트라인을 뽑은 다음에 적당히 그것을 조
합시키는 설교, 그것도 강해설교가 아닙니다. 어떤 틀에 있어서는 강해적 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본문과 아우트라인을 가지고 예화 몇 가지 들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종합하는 짜집기식의 설교도 강해 설교는 아닙니다.
저는 강해설교는 본문의 텍스트의 영혼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깊
은 곳에서 본문의 기자가 성령님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우리에게 말했던 목소리, 그
기본적인 성경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강해설교는 혼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주석식 설교도 강해설교가 아닙니다. 아주 충실하게 주석을 했습니다. 본문의
혼도 잘 끄집어냈습니다. 그러나 주석식 설교의 가장 커다란 약점은 적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적용이 없으면 강해 설교가 아닙니다. 저는 강해설교의 가장 위대한 특성
은 바로 적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 주셨던 말씀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
리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오늘 이 시대의 교인들이 어떤 삶의 자리에 있습니까?
명예 퇴직하고, 조기 퇴직하고, 황당하게 퇴직하고 인생의 고민과 좌절을 끌어안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2천 년 전의 이 말씀이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되고, 변
화가 되고, 능력이 될 수 있습니까? “구체적 적용을 상실하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
다.” 이것은 스펄전이 늘 강조했던 점입니다.
강해설교에 있어서 다섯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정의를 하든 간에 이
다섯 가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본문으로서 자연스러운 단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그 부분을 충실하게 전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으니까 제대로 강해설
교를 하려면 본문의 텍스트로서 자연스러운 단락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본문에 대한 해석학적 성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실한 생각으로 본문의 내용을 깊이 파고 들어간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해석학
적 성실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설교에 결합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 주제를 중심으로 아우트라인이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 결합력을 갖습니
다. 이 설교를 통해서 강조하려고 하는 핵심적주제, 메인 아이디어, 센츄럴 아이디
어,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아우트라인이 논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가 입
니다. 이것 이 강해설교의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넷째, 설교에 흐름과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논리학에서 말하던 기, 승, 전. 결이 분명해야 합니다. 설교에 흐름이 있
어야 하고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방향에 있어서 특별히 결론 부분이 클라이맥스가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설교들이 보면 결론에 가서 맥이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설교가 움
직임을 상실하게 됩니다. 설교는 계속해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론이 클라이맥스가
되는 설교, 거대한 도전 앞에 그들의 가슴이 터지고 그들의 삶을 주 앞에 바치는 헌
신과 결단 속에서 그 자리를 떠나게 할 수 있는 설교여야 합니다.
다섯째, 삶에 대한 실제적 적용이 있어야 합니다.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세계 복음화하십시다.” 하고 끝났다고 가정
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전 지구의 크리스천들이 자기 주변에
다섯 사람만 책임지고 전도할 수 있다면 전 세계는 다 복음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이번 주간에 여러분 주변에 다섯 사람을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
까? 그리고 그중 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이 복음의 능력과 복음의
도전 앞에 직면하게 할 수 있다면 세계 복음화는 당신을 통해서 시작될 수 있습니
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 적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허공을 때
리는 내용입니다. 가장 실제적인 적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강해 설교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강해설교의 축복은 말씀의 능력을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지식 자랑이나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포스트모던 시대, 가치가 상대화된 시대, 절대적 가치를 잃어버
린 시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적 가치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절대적
가치를 찾습니다.
제가 예언하고 싶은 것은 점점 가치가 상대화될수록 이단이 유행한다는 사실입니
다. 이단은 절대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틀렸지만 절대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그들의 문제가 당장
에 해결될 것 같은 환상을 가져다줍니다. 거짓된 환상이지만, 거짓된 확신이지만 소
위 절대적 목소리를 가지고 이단들이 다가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설교에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 권위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목사님이 정말 성경을 성경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는 확신만 있으면 받아들입니다. “야, 오늘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건축 헌금이 필요해서 하시는 말씀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면 설득할 수 없습
니다. 평소에 그 확신을 주었을 때 “정말 우리 목사님은 객관적으로 성경에 접근하
시고 성경을 성경대로 풀어서 우리에게 증거 하고 있다. 이것은 목사님의 메시지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라는 확신을 가지면 권위를
받아들입니다.
