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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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34–36 NKRV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고난주간이 다가올수록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요?
늙고 병든 육신의 모습으로 서서히 한 걸음씩 다가올까요?
아니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한순간에 성큼 다가올까요?
어떤 경우이든 당당하게 죽음을 맞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죠.
여러분~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당해본 사람들은 알꺼에요.
내가 아픈 것과 남이 아픈 것은 천지차이 입니다.
우리가 병문안 가서 위로 하다보면 어떤 말을 합니까?
“힘내 친구야. 이까짓 질병 쯤 아무것도 아니잖아. 넌 이겨낼 수 있어.”
그런데 막상 그 말을 듣는 당사자는 어떻습니까?
너무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속으로 계속 생각할 겁니다.
“니가 아파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하게 비교하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박해자들에 의해 끌려 나와 독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서 태연했습니다.
잔을 들지 않겠다고 저항하지 않았으며,
타협을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당당히 독배를 들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음 앞에 어떤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을 마주했던 장면의 정황은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기도하시려고
겟세마네 동산을 올라가십니다.
죽음을 당하기 바로 전날 밤,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처음 읽었을 때는 다들 이런 생각을
한번쯤 해보셨을 것입니다.
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마음을 정돈하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면서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는지
하나님의 일을 허투로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시겠구나.
이제는 내가 때가 되었으니 이 잔을 마시겠나이다.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고, 다짐하고 결단하려고
기도하러 가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은
우리를 너무도 놀랍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무 고통스러워 하며
굉장히 제자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34 NKRV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 지금 굉장히 힘드니깐 너네는 나를 위해 쉬지말고 기도해.”
물론 힘드니깐 기도해달라고 기도요청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한 시간쯤 기도하고 나오시더니
졸고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화를 내십니다.
“너네 너무하지 않니? 어쩌면 그렇게 나를 위해
1시간도 깨어서 기도해줄 수 없냐?”
이렇게 다그치십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한테 기도해야합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여러분에게 왜 기도안하냐고.
한시간도 기도 못하냐고 뭐라고 한 적 있나요?
혹시 누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1시간도 기도 못하냐고
화를 내서 혼나신 적이 있나요?
보통은 기도 해야된다고 말은 많이 하지만,
기도를 한시간 이상 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고,
심지어 한밤 중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고민이 있어서 힘들다고만 했지
정말 당장 내일 죽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음에 이르는 고민’을 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마가복음 14:36 NKRV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아빠, 아빠는 다 할 수 있잖아요.
꼭 내가 이 잔을 마셔야 됩니까? 나 정말 하기 싫어요.
그래도 아빠가 원하면 내가 할게요. 네, 아빠...”
이게 죽음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놓고
소크라트스와 예수님을 많이 비교해서 말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태연히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처럼
주님께서는 더 당당하게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으셨을까요?
본론 2
소크라테스와 함께 유명한 철학자로 알려진
‘쇠렌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실존철학의 창시자라고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는 어렸을 때
가난한 양치기 소년으로 살면서 신을 저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인이 되어 결혼했는데,
아내가 폐렴으로 2년만에 사망하자
그는 자신이 신을 저주했기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이 닥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내가 죽은 지 4개월 만에 하녀인 안네와 재혼하여
쇠렌 키에르케고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신을 저주한 것과 아내 사망 4개월만에
하녀와 재혼한 것을 평생 용서받지 못할 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34세 전에 모든 자식이 죽을 것이라”
스스로의 망상에 빠져,
아들 쇠렌을 외부 위험으로부터 보호가기 위해
물리적 격리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들 쇠렌이 외출하기를 원하면,
아들의 손을 잡고 방안을 거닐면서 산책의 즐거움,
인생 이야기 등을 들려주면서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런 불안한 죄의식은
아들 쇠렌의 삶을 실존 체험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죽음에 이름은 병’이라는 책입니다.
여러분,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일까요?
암이나 뇌졸증? 또는 코로나와 같이 세상을 휩쓴 전염병일까요?
