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짓는 죄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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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예화) 미국 소도시의 작은 교회 목사 - 친구 목사의 교회 소식 :초라해짐
(시기의 속성)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가까운 친구나 잘 아는 동료가 잘되면 기쁘기보다는 이상하게도 우울해지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이 무척 쓰라리다. 이것이 바로 시기의 속성이다.
눈으로 짓는 죄
시기를 뜻하는 영어 단어 envy는 ‘자세히 보다’라는 어원을 지닌 라틴어 ‘인비디아’에서 온 것이다. 시기는 승진 소식을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하는 입사 동기나, 아들이 명문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활짝 웃는 동창을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화) 아마데우스
시기란 눈에 ‘보이는’ 존재 때문에 자신이 형편없고 비참하게 여겨져 상대를 끌어내리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성경도 시기를 눈과 관련시키고 있다. (막 7:32) ‘악한 눈’을 대부분의 성경 번역본에서 ‘시기’나 ‘질투’로 번역한다. 시기란 눈앞의 대상을 악한 눈으로 응시하는 것에서 시작됨을 암시한다.
(대표적인 성경의 장면)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는 장면이다. (삼상 18:7) 다윗을 바라보는 사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삼상 18:9)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NIV는 ‘시기하는 눈’으로 번역했다.
행복을 슬퍼하고 불행을 기뻐하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에 따르면,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남의 불행을 기뻐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단테는 시기에 사로잡히면 “그저 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아도 가슴이 쓰라려 온다.”고 말했다. 신곡에 등장하는 시기심 많은 자는 늘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보다는 ‘상대가 가진 것’을 의식하고 불편해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시기라는 감정은 매우 복합적이고 미묘한 부분이 있으며,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사적적 정의를 넘어선다.
형제에게 짓는 죄
시기의 독특한 점은. 그 대상이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지인이나 친구라는 것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이와 같은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우리는 이런 속성을 성경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동생을 죽인 아벨, 요셉을 죽이려 형들,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한 고라와 그 무리들, 다윗을 시기한 사울 왕 이야기 등이 바로 그런 경우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직장 동료나 동종 없계 전문가들이 서로 시기하고 헐뜯으며 뒤에서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일들이 적지 않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보다 뛰어난 친구보다는 여러모로 자신과 비슷한 친구가 잘되면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윤리학자 윌리엄 메이는 시기를 ‘형제에게 짓는 죄’라고 불렀다. (십계명의 열번째 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탄내지말라! - 계명이 금하는 탐욕의 대상은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의 소유와 아내이다.)
시기의 결과
1 시기는 다툼과 분쟁, 증상, 한담, 수군거림, 미움 그리고 고통과 악의를 낳기 마련이다. 시기는 사람의 약점을 은근히 흘리고,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들으면 동조하고 뒤에서 수군거린다. 이것은 상대방을 무참히 넘어뜨리는 행동이다. 그러나 시기는 부메랑처럼 상대방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예쌍치 못한 피해를 입힌다. 예> 신데렐라와 그 언니들 : 신데렐라는 시기가 낳은 비극적인 결괄르 보여 주는 대표적인 고전동화다.
