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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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

베드로전서 2:17 NKRV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누가복음 18:15–17 NKRV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잼민이라는 단어를 요즘도 쓰고 있는가? 잼민이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까 이렇다. 201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에서 유행한 표현으로, 주로 초등학생 또는 어린 친구들을 부르는 말이 ‘잼민이’다. 그들의 특징은 말투가 ㅇㅈ? ㄹㅇㅋㅋ, 이거 실화냐 등 인터넷 밈을 많이 사용하고, 마인크래프트나 로블록스, 브롤스타즈 같은 게임을 좋아하고 유튜브를 좋아해서 크리에이터의 말투도 곧잘 따라한다. 그래서 밈 중독의 특징도 가지고 있다. 예전에 말왕이라는 유튜버가 ‘장충동 왕족발 보쌈’이라는 밈을 유행시켜서 초등학생들이 걸어다니면서 따라하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된다. 또 요즘 유행하는 말 중 하나가 ‘느좋’(‘느낌 좋다’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전도사님도 양은서 선생님이 알려주셔서 배우게 되었다. 최근에는 Chill guy가 유행해서 노래랑 캐릭터로 유행했었다. Chill guy는 “가끔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유를 즐겨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바쁘고 정신없는 큰일난 상황에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사게 된 밈이 있었다. 그렇다면 잼민이라고 불리는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가? 그렇다. 존중을 받는다기 보다는 무시를 당하는 것이 훨씬 많다. 그래서 잼민이라는 표현과 예전에는 초딩이라는 단어가 어린 아이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이야기하는데,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어린 아이가 가면 어떤 말을 하는가? “애들은 가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애들은 와라”라고 다 큰 성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을 읽어보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만져 주심을 바라고 누구를 데려오는가? 어린 아기를 데려온다. 이 장면 너무 귀엽지 않은가?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는가? 어린 아기를 데려온 사람과 부모들을 혼내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았을 때, 어린 아기를 데려온 부모의 마음이 확 느낄 수 있다. 당시 1세기 고대로마 시대에 열악한 환경에서 신생아와 어린이 사망률이 아주 높았다. 5살까지 살아있을 확률이 극도로 아주 낮았던 이유로 당시 평균 수명이 25-35세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우리 시대처럼 의학이 발달하지도 않아 감염병에 취약했다. 유아세례가 등장하게 된 배경도 어린 아기들이 사망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정식 의례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양육하겠다는 부모의 결단이기도 하다. 또 어린 아이들을 생각해볼 때 그들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어떻게 되는가? 지위가 아예 없다고 봐야한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는 일에 귀중한 시간을 쓰시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꾸짖었을 것이다. 당시 어린 아이의 지위는 어땠냐면 그들은 강한가 약한가? 지극히 약한 존재였다. 또 그들은 일을 하기에 적합한가? 아니다. 그들은 일할 능력, 경제력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어린 아이는 부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 눈에는 쓸모없는 존재,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우리 한국에서도 보면 어떤가? 어린 아이들을 존중하는가 아니면 무시하는가? 보통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다는 사람에게는 존경과 예의를 차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린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이 분명하게 엇갈리는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어린 아기를 데려오는 것을 꾸짖었는데, 예수님은 아주 혁신적인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 18:16 NKRV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의 것이라고 하는가?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누가 없다는 이야기인가? 어른들이 없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른들은 부모가 필요한가? 아니다. 부모를 떠나서 독립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은 혼자서 살아갈 경제적인 능력이 있다. 부모가 없이도 자신이 가정을 꾸려서 책임을 지며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을 어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거치른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다보니 점점 무엇을 잃어버리는가? 점점 순수함도 잃어버리고 현실을 자주 마주하다보니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어릴 때보다 현저히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현실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깨달아지게 때문에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마냥 순진하게 살다가 호되게 당하는 세상이기에 사람들에 대한 신뢰하는 태도보다는 경계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어린 아이들의 특징이 어떤가? 그들은 절대적으로 누가 필요한가? 부모님이 없으면 안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어서 오직 부모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돈을 벌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질 수도 일을 할 수 없는 아예 능력이 없는 존재가 어린 아이들이다. 누가 이런 이제 막 겨우 일어설 수 있는 어린 아이를 고용하겠는가?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세상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순수하다. 그래서 현실감도 아예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해피엔딩을 늘 꿈꾸고 권선징악을 좋아하며 세상을 따뜻한 꽃밭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들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런 순진한 마음 때문에 부모를 무한 신뢰하고, 사람들에게도 경계하지 않고 순순히 쉽게 따라가는게 어린 아이의 특징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유괴를 당하기 쉽기 때문에 부모들은 반드시 부모 이외에 어떤 사람이 따라가자고 하더라도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교육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너희는 영적으로 어른이냐, 어린 아이냐는 것을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어른은 이렇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굳이 내 인생에 하나님이 없어도 알아서 잘 살거고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이 살아간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뭔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이 노력해야 그에 따른 보상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영적으로 어린 아이는 하나님 없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날마다 고백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좋은 것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기대하며 하늘 소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어린 아이는 자신이 구원 받을만한 어떠한 자격도, 능력도, 공로도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며 살아가기에 날마다 그 은혜에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바라보실 때 모든 사람이 어떻게 보일까? 하나님의 시선으로는 나이가 많든 적든 마치 신생아처럼 우리 모두를 바라보신다. 신생아에게 능력이 있는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교만한 것인가?