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자리로 가자!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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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2:20–26 NKRV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서론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 시인의 깃발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마 학교에서 수업을 열심히 들으신 분들은 이것이 역설법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역설법이란 무엇이냐? 바로 모순되는 말로 진리를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아우성이라는 것은 떠들썩하게 기세를 올려 지르는 소리인데 어떻게 소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삶을 살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사람의 말은 불완전해서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말이 안되는 말을 통해 오히려 세상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을 많이 나오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얼핏 말도 안되는 말을 통해 진리를 드러냅니다. 오늘 말씀 또한 그러합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예루살렘을 떠들석하게 한 예수님의 입성식이 끝나고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헬라인들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헬라인이었고 유월절을 맞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자들이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크게 놀라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올 것이 왔구나 하시는 표정이셨습니다. 그리곤 이제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이 당시 철학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그리스에서 온 헬라인들이라니. 예수님은 이제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유명세를 가지게 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말하신 영광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2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John 12:24 NKRV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갑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시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영광은 예수님이 세계적인 유명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생각하는 영광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자신이 죽어 많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 바로 영광이라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25-26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John 12:25–26 NKRV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에게 자신처럼 생명을 아끼지 말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많은 영혼을 위해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 교회를 비롯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매주 전도를 나가는 전도팀이 있고, 전도를 나가지 않더라도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협조하는 많은 분들이 여기에도 계십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정도로 끝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그 고통과 수고 자체를 영광을 얻는 귀하고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영웅담과 비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가 막 세계의 패권을 잡은 시기로 그리스에서 유래한 영웅담이 많이 퍼져있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위인전처럼 훌륭한 사람들을 영웅이라 부르며 그들의 삶을 배우고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웅들처럼 사는 인생이 훌륭한 인생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위인전을 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 또한 이런 영웅들의 삶과 비슷했습니다. 범상치 않은 출생을 하셨고, 놀라운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훌륭한 지혜로 이겨내셨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 받을 만한 인품과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당대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마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도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영웅, 지금으로 말하면 위인들과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관점 차이입니다. 세상의 영웅과 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불행입니다. 안타까운 사건이고 위대한 영웅과 위인을 잃게 되는 비극입니다. 그렇기에 영웅과 위인의 죽음은 슬픔이고 사람들에게서 있어서는 안 될 사건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과 예수님은 다릅니다. 성경과 예수님은 죽음이 영광이라 말하십니다. 영웅과 위인을 잃게 만든 안타까운 사건과 비극이 아닌 인간을 다시 살리는 위대한 사건이자 축복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과 우리의 생각이 다른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예수님의 죽음을 비극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이 때 죽지 않으셨으면’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꼭 필요한 일이었고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라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 짐을 지기로 하셨고 자신을 섬기는 우리에게도 따르기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26절 후반부에 놀라운 약속을 해주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자신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자를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시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저는 이재용 회장이, 트럼프 대통령이, 하다못해 페이커가 저를 소중하게 생각해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많은 돈과 권력이 있는 그들이 저를 소중히 여기면 얼마나 잘해주겠습니까? 그런데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저를 귀히 여겨주시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좋고 신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러한 상황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어딜가도 좋은 대접을 받고 어떤 사람은 어딜가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담임 목사님은 어딜가도 인정받고 좋은 대접을 받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누구를 귀히 여기시는가에서 오는 것입니다. 제가 담임 목사님을 까려는게 아니라, 담임 목사님이 저나 여러분보다 나으면 얼마나 더 나을까요? 물론 더 나으시겠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보다 나아봤자 그게 그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담임 목사님을 귀히 여기시기에 높여주시기에 담임 목사님은 우리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으십니다. 어딜가도 인정을 받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고 높임을 받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책임지고 세심히 챙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담임 목사님의 간증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만해도 해주시고 챙겨주시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요? 나는 기도하는 일도 안해주시는데 왜 담임 목사님은 생각만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바로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담임 목사님처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선 다시금 말하지만 십자가를 영광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십자가가 단순히 인내해야 할 단계라고만 생각합니다. 광야를 잘 참아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일정 기간 십자가를 잘 져야만 내가 복과 영광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착각하시면 안되는 것은 광야와 십자가는 다릅니다. 광야는 세상과 죄로 물든 나를 정금같이 만드는 과정이라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내가 변화되기 위함이라면 십자가는 내가 변화되었기에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내가 가능한 빨리 벗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는 죽을 때까지 내가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광야는 나를 위한 것이지만 십자가는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른 영혼을 위해 평생토록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영광이요 올바른 신앙의 증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나에게 있는 고통과 고난이 광야인지 십자가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앞서 광야는 나를 위한 것이지만 십자가는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겪는 고난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광야인지 십자가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하고 나를 복 주시기 위한 고난은 광야이며,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살리기 위한 것은 십자가 입니다. 광야를 십자가로 착각해 교만하여 변화되지 않거나, 십자가를 광야라고 착각해 빨리 벗어나려고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잘 구분을 못하시겠다면, 그리고 자신이 잘 구분한다고 생각해도 혼자 이상한 결론을 내리기 보다 사역자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이 십자가라 확신이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달라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빈 말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조차 괴로워하며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다면 지지 않게 해달라 기도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져야 하는 우리는 매일 주님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한 후에는 십자가를 온전히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온전히 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25절의 말씀처럼 자신의 생명조차 아까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혼을 살리기 위해선 죽음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갖추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는 것, 굴욕적인 상황을 감내하는 것, 나를 정말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쉽지 않습니다. 저도 뭣 모르고 목사가 되겠다고 이 길을 걸어가면서 더욱 느낍니다. 할 말도 못할 때가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이리도 버겁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영광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십자가를 지는 자를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귀히 여겨 주신다 말씀하십니다. 우리 가끔은 너무 괴롭고 힘들어도 내가 지는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지는 우리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다음 이야기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결론
최근 대기업이나 기업들이 가는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입들이 금방금방 그만두고 회사를 나간다는 것입니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무원 사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공무원 사회도 새로 들어온 신입들의 퇴사율이 높아 고민입니다. 이에 대해 기업들은 업무를 조금 준다거나 복지를 늘리는 방법등을 사용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진단했습니다. 신입 사원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는 더이상 힘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원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게 한 기업은 퇴사율이 낮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사람이 어떠한 일을 견디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부심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 사람은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에 동참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감당하신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 물론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모르지 않으시고 다 채워주십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진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십자가를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내 필요가 채워지고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해도 십자가를 영광을 여기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를 영광으로 여기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축복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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