2 부메랑의 고통 : 셰익스피어의 소설 ‘오셀로’ : 시기의 칼은 상대방을 벤 후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3 피학적 시기 : 시기가 의식을 지배하게 되면 ‘피학적 시기’의 양상으로 발전될 수 있다. 상대의 웃음을 거둘 수만 있다면 자신이 피해를 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한 유대인 민담 : 욕심이 많고, 시기심이 많은 두 친구) 이 이야기는 어느 대상에 대한 시기가 극대화되면 이런 극단적인 행동도 불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시기를 이기는 길
1 한담을 피하라 : 시기를 멀리하는 아주 실제적인 방법 중 하나는 한담을 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기라는 목표를 향한 달음질에서 아예 출발조차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경의 예 : 야고보서) 야고보서에 등장하는 미숙한 선생들은 교회 내 다른 지도자의 가르침을 비판하면서 스스로 총명하고 지혜롭다고 자랑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진리를 세우기 위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들이 진리를 옹호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다른 선생이 교회 내에서 인정받는 것에 대한 ‘독한 시기’ 때문에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약 3:14)
사람은 시기하는 대상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들릴 때 겉으로는 염려하는 척하면서 그 소문을 이리저리 옮기며 쑥덕거리고 그 대상을 폄하하거나 왜곡한다. 잠언 기자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한담하는 것은 친구의 약점과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잠 11:13, 20:19) 험담은 보통 한담으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한담이란 다른 사람들을 화제 삼아 가볍게 이런저런 일을 말하는 것이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 (잠 26:22)는 한담의 매력을 잘 보여 준다.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은 칭찬이 아니면 가능한 시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험담의 자리에서는 자신의 귀를 막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기의 덪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기 :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눈을 자신에게로 도려 자신이 가진 것을 보는 것이다. 시기는 끊임없이 상대가 가진 것을 보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어떤 것이 있는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한번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자신에게 이런 것이 있었느지 의아할 정도로 남다른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각자에게 고유한 은사를 주셨다. 그러나 제대로 찾지도, 사용하지도 않기 떄문에 많은 경우 그냥 방치되어 있다.
(성경의 예 : 달란트 비유) 우리는 이 비유에서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사안이 ‘몇 달란트 받은 사람이 더 가치있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누가 자신이 받은 것으로 엸미히 일해 이윤을 남겼느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자기가 받은 것으로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긴 이들은 모두 동일하게 주인으로부터 “잘했다. 착하고 충선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았고,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 따라서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를 시기할 필요가 없고, 더 적게 받았다고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도 없다. 모두가 다섯 달란트를 받아야 할 필요도 ㅇ벗고, 또 다섯 달란트가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다. 주인의 뜻과 주권에 따라 각각 차이를 두어 맡기신 것뿐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두 달란트를 맡기셨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장사를 하면 되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신자가 누릴 참된 영광이란 ‘하나님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누가 몇 개 받았느냐?’ ‘누가 세상에서 더 인정받는 은사가 재능을 받았느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고유한 은사를 신실하게 사용하고 주인을 위해 이익을 남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된다. 이것이 신자가 받는 최고의 영광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울은 좋은 가문과 준수한 외모 및 여러 뛰어난 덕목을 지닌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감사할 조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윗을 의식하면서 자신이 지닌 귀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고, 비교 의식과 우울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예> 1960년대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주도했던 말콤 엑스 : 백인에 대한 시기와 적대 의식을 벗어나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의식의 전환을 이룰 때에야 비로소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 이렇듯 우리는 눈을 자신에게로 돌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밝은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 떄 비로소 감사가 생겨난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갖아 수준 높은 태도일 것이다.
3 지체의식 : 함께 있는 사람이 나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시기는 힘을 잃는다. 즉 동료 의식은 시기의 공격을 막아 주는 강력한 방패다. 자동차가 달리려면 부품 하나하나가 제대로 성능을 발휘해야 하듯이, 사회나 단체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엮여 맡겨진 역할을 잘 감당해야 조직이 순조롭게 돌아간다.
바울 역시 각 그리스도인을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성하는 눈, 귀, 코, 입, 손, 발에 해당하는 지체로 비유했다. 이들은 몸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서로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 의식은 성도가 한몸을 이룬 지체임을 가르치는 훌륭한 시각적 상징이 된다. 신자들이 한 식탁에 앉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하는 성찬은 각 신자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과 그들의 재능은 모두 교회를 세우고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자원이다. 이런 의식을 갖게 된다면 내 동료가 가진 탁월한 은사와 재능은 나를 이롭게 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지체에게 주신 나와 다른 은사와 기능은 부러움의 대상을 넘어 감사의 제목이 된다. (고전 3:9) 고린도교회를 향해 아볼로가 경쟁자가 아닌 고린도교회를 위해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임을 강조했다.
