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일을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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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일을 하였느니라(옥합)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3-9
예수님의 사역 3년 동안에 잊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로마 백부장, 생활비 전부를 바친 가나한 과부, 거듭남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제자가 된 니고데모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서 이보다 위대한 사람이 없다’ 고 한 사람으로 그는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왔고 예수님을 증거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를 초월한 상징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소명을 위해 단순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들러리의 기쁨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사역이 끝나갈 때 역시 없어서는 안 될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실 정도로 그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옥합을 깨뜨린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앞두고 그 사회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만약 명절에 예수를 체포하면 민란이 일어날 것을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예수를 체포하면 민중들이 난리를 일으킬 것이니 명절이 끝난 후에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각, 한 여인이 예수님께 귀한 것을 바친 아름다운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 여자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나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다가오더니 옥합을 깨뜨리고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그 향유는 예수님의 발등으로 흘러내렸고 여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 흥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 14:4).
이런 고급 향유를 어떻게 이렇게 낭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십시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막 14:5).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이렇게 이 여인을 책망하고 비난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였습니다. 얼핏 보면 가룟 유다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300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기 때문에 300일의 품삯에 해당되는 큰돈입니다.
“이러한 고급 향유를 판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주 설득력 있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마음 밑바닥에 숨겨진 의도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칭찬하지도, 그의 편에 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의 편에 서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
예수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좋은 일을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하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진 향유가 아무런 쓸모도 없이 아깝게 버려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이러한 행위에는 영적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여러 가지 판단을 합니다. 때로는 칭찬을, 때로는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보시는가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녀는 지극히 낭비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여인이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6절)
사람들은 이 여인의 행동을 ‘허비’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그것을 ‘좋은 일’이라 평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이 여인이 한 일이 아름다운 일입니까? 왜 이 여인은 낭비하고도 칭찬 받았을까요?
1. 그녀의 행동의 동기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
매우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부은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평가와는 완전히 상반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내게”입니다. 이 단어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의 행동이 칭찬받을 행동이 되는 까닭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내게” 즉, 이 여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에게 유익한 일을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지금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리실 구세주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선행의 기준은 철저히 사람의 생각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버렸으니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것은 낭비요 선행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선행의 절대 기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따라 선과 악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한 봉사보다 귀하고 큰 선행은 없습니다. 주를 위한 봉사는 많은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을 위한 마리아의 봉사는 진정한 선행이자 가장 큰 선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행동은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동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한 그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는 언제나 계산을 추월하여 움직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계산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가룟 유다가 향유의 가치가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계산했다는 것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모든 계산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때때로 사람을 눈멀게도 합니다. 사랑은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들고, 모든 대가를 초월하게 만듭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힘든 사건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헌신입니다. 그렇다면 헌신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헌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기희생입니다. 자기희생이 헌신입니다. 진정으로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던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이런 헌신을 할 수 있었습니까? 마리아의 이런 엄청난 헌신, 이런 사랑을 가능케 한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가 많은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평소 베다니에 자주 오시던 예수님에게서 말씀을 경청해 들었습니다. 깊은 말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는 은혜도 받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리아는 마침내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차고 넘치는 은혜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300데나리온의 향유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엄청나게 비싼 것으로 보였지만,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아깝지만 마리아가 볼 때는 기쁨이었습니다. 왜입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 섬기는 것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섬기는 것은 다릅니다. 은혜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기도를 해도 ‘저 사람은 지나치게 기도를 하는구나’하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열심을 보고 ‘저 사람은 지나치게 열심을 내는구나,’ 다른 사람이 헌금을 하는 것을 보아도 ‘저 사람은 지나치게 헌금을 많이 해’ 하며 모든 것이 다 지나치다고 평가합니다.
은혜를 모르면 모든 것이 다 아까워 보이고, 지나치게 보이고,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섬기는 봉사, 바치는 시간, 드리는 예물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 가운데 헌신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은혜 받아야 합니다. 은혜만 받으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할 수 있고, 헌신도 할 수 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뒤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까? 하나님께 은혜 받은 사람이 많은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은혜 받는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살리고, 이 사회를 살리고, 이 국가를 살리는 원동력이 됩니다. 마리아처럼 충만히 은혜 받는 사람이 되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고, 그분께 자신의 최선을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 진정한 예배란 무엇입니까?
계산하지 않고, 사랑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거둬들일 수 없는 전적인 헌신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좋은 일’로 여겨진 것입니다.
2. 아름다운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
예수님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헌신을 했을 때 그 헌신에 하나님의 복을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은 아무 때나 있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딱 한번밖에 없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닷새 전입니다.
