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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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십자가
감춰진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봉헌 기도 및 목회 기도
1.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생명은 모든가치에 가장 우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은 믿음이 얼마나 세냐 약하냐의 강도의 차이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얼마나 세게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에 관한 것이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을 좌우합니다. 왜 수십년 예수를 믿어도 만족이 없고 변화가 없냐면 믿음의 세기가 약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성경적이라면 크지 않아도 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겨자씨같이 작을지라도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의 형님은 나이 30살에 약혼을 한 상태였고 결혼을 한달 앞둔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고를 만나기전 형님에게는 30살이후의 삶이 꿈들이 있었습니다. 비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 30살에 삶이 끝남과 동시에 그 꿈과 비전들은 허망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저희 가정은 그 충격때문에 한달동안을 장례를 치루지 못했습니다. 한달후 저희 부모님은 가까스로 힘을 내셔서 장례를 치루졌고, 저는 장례식이 끝난 후 몸져 누워있는 부모님 대신에 형님이 결혼식을 위해 주문하셨던 청접장과 예식장 그리고 가구들을 제 손으로 직접 태우고 취소해야 했습니다. 이일은 저에게 인생의 허무함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준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형님이 그 청첩장을 만드실때 그리고 예식장을 예약하실때 얼마나 많은 기대와 설레임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것이 운명을 달리한 이후 형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렸음을 저는 보았습니다.
생명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은 모든 가치보다 가장 우선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수많은 인생의 가치와 비전과 꿈들이 그 가치를 잃어버리고 설자리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그 무엇인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건다는 것은 참으로 존경받아 마땅하고 경의로운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만일 누군가 허망한 것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사는 것을 본다면 또한 그것처럼 안타깝고 허무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믿음의 강도가 아닌 내용이라는 말과 생명이라는 말
오늘 본문 2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적을 구한다는 말의 혼돈이 있을까봐 잠깐만 표적의 의미를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다른 의미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오늘 본문이나 요한복음이나 한국말로 같은 표적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혼동이 있을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이 너희들이 표적을 안보고 눈앞에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 나를 쫒으려 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셨는데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나와 있으니 혼돈이 생길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으로보면 조금더 클리어합니다.
Jesus replied to them and said, “Truly, truly I say to you, you seek me not because you saw signs, but because you ate of the loaves and were satisfied!
For indeed, Jews ask for sign miracles and Greeks seek wisdom,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한 싸인, 표지판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유대인들이 구하는 표적은 초자연적인 기적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완전히 구별됩니다.
그래서 구분을 위해서 고린도전서의 표적은 기적으로 제가 표현을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구한 이유는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멧세지의 진실인가의 유무를 기적을 통해서 확인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그렇게 경험해왔고 또 그래서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멧세지라면 당연히 그 곳에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하여 자신들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애굽에 열가지 재앙이 임하고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는 기적을 통하여 그들은 오늘날 자신들이 존재할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존재할수 있었던것은 기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여해주신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을 생명이라고도 표현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언약,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출애굽때 열가지 재앙의 기적과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는 기적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었다면, 만일 이스라엘에게 주신 생명이 없었다면 그 모든 기적들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생명이 기적을 만들고, 설령 기적이 없다 하여도 생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구해야 할 최우선의 가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언젠가부턴가 이 생명보다 기적을 우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정작 언약의 실체요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적을 통하여 구분하여 볼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악하고 음란한 세대, 요나의 표적밖에는..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삼일동안 갇혀 있다가 토해진 사건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외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표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표적을 통해 메시야의 유무를 판단하려하는 그들의 교만과 무지에서 비롯되 잘못된 믿음을 꿰뚤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도를 자랑할뿐 믿음의 내용이 크게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연조가 쌓이고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도 어느새 믿음의 내용이 아닌 믿음의 강도만 자랑하며 살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은 여러분의 메시야를 무엇을 통해 만나시려고 하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이적과 기사를 베푸시면 그것으로야 비로소 예수님을 인정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의 구원자를 그와같은 방식으로만 만나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을 생명으로 만나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유는 믿음의 강도는 믿음의 내용을 대신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난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십시오. 인생의 위기앞에 설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번만은 하나님 도와달라고, 이번에 이 문제가 해결되면 저는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신분이고 진짜 신인줄 알고 열심히 믿고 살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든 그 문제는 해결되었고 우리는 잠시 짧은 기간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감격하며 살아보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식어지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없는 사람처럼 식어지고 굳어져버린 우리 자신을 발견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한분만의 고백이 아니라 어쩌면 이 자리에서 나름 하나님을 추구했던 모든 분들이 경험해보았을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으로 메시야를 만나지 않는한 신앙의 기적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내 곧 그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나는 자에게 오히려 기적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2.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
그런면에서 헬라인이 추구했던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혜란 사물의 이치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의미합니다. 사물에 대한 이해도가 커지면 인간은 궁극적인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지혜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지 못합니다.