4 사랑 : 궁극적인 대안 : 시기를 물리치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무기는 사랑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은 친구가 잘될 때 기뻐하고 넘어질 때 마음 아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 룰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고 나아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가 성공할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그가 힘들어할 때 같이 아파하게 된다. 사랑은 친구의 고통이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롬 12:15) 그래서 바울은 파벌로 서로 시기하고 다투던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사랑할 것을 당부했다.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치유력을 지닌 명약이기 때문이다. (고전 13:4)
라이벌까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는다면 못할 것이 없다. 그 사랑은 패역하고 불의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신 사랑이다. 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과 내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며, 이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고 그 힘을 취한다면 라이벌(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요한은 이 사랑은 하난미꼐 속한 것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요일 4:7-8) 제라드리드는 “시기란 친구의 성공에 대해 결코 기립 박수를 제안하는 법이 없다”는 말했는데, 이 말을 뒤집으면 친구를 위해 기립 박수를 제안하는 것은 시기를 벗어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쳐 주는 것,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야말고 그리스도인들이 바라야 할 최상의 목표다.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
늑대떼 : 사람들은 시기와 부러움을 똑같이 취급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부러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중점을 두고, 시기는 남이 가진 것에 중점을 둔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 남들이 가진 것을 시기한다.
천의 얼굴을 가진 적 : 다윗은 이제 막 골리앗을 죽였다. 군대가 예루살렘에 돌아올 때 여인들이 성읍에서 나와 “왕 사울을 환영”했다. (삼상 18:6) 그런데 여인들이 부르는 노래는 사울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다윗의 공로 또한 찬양한다. 더군다나 이들의 노래는 위대한 왕보다 젊은 전사를 더 높인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삼상 18:7) 이런 비교는 왕의 시기를 자극한다. 왕은 이 찬양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기에, 어린 목동과 영광을 나누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주석가의 표현대로 사울은 탕자의 잔치에 참석한 큰 아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이것이 자신을 위한 잔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받을 관심을 빼앗긴 데 분노했다. 사울의 시기는 경쟁심을 낳는다. (삼상 18:9)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다라”라고 말한다. 그는 다윗을 곁눈질하면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이제 경쟁이 시작되었다. 누가 가장 용맹한 전사가 될 것인가? 누가 더 많은 적은 쓰러뜨릴 것인가? 누가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심을 더 많이 차지할 것인가? 사울이 불공평한 비교에 점점 더 억울함을 느끼면서 그의 경쟁의식은 분개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삼상 18:8) 분개가 이런 비교를 미래로 투영하자,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더 심해진다. “그가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삼상 18:8) 사울이 현재의 비교에 울분을 터뜨리며 두렵고 분한 심정으로 미래를 바라보자, 시기와 경잼심이 그의 상상력을 왜곡한다. 시기, 경쟁, 분개가 악한 영의 영향력에 문을 열어주자, 나쁜 영이 사울에게 덮쳤고, 사울은 다윗의 몰락을 간절히 바라기 시작한다. 그 뿐만 아니라 사울은 그 몰락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계획하고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시기는 가만히 앉아서 경쟁자가 망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용을 죽이는 법 : 사울의 이야기는 다른 죄들처럼 시기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사실도 보여 준다. 시기는 제정신이 아니다. 시기가 어떤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면, 구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복주시는 손이 다른 사람에게서 일하시는 모습을 분명히 보고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인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적으로 만든다. (삼상 18:28-29) 시기는 근시안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공격하는 마음에만 초점을 맞춰서 나머지를 고려하지 못한다. 그렇게 점점 더 절망과 파멸로 추락한다.
시기의 눈으로 보기 : 그러면 시기는 어떻게 생기는가? 시기의 내면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첫째, 마치 밤이 낮을 뒤쫓듯이 시기는 성공을 쫓는다.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 주시는 손길이 사울의 시기를 자극한다.) 둘째, 시기는 아주 가까이에서 작용한다. (시기는 우리의 친찬 관계를 가장 먼저 공격한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을 시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와 비슷하고, 우리가 신경 쓰는 일과 똑같은 일에 신경 쓰는 사람들을 시기한다.) 셋째, 시기는 모방하려는 욕구가 있다. (시기는 욕구와 모방의 왜곡된 형태이다. 예화> 동물 인형이 가득 찬 놀이방을 상상해보라. 그방 한가운데서 한 아이가 검은 말 인형을 가지고 즐겁게 놀고 있다. 그때 두 번째 아이가 방으로 들어온다. 이 아이는 어떤 인형을 원할 것 같은가?)