아닙니다. 심지어 죽음 자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한 죽음 자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세속적인 고뇌들.
곧 가난과 재난, 고통과 번민, 슬픔과 원한 같은 것들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합니다.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괴로움도 정답이 아닙니다.
그러면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절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절망이란, 사업을 하다 실패했거나,
선거를 했는데 떨어져서 느끼는 좌절이 아닙니다.
사랑에 실패해서, 작별로 인한 슬픔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전능자 하나님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능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절망을 경험할 때,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무기력한 나, 그래서 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소외감.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라고
유명한 철학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존재를 하나님으로부터 발견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창시한 실존주의의 핵심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거에요.
말이 어렵죠? 쉽게 말해, 나의 본질 자체보다
내가 실제로 존재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과거에는 철학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했냐면
본질이 실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말인데, 쉽게 말해 영혼육을 어떻게 이해했냐하면,
영이 진짜고, 혼과 육은 영을 반영하는 껍데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이 중요한거에요. 본질이 중요한거에요.
우리의 속사람, 영혼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결정되지,
껍데기, 육체의 만족, 쾌락, 성공 이런거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그런데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주의 철학을 만들어내면서
실존, 곧 육체가 중요하다고 주장한거에요.
영도 중요하지만, 결국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 우리의 본질이 결정된다는 거에요.
여러분, 어떤게 맞는 말일까요?
둘다 맞는 말이죠. 영도 중요하고, 혼도 중요하고, 육도 중요합니다.
사실 이세상 학문이라는 것이 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억압 속에서 폐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방에서 사고하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세상과 단절되었고,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 단절된 절망을 겪으면서,
결국 그 절망감이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어떻습니까?
훨씬 더 이전의 사람입니다.
그는 본질이 더 중요했습니다.
자신이 믿는 진리, 가치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위해서 육체의 죽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청난 육체의 고난을
겪어야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소크라테스처럼 독배를 마시고 한번에 죽을 수 있는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끔찍하다고 알려진
십자가 형을 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온 인류의 죄값으로 대신 치르시면서
여러가지 옵션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처럼 한번에 죽는 죽음도 있을 것이고,
같은 사형법이지만, 여러 시대마다 있는 사형법 중에
조금 덜 고통스러운 방법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인류의 희생물로 삼으면서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고통을 함께 겪어야 한다면, 가장 고통스러운 그 길을
예수님은 걸어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육체의 고통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 감정적 고통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께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신던 그날 밤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또한 군중과 병사들로부터 조롱과 침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를 지지 않았음에도
우리를 위해 이런 모욕과 굴욕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외치며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로
극도의 감정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전까지
어떤 어려움과 고난 중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40일간 금식하시고, 사단이 유혹할 때에도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위일체 안에서
완전했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단절을 경험하자
극도의 감정적 고통을 느끼시며 하나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바로, 영적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되셨습니다.
이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제가 서두에 고통이란 것은 상대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절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프기 전까지는 내가 정신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직접 경험하면 말이 달라집니다.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 해보셨나요? 하니까 어때요?
TV에서 가끔 연예인들이 화생방 훈련 한번하고
난리치는거 다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옆에서 같이 TV보는 아내는 절대 이해 못합니다.
왜 저렇게 난리냐고?
가스 조금 들어마신것 같지고 엄청 오버한다고 비아냥거립니다.
꼭 화생방 들어가보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경험했던 죄를 짊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한 예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저주를 내리면
악귀가 사람이나 동물 몸에 붙게 되고,
어떤 사람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다른 예시일 수 있는데,
영적인 고통이란 부분에서 조금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 지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마귀, 사탄의 존재가
예수님을 완전히 뒤덮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통이 얼마나 될지 이해가 되십니까?
말로 다 표현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 모든 악한 영들과 함께
무저갱,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마귀, 사탄의 본질은 지옥에 있습니다.
이미 게임이 끝난거에요. 사탄이 졌어요.