만약에 그때 마리아가 향유를 붓지 않았다면 부을 수 있는 기회는 평생 없습니다.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한 번 온 기회에 마리아가 헌신함으로써 예수님의 장례를 기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여인은 자신이 한 일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알지 못하고 행했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께 대한 경배와 영광을 드렸을 뿐입니다. 그처럼 깊이 생각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행동을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가장 귀한 일로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헌신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수 있을 때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고위 관리였던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반신불수가 되어서 누워있던 그분을 찾아간 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지금 제 소원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에 한 번만 더 나가서 예배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건강했을 때, 봉사하라고 목사님이 권면했었지만, 그때는 듣지 않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교회 나가서 예전처럼 예배드리고 봉사하다가 떠나갔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봉사와 헌신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계산을 많이 하는 사람은 항상 뒷북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섬김은 이런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 보잘것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나 귀해서 자기 마음을 드리고 물질을 드릴 때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회는 지나갑니다. 봉사할 수 있는 기회, 헌신할 수 있는 기회는 지나갑니다. 헌신할 수 있을 때, 봉사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을 때, 은혜 받을 수 있을 때, 행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돈으로 선물을 할까, 말로 기쁘게 해드릴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그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해드릴까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마리아는 깊숙이 감춰둔 옥합이 생각났습니다.
이 향유는 시장에서 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에 한 번 살 수 있을까말까 한 아주 귀한 것으로 아마 먼 미래를 생각해서 사둔 것 같습니다. 요즘으로 생각하면 먼 미래를 대비하여 적금을 드는 셈치고 무리해서 이 옥합을 사놓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쓰려고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라비 나사로가 죽을 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쓰지 않고 보관해 둔 옥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귀한 것을 가지고 와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옥합에는 고급 향유가 들어 있었을 뿐 아니라 위에서부터 뚜껑을 조심히 열어야 하는 값진 물건이었습니다. 이런 옥합을 들고 와 향유를 조금만 부어도 그것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뚜껑을 열고 그 향유를 다 붓고 그 옥합을 다시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옥합 자체도 비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옥합 전체를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 한 사람을 위해 마리아는 옥합의 중간 부분을 깨뜨렸습니다. 다시는 이 옥합을 다른 목적으로 쓰여 질 수 없더라도, 오직 그분만을 위해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 최선을 다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렸던 마리아의 ‘헌신의 마음’을 이해하십니까? 옥합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고 최선이었습니다. 그 최선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헌신의 의미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이것이 최선입니다. 많이 드리고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 반드시 최선은 아닙니다. 힘을 다하여 드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깁니까?
예물이나 봉사는 얼마나 많이 드리는가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받으시는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라”(신 6:5)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베클 레바브카’ 인데 ‘전심으로’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이나 모양새가 아니라 전심으로, 즉 힘을 다하는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세상은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주님은 그녀의 사랑과 헌신을 영원히 기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찬입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의 한 추장에게 전도했습니다. 그 추장이 예수님을 믿고 나니 너무나도 감사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리빙스턴을 찾아와서는 “선교사님, 제가 예수님 믿고 나니 정말로 기쁩니다. 제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서 밀가루를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리빙스턴은 대답했습니다. “죄송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밀가루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추장이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에 추장은 다시 백마를 데리고 왔습니다. “선교사님, 밀가루는 부족하다고 하시니 제가 백마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리빙스턴은 다시 웃으며 “하나님께서는 백마 정도로 만족하시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밝고 기대에 찬 얼굴로 왔던 추장은 구겨진 얼굴로 돌아갔다가 또 다시 리빙스턴 선교사에게 왔습니다. “이번에는 머리에 꽂는 핀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핀은 추장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는 시체입니다. 이 머리핀을 하나님께 드리면 될까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도 리빙스턴 선교사는 “글쎄요.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만족하실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추장은 화가 났습니다. “그것 가지고도 안 됩니까? 그럼 도대체 뭘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 사람밖에 없어요. 나, 나, 나밖에는 남은 게 없단 말입니다.” 이때 리빙스턴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그분의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깨뜨리면서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았고 그 피로 깨끗함을 얻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야 할 순간입니다. 시간의 옥합을 깨뜨려 내 시간을 주 앞에 드리십시오. 나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던 물질의 옥합을 깨뜨려 사랑하는 주님의 발 앞에 내 옥합에서 흘러나오는 향유를 부어 보십시오.
마리아가 보여 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야 말로 다른 사람들을 불행으로부터 건지는 가장 복된 길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좋은 일'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좋은 일'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결과와 숫자를 따지지만,
주님은 사랑의 마음과 믿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 이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 말보다 더 큰 신앙 고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이름을 높입시다. 예수님을 경배합시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헌신이 될 것이며 여러분들이 깨뜨린 옥합의 향기가 흘러 흘러 인천으로 한국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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