우리 내면의 늑대를 찾아서 : 시기는 성공을 뒤쫓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공격하며,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처럼 되고자 하는 욕구를 왜곡한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정확히 진단하고자 한다면, 시기의 추한 얼굴뿐 아니라 그 아름다운 반대 양상도 살펴야 한다. 다윗과 사울 이야기에서 시기의 반대 이미지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다. 사울과 요나단의 차이를 보며 우리는 자신의 시기심을 점검할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받은 복과 성공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 성공에 대해 소곤거리고 험담하는가, 아니면 축하해 주는가? 당신은 감사가 많은가, 아니면 경쟁심이 충만한가? 다른 사람의 성공과 성과를 볼 때 그들의 가장 큰 팬이 되는가, 아니면 가장 큰 비판자가 되는가? (목회자들이여,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여, 자녀들이여, 부모들이여, 직장인들이여)
시기의 세가지 적 : 자신의 시기심을 진단해 보고 낙심했는가? 과연 어떤 소망이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는 모든 면에서 희망이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심오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칠죄종)
‘시기’가 향하는 강렬한 동경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해는 당시 주후 1세기 초기 교회 상황 속에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많은 종교가 이었습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종교들은 대개가 그렇듯이 사람들이 대부분 원하는 소망(부귀, 건강, 성공 등)을 이뤄 준다는 약속을 공언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신을 잘 섬기면(그 신이 기뻐하는 제물을 많이 바치면) 그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들은 사회의 체제에 적응하여 권력자들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에 로마 제국에게 나라와 땅을 빼앗기고 속국이나 식민지인으로 전락한 피지배인들과 로마 제국 내에 속해 있지만 과도한 세금 탓에 많은 고통을 겪던 소작농들과 같은 약자들은 종말론적 묵시 사상에 입각한 메시아 신앙을 외치던 종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방인들에게 땅과 재산을 빼앗기고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간절히 바라는 ‘메시아’가 와서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다시금 강력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여 자신들의 땅과 재산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지배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던 주후 1세기를 전 후한 시대에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하며 군사적 봉기를 일으킨 유대인 출신 저항군 지도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혹시나…’하고 기대를 가졌다가 그들이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면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 특히 민중들을 향한 치유를 비롯한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대중들의 기대는 높아졌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제자들의 적극적인 전도로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점차 이방인들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했고 교회에 합류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이 기대한 만큼 예수님의 재림이 빨리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제국이 끝장나고 메시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려는 유대 사회와 로마 제국의 움직임이 점점 본격화되자 사람들은 교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에 자신들이 살던 예전의 세상 방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그 세계 속에서 성공하고 부유한 삶을 쟁취한 이들을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강남의 대형 아파트, 고가의 고급 외제차등을 소유하고 억대의 연봉을 받는 이들을 부러워하듯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1세기 후반의 초기 교회는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성령이 불타는 교회’이거나 ‘구령의 사명감에 불타는 성도’들만 가득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사람 사는 세상은 대부분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사람의 본성과 욕망은 아담 이래로 특별히 바뀐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무엇인지, 교회는 어떤 곳인지, 어떤 이들이 교회의 구성원인지, 교회의 구성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ㅈ어리하여 각 지역의 교회들에게 알려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내용들이 담긴 서신들과 자료들이 모여 훗날 신약 성경이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칠죄종 ‘시기’에 대한 중요한 가릋미이 있는 성경이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서는 당대의 유대인들 중 상당수가 하나님의 말씀은 알고는 있지만 그 말씀 본래 뜻에 합당하게 순종하고 실천하지 않는다고 질책합니다. 그리고 입만 살아 있는 경건이 아닌 진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느 경건을 회복하는 것이 참다운 성도의 모습이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의 삶의 상황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디아스포라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거나 타협하며 눈앞의 현실에 순응하거나 자포자기하며 사는 유대인들이 늘어갔습니다. 물론 소수의 신실한 유대인들은 그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과 체제를 지키며 살고자 했으나 일반적으로는 식민지인의 상활 속에서 일단 자신과 가족들의 생존과 번영을 우선적으로 두는 일들이 늘어갔습니다. 지속된 경제적 압박과 빈곤의 문제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던 이스라엘을 붕괴시켰고,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점차 유대인들이 지녀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과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야고보서 2장 참조)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 공동체는 물론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기 교회 내부에서도 경제적 기준에 따른 차별과 갈등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는 당시의 유대계 성도들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의 주된 원인이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 진단하고(약 1:14), 이어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경고합니다.