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식사,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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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식사, 성찬
어떤 소설에 보면, 혼밥의 기술을 전수하는 학원이 등장합니다.
점심시간에 혼자 남겨지는 게 괴로웠던 주인공은, 결국 그 학원에 등록합니다.
이 학원은 혼자 식사하는 기술을 5단계로 나누어 가르치는데요.
가장 쉬운 단계는 카페에서 혼자 커피 마시기입니다.
중간 단계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 입니다.
그리고 최고 난이도가 있는데요.
바로 고깃집에서 혼자 고기 구워 먹기랍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학원의 졸업률은 겨우 15%에 불과하다고 해요.
왜일까요?
졸업하면 진짜 혼자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혼자 있는 법을 배우러 왔지만, 사실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이처럼 우리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함께 있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혼자 밥을 먹으면 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안에는 나눔도, 희생도 없습니다.
상대가 없기 때문이죠.
반대로 누군가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내 삶의 일부를 상대에게 나눠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식탁에서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성찬식, 즉 거룩한 식사를 나눕니다.
도대체 이 식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길래 우리는 빠지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키려 하는 걸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답을 함께 찾아가보면 좋겠습니다.
[본론1]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도 돌 하나 안 남기고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쉽게 죽일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인파가 모인 곳에서 예수님을 죽였다가는 화난 백성들이 봉기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도와주려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내부에서 배신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사탄이 자기 맘대로 들어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계속 있다가는 자신이 손해볼거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 공동체의 돈 주머니를 맡을 정도로 셈이 빠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빠르게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결국 그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럼 셈이 빠른 유다의 끝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손해본 자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생명도 잃고 구원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셈이 빠르면 이익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셈이 빠르면 오히려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신앙은 내가 드러날수록 주님은 감춰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머리보다 먼저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럼 이 순간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실까요?
놀랍게도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십니다.
죽기 일보 직전인데 제자들과 밥 한끼 먹는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담담히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십니다.
유월절 식사가 어떤 의미가 있길래 그러시는 것일까요?
원래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이집트 노예생활할 때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문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하나님의 재앙이 그 집을 넘어가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영어로 passover, 즉 넘어가다는 의미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의 민족을 이룰수 있게 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8.15 광복절과 비슷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되면 사람들은 성전에서 양을 제사드린후 그 양으로 가족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합니다.
이것을 유월절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식탁에는 1년된 흠없는 어린 양, 누룩없는 빵, 쓴 나물, 포도주가 준비됩니다.
식사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자식이 아버지에게 유월절 음식들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유월절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최대의 명절입니다.
당시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에 약 25만 마리의 양을 성전에서 잡았다고 합니다.
그 어머어마한 양들을 도살했다면 얼마나 피 비린내가 진동을 했을까요?
이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에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준비하십니다.
자신이 가장이 되셔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유월절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어린 양을 잡았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유월절 양을 잡아야 하는 무교절 날이 왔다’고 말합니다.
유월절 만찬에는 가장 중요한 음식이 바로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어린 양은 보이지 않습니다.
유월절 만찬에 빵과 포도주는 있는데 양 고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잡아야 할 어린 양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예수님이 바로 그 어린 양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곧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가셔서 고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십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된 사건인 것처럼,
예수님의 유월절은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사건입니다.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19-20절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가 주는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자리가 바로 성찬식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실 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잔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흘리실 피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참여하는 자리가 바로 성찬식입니다.
그럼 성찬식에 참여한 우리들이 보여야할 반응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찢겨진 살과 피를 우리가 먹는다면 그 분과 우리가 연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데서 끝나면 안됩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삶을 우리에게 살아가라는 초대장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삶에 대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희생과 섬김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 나를 찢고 있습니까?
내 자존심과 내 욕심을 찢어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물질,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있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성찬식을 진행합니다.
그것에 참여한다면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찢기고 나눠지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우리의 이런 찢기고 나누어진 삶을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매일의 성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둘째, 유월절 만찬에 가족들이 아닌 제자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유월절은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즐기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제자들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곧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 가족을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식탁이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단순한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시며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는 완벽한 사람들만 있는게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신할 가룟 유다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계획을 모두 다 아시지만 그를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그에게도 떡과 잔을 나눠 주셨습니다.
왜 일까요?
어쩌면 가룟유다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가룟유다는 유월절 만찬을 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돌이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자기 욕망과 계산이 그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가룟유다 뿐입니까?
바로 뒤에 보면 제자들은 서로 누가 가장 큰 자인지 싸움을 합니다.
유월절 만찬을 경험한 자라고는 믿을수 없는 반응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행하는 성찬식도 완벽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찬에 참여할 완벽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삶에서 넘어지고 깨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찬식을 통해 우리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잇는 기회를 주십니다.
멀어졌던 사람과 다시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나와 다른 이를 품고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나는 할수 없지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이런 연약한 우리가 다시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또한 누가복음만 제자들을 사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왜일까요?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지만 사도는 사명을 띤 사람들입니다.
해야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제 사도가 되어 성찬식을 계속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매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 기억해야만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22장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을 나누신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식탁에는 어린 양 고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 유월절 어린 양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동물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과 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 성찬의 식탁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초대였고,
우리의 삶에 대한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나를 쪼개어 주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식탁은 완벽한 사람들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유다, 베드로, 다투는 제자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연약했고, 부족했고, 깨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두를 품으시고, 떡과 잔을 나눠주셨습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넘어지고, 실패하고, 실망스럽지만—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품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는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싶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식탁에서 나가
‘성찬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위해 나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내가 품기 어려운 사람, 용서하지 못한 사람,
그 사람에게 예수님처럼 떡과 잔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오늘도 성찬의 자리로 부름받은 자임을 기억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매주 성찬의 식탁에 앉는 우리는,
이제 매일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의 삶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를 삶으로 흘려보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