본문 20절부터 21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미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전도의 미련한것으로 세상을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없는 지혜란 바로 그 자체가 이미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그 어두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렸을적, 시골집에 살때의 일입니다.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온식구가 마당에 평상을 펴고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어머님이 수제비를 끓여주셨습니다. 저는 뜨거운 음식을 먹기를 싫어해서 그 뜨거운 수제비를 식히기 위해 바가지에 물을 떠서 수제비가 담긴 그릇을 그 위에 띄어놓고 그 바가지를 들고 수제비를 먹곤 했습니다. 그날도 그 수제비를 그렇게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구들보다 수제비를 빨리 먹어치운 저는 텔레비전을 볼생각으로 혼자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방안으로 들어간 저는 깜짝 놀랬습니다. 방바닥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입니다. 뱀이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저를 노려보는데 저는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순간 비명을 지르며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식사하시다 말고 제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 다음행동이 정말 이상했습니다. 눈앞에 뱀이 있는데도 별로 당황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뱀에 엎드려서 뱀과 얼굴을 맞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뱀에게 얼굴을 갈수록 가까이 대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놀래서 아버지를 뒤로 잡아 당기며 가지 말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순간 아버지가 웃으시면서 그 뱀을 확 움켜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뱀이 아니라 쭈쭈바 껍데기였습니다. 나중에 불을 켜고 확인해보니 누군가가 먹고 버린 쭈쭈바 껍데기가 미처 끄지 않은 선풍기 바람에 흔들리면서 마치 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던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제가 뱀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쭈쭈바 껍데기를 보고 놀란 것입니다.
왜 제가 그토록 놀랐습니까?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저의 눈은 어두움을 이길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란 바로 이와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이라는 철학자는 이를 동굴의 비유로 이야기한적이 있습니다. 캄캄한 동굴속에 있는 이들은 그곳이 어둡다고 불평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정작 동굴바깥의 빛의 세계로는 나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동굴바깥의 빛이 안으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동굴속 사람들은 점점 더 동굴안쪽으로 더 깊은 어두움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빛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해서 믿겠다고 하는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해결책, 십자가
유대인의 표적도, 헬라인의 지혜도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인간의 어떤 노력도 의도 결코 우리를 구원할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라는 표현은 사실상 당시 모든 세계의 사람들을 다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구원을 받을수 있으며 생명을 얻을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부터 벌거벗은 수치가운데 있을때에 하나님은 이름없는 한 동물을 희생시키셔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의 가죽을 벗겨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은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계속해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죽기 위하여 올거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약속입니다. 밝은 대낮에 내리쬐는 햇빛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하는 무지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특수한 도구를 사용하거나 비가 온뒤에 햇볕이 그곳을 비출때야 우리는 보게 됩니다. 마치 그것처럼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 하나님의 약속인 십자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속에 내가 살 생명이 있음을 알고 십자가를 믿게 되지만 십자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는 이해되 안되고 말도 안되는 그저 사형수의 사형틀로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킹스턴에서 살때 하루는 아내가 저녁을 차리는데 맛있는 닭고기 국물에 우동면발을 넣은 일면 닭국물 우동을 메뉴로 올렸습니다. 먹는것을 좋아하는 저인지라 아내의 닭국물 우동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내역시 맛있게 우동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니 우동먹다가 왠 비명소리, 하고 보았더니 집사람이 하는말, 우동속에 파리한 마리가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집사람은 그 즉시 젓가락을 놓았고 그 그릇 근처에도 가지 안았고 저는 그 우동그릇을 들고가 빠진 파리를 건져내고 면발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설것이를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겨우 파리 한마리 빠졌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우동맛이 변한것도 아니고 우동에 병균이 잔뜩 들어간것도 아닙니다. 그냥 파리 한마리 빠졌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파리 한마리로 인해 그 우동그릇, 아니 냄비 전체가 다 비어지고 씻겨져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동한그릇에 빠진 파리 한 마리가 더 더럽겠습니까? 아니면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인간이 범한 죄가 더 더럽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죄를 도둑질을 하고 누군가의 것의 강제로 빼앗는다거나 하는것만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들은 죄의 본질이 아닙니다. 죄의 열매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없이 살려고 하고 살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것입니다. 심판이 무엇입니까? 그 마음그대로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것 그것이 죄입니다.
십자가 속에는 이러한 하나님없이 살려고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그 죄로 영원히 죽을수밖에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됩니다.
노력과 포인트를 쌓아서 구원을 얻는게 아닙니다. 이 십자가 약속을 믿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실은 제가 본문 하나를 일부러 지나쳤습니다. 그것은 10절부터 17절까지에서 나오는 교회의 분열의 문제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린도교회는 200명 남짓의 교인들이 네개의 파로 나뉘어져 서로 으르릉 데는 찟긴 교회였고 상처투성이의 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해결책으로 사람에게 집중하지말고 십자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기위해서 본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왜 교회분쟁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이 십자가를 이야기 하겠습니까? 교회가 이 십자가은헤를 잃어버리면 반드시 분쟁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나의 노력과 의로도 얻을수 없었던 구원을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은혜로 얻었음을 고백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 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고전1:29부터 31절까지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와 여러분에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것처럼 생명이 있어야 표적도 지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에게 있음이 십자가를 통해 확신될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표적의 축복도, 지혜의 축복도 누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주간도 우리 성도님 삶가운데 이러한 생명과 그 생명속에 풍성함이 누리시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