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이렇게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누가복음 18:17 NKRV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보게 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 나라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씀인가? 이 말씀은 두 가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과 원어에 가깝에 번역을 다시 하자면 “하나님 나라를 누군가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처럼 영접하지 않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번에 전도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설교했던, 환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예쁜 구석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신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구원해주셔서 그 은혜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 은혜을 알고 받고 누리고 있는 우리가 사람을 급을 나누고 누구는 친하게 지내고 누구는 선을 그어버리는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거저받은 은혜에 대해 잊어버린 사람과 같은 것이다.또 새로 우리 공동체에 처음 온 사람을 환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된 우리에게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당신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거저받은 사랑과 은혜에 대해 합당하게 사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베드로전서 2:17 NKRV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여기서 ‘뭇 사람’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교회 바깥에 있는 믿음과 신앙이 없는 불신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여주면서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해 최대한 예의 바르고 정중해야 한다. 세상의 사람들의 단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면서 그들이 가진 고유의 장점들(성품이나, 일하는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울만한 점들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것에 동의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에 있어서 철저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완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무례를 느끼지 않을만큼의 말로 부드럽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교 선배나 회사의 부장님이 술을 마시라고 권하면, “저는 기독교인이라서 안먹습니다!”라고 하지말고, “냄새만 맡아도 울렁거리고 토나올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며 상황을 최대한 유쾌하게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속한 학교나 사회에서 사람들이 불의를 저질러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직하기를 힘써야 한다. 세상에서 살다가보면 정직하게 살면 손해보는 것이 분명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며 정직하면서 살아갈 때, 불법이 드러나는 순간 그 정직이 나를 지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한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치고 박고 싸우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너무 우스운 모임이 되기 쉽상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연합되어 있는 줄 아는가? 서로 사랑하심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래서 삼위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우리를 누구의 형상으로 지으셨는가?
창세기 1:26 NKRV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하나님이 사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그 형상과 모습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는 그 모습으로 우리의 형상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우리가 서로 사랑함을 통해 무엇이 회복되어져가는 것인가? 서로 사랑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조금씩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이 나의 생명까지 줄 만큼 사랑하기에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누구에게 사랑을 달라고 기도해야하는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원수같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여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실 때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 사랑이 어려운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부어주실 것이다.
다음으로 베드로서에서는 누구를 두려워하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 다음으로 왕을 존대하라고 존중하라고 한다. 하나님께는 사랑과 두려움으로 경외하지만, 왕에게는 그러한 뉘양스로 말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시대에서는 황제를 숭배하는 사상이 만연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우상숭배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왕을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왕과 지도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상의 왕과 지도자를 누가 세우시기 때문인가?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왕이든지, 대통령이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믿고 그들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어떤 지도자가 세워졌든지 간에, 다 하나님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국가의 지도자가 정치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도자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더이상 등장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가 왕인가 대통령인가에 따라서 역사가 바뀌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역사가 흘러갈 것이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에 들던지, 들지 않던지 간에 어떤 대통령이 되든지 그의 명령을 따르며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따르지 않을 권리가 있다. 예를 들어, 비상상황을 제외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막고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라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은 서로 존중하고 누구든지 환영하고 환대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하기를 바란다. 어린 아이들처럼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고 하찮게 보이는 누군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 조건없이 먼저 인격적으로 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존중하기를 원한다. 전도사님도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교회 아이들은 자주 얼굴을 보니까 편안하게 반말을 하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고마운 부분이 있으면 웃으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라. 우리 공동체가 서로 존중하고 누가와도 반갑게 환영하며 예의를 지킨다면 우리 공동체에서 얼마나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존경하고 존중하며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할 때 반드시 세상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을 확신한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제자된 모습으로 삶이 되어져 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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