둘째, 성령의 역사를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을 나누는 이원화가 한국 교회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종,
성령의 종, 물의 종, 불의 종이 따로 있는 것처럼 능력을 행하는 사람 따로 있고 말
씀을 전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말씀
답게 강조하다 보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제가 최근에 중보 기도 세미나를 많이 하러
다닙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보다보니까 기도를 강조하게 되고 그러니까 무릎을 꿇게
되고 말씀대로 하려고 애쓰다 보니 까 말씀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과
성령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강조할 때처럼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설교자를 성숙하게 합니다.
강해설교를 하다보면 연속 강해설교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평소에 다
루지 않았던 본문 가지고 씨름도 해보고 다루지 않았던 주제에 대해서 설교도 하게
되고 그래서 연구하다 보면 자 신의 스케일이 넓어집니다. 너무 제목 설교만 하다보
면 자기 하고 싶은 소리만 하게 됩니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런 분은 잠깐 동안
굉장한 인기는 끌 수 있지만 그 목회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강해 설교자에게 있어
서는 성경의 폭만큼 설교가 넓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설교자가 자라나고 자기
자신이 성숙합니다, 이것이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넷째, 성도들을 성숙하게 합니다.
정말 성도들이 기다리는 양식을 제공합니다. 살아있는 양식, 거룩한 양식, 생명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목사가 그들에게 양식
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무엇 을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앵무새를 한 마리 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앵무새 가게에 가서 이렇
게 말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앵무새를 하나 사고 싶은데 그런 앵무새 있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마침 우리 가게에 아주 말을 잘하는 앵무새가 하나 들어왔는데 사가
시죠.” 그래서 앵무새를 가지고 자기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앵무새에게 아무리 말
을 시켜도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새 주인에게 가서 따집니다. “아니, 당신이 이
앵무새 말을 잘 한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합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요. 당
신의 집이 너무 적적하지 않습니까? 우리 앵무새 가게에서는 언제나 음악을 듣게 해
주는데 아마 음악이 필요해서 그런지 모르니까 새장 옆에 음악을 틀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 집에 가서 모차르트 음악을 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말을
시켜봤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안 합니다. 또 찾아갔습니다. 가게에 가서 “아직도 말
을 안 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요. 혹시 너무나 운동을 안 시
켜서 그럴 지 모르니까 운동을 시켜 보시죠. 이번에는 사다리를 설치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우리 집 새장 안에는 본래 사다리가 있었는데.”그래서 가서 사다리를
만들어놓으니까 앵무새가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시켜 봤습
니다. 그래도 말을 안 합니다. 또 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럴 리 가 없는데요,” “우리 앵무새장 안에는 사다리뿐만 아니라 그네도 있었는데 그
네도 한 번 설치해 보시죠.” 이번에는 가서 사다리 옆 에 그네를 설치했습니다, 앵
무새가 사다리를 몇 번 타보다가 내려오더니 얼마 안 있다가 죽어 버렸습니다. 너무
화가 나가지고 주인을 찾아가서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그냥 죽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느냐고 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한 마디를 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했는데요? “밥을 주어야 말을 하지” 그
러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밥은 안 주고 계속 다른 일만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우리의 목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즘 보면 프로
그램, 예배 패턴의 변화, 경배와 찬양을 많이 강조합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
다. 경배와 찬양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이 살아나는 것, 찬양을 통해서 하
나님의 가슴을 체험하게 되고 성도들이 찬양을 요식적인 행위로 알지 않고 하나님의
영혼 속에 들어가서 함께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된 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
니다. 그런데 경배와 찬양에서 말씀이 사라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경배와 찬양 집회에 가면 제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목사
님, 설교는 20분만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0, 50분 동안 경배와 찬양하느라
소리지르다 보면 지쳐서 설교 시작하자마자 입신에 들어갑니다. 찬양이 회복되는 것
은 좋은 데 말씀이 뒷전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영광, 말씀의 권위를 회
복했던 개신교의 영광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는 항상 극단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는 여기에 또 다른 위험성 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회복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설교에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합시다.
강해설교에도 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해설교가 설교의 유일한 패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강해설교의 비판 가운데는 강해설교를 하다보면 너무
메마르고, 흥미가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것은 강해설교라는 형식이 설교를 메마
르게 하고 흥미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하는 사람 자체가 메말라 있어서
그 설교가 메마른 설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삶이 풍성하면 무슨 설교를 하
든지 풍성하게 됩니다. 설교에 있어서 형식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강해설교는 시사성과 현실성이 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
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해설교처럼 시사성이 강한 설교는 없습니다, 강해설교의
영역이 얼마나 넓습니까. 예언서를 설교하려면 사회의 불의와 더불어서 대결하는 메
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사성이 강합니다. 오히려 저는 강해설교의 장점
은 설교를 연속으로 하다보면 “이 대목에 왔으니까 목사님이 그런 설교를 하지,” 하
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고린도후서 강해설교를 하다가 9장
에 헌금 얘기가 나와서 헌금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순전히 목사님이 우리를 가
르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구나 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른 의도를 읽
지 않습니다. 제대로 강해설교를 하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시사성, 현실성을 더 강
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해설교를 비판할 때 게으르게 한다.