다만 그들의 껍데기, 부하들만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아직 세상 권세가 마귀에게 속해있어서, 소유권 이전이 안되었어요.
그런데 그 소유권도 계약 만료기간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주인이 지옥에 있기 때문에 더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이름만 부르면,
사단 마귀가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왜요? 이미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런데 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이
모든 사단, 마귀, 죄의 권세를 다 짊어지시고,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거에요.
그러면서 하나님과 완전한 분리를 경험한 것입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하나님이 잠깐 외면한 정도가 아니에요.
완전히 존재 자체가 단절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죄 덩어리 그 자체가 된 것이거든요.
그 죗덩어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절대자 하나님과 완전한 단절,
완전한 절망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을 완전히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을 앞두고 고민하셨습니다. 걱정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고민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인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에 대한 고민을 죽음보다 더 깊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도 죽음에 이르는 고민을 통해
죽음을 잘 준비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모든 죄를 짊어지고 지옥에 떨어지셨어도
손쉬운 방법으로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나셨겠지.
저 사람은 대단한 정치인이니깐 죽음이 겁나지 않을꺼야.
훌륭한 체육인이니깐 용기가 많아 죽음을 거뜬이 받아들이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훌륭한 사람이니깐 죽음따윈 두렵지 않겠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고민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의 과정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하셨던 죽음에 이르는 고민을
우리도 함께 고민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고민을 해야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이 무엇인지, 그 의미와 가치를 알고
바른 자세로 죽음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해 죽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죄를 감당해야 할 사람은 나입니다.
죄를 감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우리는 스스로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 자체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려면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 욕망, 자아, 교만, 성취감, 이기심, 내 스스로 하려고하는
나 자신을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 고민을 해야됩니다.
내 힘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는데, 내가 했어야 했는데...
사순절에는 그 죄를 내가 어떻게 질 수 있을까?
하나님 없이 내가 어떻게 죄에 대해 죽을 수 있을까?
사실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죄를 바라보면 그렇지 않나요?
저는 지금도 제 추한 모습이 여러분에게 들킬까 조마조마 합니다.
제 존재 자체가 그렇거든요.
겉으로는 아닌척 포장해도 제 본 모습은 죄 투성이에요.
그런데 저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조롱당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과 완전한 단절을 경험하셨습니다.
원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야 하는데...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당한 고통. 우리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이 순종의 기도가 죄의 고민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길을 따라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순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다함께 일어나서,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함께 찬양하시면서 봉헌하시겠습니다.
<찬양 -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기도제목
예수님의 고난이 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음을 깨닫고,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자신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했던 예수님처럼 죄에 대해 죽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부활절 버스킹 전도축제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나의 믿음을 점검하며, 은혜를 나누는 풍성한 영적 축제의 장이 되게 하소서.
이룸청년부가 주님 안에서 연약한 자를 서로 돌아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통성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난과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가 바로 내가 져야 했던 고통임을 깨닫게 하시고,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죄를 미워하며, 날마다 회개와 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욕심과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죄에 대해 죽는 삶을 살도록 성령님께서 매 순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가오는 부활절 버스킹 전도축제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 축제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풍성한 영적 축제의 장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축제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시고, 서로 은혜를 나누며 주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 이룸청년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세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을 본받아 살아가는 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이 모든 말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무리 기도 + 헌금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을 묵상하며 우리의 죄를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이르는 고민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순종하셨던 그 모습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결단합니다.
주님,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십자가의 고통을 깊이 묵상하며 날마다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죄에 대해 죽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제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다가오는 부활절 버스킹 전도축제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우리 모두가 믿음을 점검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이룸청년부가 서로를 돌아보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지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시간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주앞에 드리는 예물이 있사오니
기쁘게 받으시고, 기도하는 제목마다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감사가 하늘의 문을 열고,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형통함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일하실 주님을 기대합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능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광고
축도
이제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항상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 교통하심이
예수님을 따라 죄에 대해 믿음으로 죽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여기 모인 모든 이룸청년들과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 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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