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돌, 머릿 돌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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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성전에서 걷지 못한 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주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교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도들이 보여준 태도는 유대인 군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고, 결국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남자만 5천명이 되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새롭게 갖게되었고, 군중들에게 보여주었던 태도는 공감, 존중,포용, 참된 용기였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태도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갖게 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을 눈에 가싯처럼 여긴 사두개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지난 밤 감옥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지자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라고 하니까, 오늘 날의 생각처럼 별로 그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것 같은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종교 지도자들, 관리,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과 그들의 문중이 점부 참여한 공의회는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재판정에서 있었던 일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권위가 있고 엄숙한 장소였습니까? 저는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판사가 마지막 주문을 읽을 때에 괜히 소름이 돋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산헤드린 공의회가 바로 그와 같은 장소입니다.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엄청난 후폭풍을 당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두렵고 떨리는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에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희가 도대체 누구길래 성전에서 무슨 권세를 가지고 누구의 이름으로 이러한 일들을 행했는지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우리가 너희에게 어떤 권위도 준적이 없는데, 너희는 무법하게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짓을 가르쳤으니, 너희의 배후를 밝히라는 말이지요.
바로 그 순간 베드로가 나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실 때에 두려워서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엄숙하고 두려운 상황 중에 그가 나섰습니다.
누가는 이 순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표현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담대히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성령이 베드로에게 충만하여 임하여 그들 앞에 당당히 나서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그를 심문하는 이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다시 표현하면, 지금 나를 심문하는 당신들이 지은 집을 버리시고, 새로운 집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118:22-23
시편 118:22–23 NKRV
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던 다윗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취하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새롭게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베드로는 지금 그들을 심문하는 권위있는 자들에게 당신들은 사울과 같이 행동하여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단언하고, 다윗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새 나라를 이루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을 자신들의 권위로 자신들의 집을 지으려고 했었기 때문에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 없는 돌로 여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시므로, 그들이 세운 집의 완성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집도 아무런 능력이 없는 집이라는 것이지요.
반면에 그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가 집 모통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새로운 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 생명의 주로 말미암아 능력이 나타나 병자가 고침을 받았으며, 궁극적으로 영혼의 구원이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그 집은 궁극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집입니다. 평생을 성전 문앞에서 구걸하였어도,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환영도 받지 못했던 그 걷지 못한 자가 고침을 받는 집입니다. 상한 마음과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 받는 곳이며, 영원한 구원이 임하는 집을 세우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사건과 베드로의 답변을 통해 우리가 받을 교훈 2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지난 몇 주간 우리가 복음전파를 위해 가져야 했던 삶의 태도, 혹은 마음가짐과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집을 세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중심이 되어, 자기들의 생각과 가치관에 합당한 집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종교지도자들은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자들이었고, 부활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지금 자신들이 차지하고 주장하는 종교생활이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과 영생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했고, 또 그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이렇게 위협하여 부활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강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완고한 태도로 자신들의 생각이 옳고 또 옳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부드럽고 유연한 마음을 갖기 보다는 단단하고 경직된 마음을 갖고 신앙생활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생각이 옳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둘 사이에 차이점은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다른 증거들로 인하여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옳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더이상 바뀔 수 없습니다. 다른 주장이나 생각을 꺾고 넘어뜨려야만 하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이 때가 변화되기 너무 어려운 시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평생을 옳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신념이 있는데, 이제 와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영화에서 보면 실제로 있었을 것 같은 장면들이 나옵니다. 자신이 틀렸다고 증명이 되더라도 자신의 그 동안 추구해온 신념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기 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경우들이지요.
이 상태가 되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모두가 적이 되고 맙니다. 자신이 힘이 있으면 적들을 공격하게 될 것이고, 자신이 힘이 없다면 모든 관계를 끊고 회피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고립되어 가는 것이지요.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교수님이 “해방된 어른자아”라는 표현을 쓰신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에 반대되는 것은 어린아이 자아 혹은 부모님의 자아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 자아와 부모님의 자아는 내게 각인이 되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한번도 그것이 옳은 지 그른 지를 생각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유연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해방된 어른 자아는 주어지는 현실을 살피고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현실에 적합하게 바꾸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세상이 변화할 때에 흔들리지 않는 복음과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을 복음과 말씀에 따라서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어진 삶의 순간,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라,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내 뜻을 이루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늘 구해애 하는 것이지요.
혹시 여러분들은 자기 집을 세우고 있습니까? 그 집을 무너뜨리라는 그리스도의 초대에 반발하고 있으십니까?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만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집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의 주장과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한다는 것은 그를 의지하고 그와 조화를 이루어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 집은 치유와 구원이 일어나는 집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베드로는 일부러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9 NKRV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같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라고 쓰인 헬라어는 (소조) 구원하다, 구하다, 치료되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영혼의 구원을 표현할 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결국, 구원은 우리 육신의 질병과 어려움을 포괄하여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는 곳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바로 이러한 전인적인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바로 이렇게 전인적인 구원을 위하여 쓰임받아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고통 중에 있는 이를 위로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결국에는 그들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장차 저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주춧돌로 삼기만 하면, 그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전 미문 앞 앉은뱅이처럼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삼기만하면, 자신만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같이 사람들의 아픔을 돌보고 그들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바울도 고백하였습니다. 골로새 교회 안에 어떤 이들이 이단에 빠지고 거짓 교훈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천사를 숭배하기도 하였고,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이들에 대해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2:19 NKRV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붙잡고 주춧돌로 삼아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사시며,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상처를 치유하고 영원한 소망을 심는 복된 일에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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