본문 가지고 적당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제대로 하려면 본문을 가
지고 씨름을 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주일 아침 설교에 관한 한 10시간 미만을 소모한 적이 거의 없습니
다. 100%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바쁘고 쫓기다 보면 조금밖에 준비를 못
하고 설교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시간 이상은 주일 아침 설교를 붙들고
씨름을 합니다.
5.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저는 기독교의 독특성이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보통 전도할 때도 예수 믿으라고 하
면 “저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습
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간 것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안 믿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저들을 없애기 위함
이었습니다. 바울의 무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자기가 믿고 있었던 하나님이 육신
을 입고 이 땅에 오시사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바울이 바울 되기 전의 문제였으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강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종교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 설교에서 막연히 하나님만
강조하고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강조되는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전에 그
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아닌 것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하라고 하면 성경 아무 부분에서나 억지로
그리스도를 끄집어냅니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우화적
접근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경 읽다가 빨간 것만 보이면 다 예수님의 보혈이라고 말
합니다. 여호수아서 읽다가 붉은 줄을 창문에 내린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구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우화적 해석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까? 무슨 신학적인
근거로 그런 설교를 합니까? 이천 년의 기독교 설교를 망쳐놓은 것이 이런 우화적인
설 교였습니다.
이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정탐
꾼을 보내셨는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 이 여인을 통해서 그들을 잘 준비
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준비는 함께 있습니다. 그
준비는 우리가 예수 믿기 전부터 함께 했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구속의 사역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속의 사건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입니까? 제가 책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브라이언
채플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라는 책을 썼는데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인간 타락의 상태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브라
이언 채플 박 사는 “FCF”라고 부릅니다. “follen condition focus(타락한 상태에 대
한 강조)”인간의 타락성, 죄성에 대한 강조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구
속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구속이 필요합니다. 은혜의 필요
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가 구원이고 희망인 것을 강조해야 합니
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로서 브라이언 박사는 세 가지를 강조합
니다. 인간의 타락성에 대한 강조, 구속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 예수 그리스도가 희
망이고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서 일탈하고 빠져나가기 좋은 형태 가운데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기 설교를 하다 보면 인물을 본받으라고 합니
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본 받으십시다. 요셉을 본받으십시다. 인물을 우상화시켜 놓
고 막연히 그 인물의 도덕적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끝나기가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물 설교나, 전기 설교를 할 때 그들도 나와 똑같이 얼마나 죄인인가 또 그들에게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가를 강조하고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
서 십자가 앞에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결론이 있을 때 우리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로 이끌어져 나갈 것입니다.
많은 도덕적 설교들은 하라, 하지 말아라 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우리, 하지
못하는 우리에 대한 부분이 강조되지 않는다면 구속의 사역이 그 설교를 통해 살아
나지 못합니다.
시사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계절 설교를 할 때 캘린더를 따라가
다 보면 자칫 잘못하여 단순한 강조점으로 끝날 가능성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
다.
계절 설교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계절 설교를 합니다. 예를 들
어 5월 둘째 주에 어머니를 위한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부분에 강조한 것은
그것입니다.
“어떻게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룻기 1장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어머니와 삶을 함께 나누십시오. 어머니의 필요를 공급하십시오. 어머니의 가치
관을 계승하십시오. 룻의 시모 나오미에 대한 순종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아마도 이 여인은 시집 와서 그 시어머니나 시아버지나 이 가정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룻에게 새로운 소망,
새로운 삶의 빛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동서인
오르바가 떠났어도 룻만은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머니의 하나님이
룻의 하나님, 자기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위대한 신앙을
가진 어머니가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어머님의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으
로, 그 어머님의 하나님을 당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십시오. 만약 당신의 부모님이
이런 하나님을 모르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는 그분들에게 나
의 하나님이 그분의 하나님이 되도록, 나의 구세주가 내 어머니의 구세주가 되 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어머니에게 전하셨습니까?”