(약 1:15) 이것은 당시의 많은 유대인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살지 않고 세상(로마제국)의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로 믿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긴 했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아직 회심하지 않고 여전히 다수의 유대인들이 과거에 살아온 방식대로 살다 보니 교회 내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의 한국 교회 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기준과 가치를 갖고 살며 교회 내에서 문제(다툼과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이 적지 않기 떄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 초기 교회는 로마 제국의 사람들에게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진실로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이 누구나 자신의 것을 자신만의 것이라고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과 함꼐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행 4:32-37) 그리고 이러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사도들을 통해 교회가 추구해야 할 긍정적 지향점과 표중느로 자리 잡게 되어씁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게 된 많은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회심한 성도들의 모습을 닮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기준을 거부하고 이러한 이들을 시기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세속적 부와 풍요를 추종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 교회의 모습은 자신들의 기준(세속적 기준)에 도무지 맞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특히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며 자신들이 교회의 주류임을 자부해 온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모습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상실한 유대인들, 특히 로마 제국의 삶의 방식(돈과 권력)에 익숙해진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한정된 재화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당연히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경쟁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나에게는 없거나 나보다 더 나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시기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입으로는 성도라 하지만 실제로는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독점하고 싶어하는 탐욕과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전반에는 이렇게 탐욕과 시기에 사로잡혀 사는 그들의 문제를 조목조목 짚고 있습니다. (약 4:1-3), (약 5:1-3) 야고보서는 유대인들이 이렇게 사는 이유가 ‘땅 위의 것, 정욕의 것, 귀신의 것’에 자신의 마음을 뺴앗겼기 떄문이고 (약 3:15) 그 결과가 그들이 시기와 분쟁을 일삼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약 3:16) 남보다 더 만흔 것을 가지고자 탐욕스러운 삶을 사렉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세상의 지혜에 마음을 뺴앗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초기 교회를 통해 세워진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모습 (예루살렘교회)을 거부하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이들을 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모은 재물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는 천민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나워 주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일을 하는 회심한 부자들을 미워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들은 교회 내에서 분쟁과 다툼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처럼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유대인을 한편으로는 엄하게 질책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참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보여야 할 마땅한 태도를 다시금 권면합니다. 이 내용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보인 시기와 탐욕으로 말미암아 교회 내에 생긴 온작 혼란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긍휼함입니다. 이는 당시 초기 교회를 상징하는 독특한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진심으로 환대하며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재물과 시간을 나누는 공동체가 당시 로마 제국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요즘같이 사회 복지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구호나 돌봄이 거의 없던 시대에 대가 없는 호의를 그들에게 베풀고 진심으로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대해 준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가 실천한 것입니다. 이런 초기 교회의 못브은 교회를 이교적이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집단으로 의심하고 감시하던 로자 제국의 관리들과 황제에게까지 신기하게 비쳐질 정도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정치적, 사회적 입장 차이로 교회를 금지시키고 탄압하던 제국의 관리들과 정부조차도 교회가 보인 사랑과 환대의 모습은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교회의 긍휼함은 세상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며 대립하게 하는 시기를 이겨 내는 대안적 가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 역시 교회의 본래 모습을 횝고할 수 있도록 노력함이 마땅합니다.
읽는 설교 야고보서 26.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들 (야고보서 3장 13–16절)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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