“어머니를 사랑하십시다.” 하고 도덕 설교로 끝난다면 그것이 한국전쟁의 메시지
와 뭐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왜 중요합니까? 네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약의 메시지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도 중요 하지만 구약이 완성
한 신약의 메시지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신약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초대교회의 진정한 회복을 알려면
초대교회의 메시지가 그리스도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가 회
복되지 않으면 초대교회다운 교회의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설교자의 정체성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진정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면 그 소명 앞에 응답할 때 이 시대
의 설교자의 진정한 정체성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네 번째,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만이 인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도
덕적 설교는 치장만 해줄 뿐입니다.
6. 전도적 설교
전도적 설교가 희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전도 설교를 안 합니까? 제가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
니까 믿는 성도들의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도 설교를 하면 믿는 성도들이 구령의 열정을 갖게 됩니다. 또 그 설교를 통해서
구령의 메시지를 배우게 됩니다. 또 불신자를 교회에 데리고 오고 싶은 동기가 부여
됩니다. “목사님은 항상 전도 설교를 하시니까 우리 이웃 사람이 와서 들어도 좋겠
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전도 설교를 안 하는 분들 중에 차원이 낮은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설교가 심오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령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사
역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 설교를 하는 경우는 총동원 주일만 하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전도 설교가 총동원 주일에만 할 설교입니까? 전도 설교를 안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메시지를 가지고 불신자를 대면하는 데 두려
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사탄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사탄
이 못 하게 합니다. 그러나 전도 설교도 해야 합니다. 복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구원과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전도적 설교 요소들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보편적 상태와 필요가 강조될 것, 죄인의 상태와 필요가 강조될 것, 응답
으로서의 복음이 강조될 것, 방어적이기보다 선포적이 될 것, 그리고 결신에 목표를
둘 것입니다.
전도적 설교가 왜 중요합니까?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적 교회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
독교의 게토화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역사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워싱턴에서 살 때 거기 유명한 축구팀이 있었습니
다. 레스킨스라는 미식 축구팀이 있는데 그 팀에서 최근에 은퇴했습니다만 조 깁스
라는 명감독이 있었습니다. 워싱턴에 살고 있는 교포들은 그가 아주 훌릉한 크리스
천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을 조 집사님이라고 붙였습니다. 평신도인데 설교
도 아주 잘 하고 간증도 하러 다니십니다. 어떤 모임에 갔더니 그가 간증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적절한 간증이었습니다.
자기 친구 한 사람이 개를 기르는데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와서 보니까
저녁 무렵 자기 집 개가 어두컴컴한 데서 뭘 씹고 있었습니다. 뭘 씹나 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까 바로 옆집에서 애완용으로 기르는 토끼를 씹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집
개가 옆집 애완용 토끼를 씹고 있는 것을 봤으니까 당황스러웠습니다. 사람이 ‘당황
하게 되면 비이성적 행동을 하게 됩니다. 얼른 토끼를 빼앗아 가지고 자기 집에 뛰
어들어가서 수돗물을 틀고서 막 씻었습니다. 비누로 씻어주고 향수를 뿌리고 분을
발라준 다음에 조금 더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살짝 밖에 나가서 옆집에 가보니까 토
끼장이 그대로 있기에 살짝 다시 토끼장 속에 토끼를 원 위치시켜 놓았습니다.
시치미를 딱 떼고 그 이튿날 오후에 오니까 옆집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잔
디밭을 왔다 갔다 하더래요. 시치미를 딱 떼고 무 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으니까
“우리 집에 이상한 일이 어제 일어났어요. 우리집 토끼가 한 사흘 전에 죽어서 땅
속에 파묻어 놓았는데 어떤 놈이 토끼가 끄집어 내가지고 목욕을 시켜 가지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려 가지고 제자리에 갖다 놓았어요.”라고 했답니다.
조 깁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하는 일이 그런 일이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 조금 더 나은 인간,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도덕적인
설교, 분 바르고, 향수를 뿌려주는 일밖에 못 하고 있다.”
도덕은 대답이 아닙니다. 예수 안의 생명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
시 사신 그리스도 안의 생명이 복음의 강조와 선포 없이 도덕적인 설교만 가지고는
이 시대를 바꿀 수 없습니다.
강해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전도적 설교만이 영혼을 구원하고 새로운 생명
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해답은 거기에 있습니다.
설교의 영광을 회복합시다. 설교다운 설교의 영광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
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열정과 삶을 드리는, 또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새로운
능력을 받는 놀라운 세미나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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