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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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서론
사가랴는 아들 요한의 탄생 이후,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지 아들을 낳은 기쁨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입술을 열어, 430년 동안 이어져 온 하늘의 침묵을 찢는 역사적인 예언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언자는 사라졌고, 계시는 멈춘 듯 보였으며, 백성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긴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사가랴의 입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가 선포한 찬송은 단순한 아버지의 감격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그의 찬양은 수천 년을 이어온 하나님의 언약,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노래하는 찬송입니다. 동시에,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제 실체를 드러내고 있음을 선언하는 예언의 외침입니다.
사가랴는 아들 요한을 바라보지만, 그의 시선은 그 아이를 넘어 요한이 길을 준비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안은 미래의 구속자, 죄를 없이 하실 어린 양, 온 세상에 빛을 비추실 평강의 왕을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위대한 신학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묵상하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사가랴의 찬송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이루셨는지, 그리고 그분 안에 사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신학적, 영적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 사가랴의 찬송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의 눈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며,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롭게 조명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이 꺼져 있던 그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일하고 계셨고, 마침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그 말씀이 다시 우리 심령 가운데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대지 1: 구원의 뿔로 오신 예수 –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67–75절)
🕊 대지 1: 구원의 뿔로 오신 예수 –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67–75절)
본문 69절에서 사가랴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종 다윗의 집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으니…”
여기서 말하는 “구원의 뿔”이란 단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구약 전통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 있는 구원, 적들을 무찌르는 왕적 권세, 보호와 승리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구약의 시편들을 보면 이 뿔이라는 이미지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8편 2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특히 “뿔”은 제단의 가장자리 네 모서리에 붙어 있는 실제 구조물이기도 했으며, 그곳은 죄인이 피난처를 찾는 자리였습니다(왕상 1:50). 그러므로 이 말은 능력과 자비가 동시에 드러나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사가랴는 지금, 오랜 세월 동안 고대해 온 그 “구원의 뿔”이 다윗의 집에서, 곧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켜졌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참된 왕이시며,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를 꺾으시는 구속자이십니다.
이 선언 속에는 놀라운 신학적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수백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셨고, 다윗에게 하신 맹세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사람이 볼 때 더디고 지체되는 듯 보였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가랴가 감격 가운데 선포한 메시지입니다.
그는 단지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의 주관자로서 일하셨는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 사도 바울도 이 동일한 진리를 로마서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 4:21–22)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감정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단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바위는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 하신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약속을 쉽게 하고, 또 쉽게 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처럼 후회하거나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언약은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이 진실이며, 그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약속을 이루고 계시며, 그 일은 지금도 우리 삶 가운데 계속되고 있습니다.
✝️ 대지 2: 죄 사함의 길을 여신 예수 – 참된 구원은 속죄입니다 (76–77절)
✝️ 대지 2: 죄 사함의 길을 여신 예수 – 참된 구원은 속죄입니다 (76–77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누가복음 1:76–77)
사가랴의 찬송이 이제 전환점을 맞습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메시아적 사역에 집중되었다면, 이제 시선은 사가랴 자신의 아들, 세례 요한을 향합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요한에게 머물지 않습니다.
요한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다른 이를 위한 준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길 닦기입니다.
“너는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할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요한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을 규정하는 선언입니다.
사가랴는 요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1. 복음의 핵심은 죄 사함입니다
1. 복음의 핵심은 죄 사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구원을 감정의 회복, 인생의 문제 해결, 삶의 목적 발견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도 구원 안에 포함된 축복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
곧 죄 사함입니다.
성경 전체는 이 진리를 중심으로 흐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죄 아래 놓였습니다. (롬 3:23)
죄의 결과는 죽음이요, 하나님과의 영적 단절입니다. (롬 6:23)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의 보혈로만 우리는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얻을 수 있습니다.
📖 히브리서 9:22는 이렇게 말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세례 요한은 바로 이 진리를 준비하고 선포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회개로 초대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 요한은 분명히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요한의 사명은 명확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알리는 것.
예수님이 단지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어린 양이심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2. 죄 사함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2. 죄 사함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결코 가볍거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 초기부터 이 죄 사함의 권세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고 먼저 선언하셨고,
그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사셨지만,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자기에게 있음을 기적으로 입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순간인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자신의 피로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니…” (눅 24:47)
즉, 예수님의 복음은 철저히 죄 사함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입니다.
3. 우리의 진짜 문제는 ‘죄’입니다
3. 우리의 진짜 문제는 ‘죄’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다양한 문제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경제적 문제, 관계의 단절, 정신적 공허함, 미래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그 모든 문제의 근본 뿌리는 바로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우리 내면을 망가뜨리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파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죄 사함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 대지 3: 돋는 해로 비추시는 예수 – 어둠 속의 빛, 죽음 속의 생명 (78–79절)
🌅 대지 3: 돋는 해로 비추시는 예수 – 어둠 속의 빛, 죽음 속의 생명 (78–79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눅 1:78–79)
사가랴의 찬송은 마치 어두운 밤이 끝나고 동이 터오는 광경처럼 마무리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 장면은 단지 자연의 아침이 아니라, 역사와 인간 영혼의 어둠 속을 뚫고 들어온 초자연적 빛,
곧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묘사하는 장엄한 구속의 이미지입니다.
1. “돋는 해”는 메시아를 상징하는 시적 언어입니다
1. “돋는 해”는 메시아를 상징하는 시적 언어입니다
“돋는 해”(헬라어 ἀνατολή)는 문자적으로는 해돋이, 떠오름, 또는 동방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의 예언서들에서 메시아의 도래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되던 상징이었습니다.
📖 말라기 4:2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또한 스가랴 3:8; 6:12에서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싹”(Branch)**으로 부르는데,
이 “싹”을 번역한 히브리어 *צֶמַח (체마크)*가 헬라어 구약(LXX)에서는 바로 ἀνατολή로 번역됩니다.
즉, 사가랴가 말한 “돋는 해”는 단순한 시적 비유가 아니라,
구약 예언자들이 기다려 온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가리키는 선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떠오른 아침 해와 같으신 분입니다.
그분의 오심은 절망 속에 한 줄기 희망을,
죽음 속에 생명의 광선을,
혼돈 속에 질서와 방향을 가져오셨습니다.
2. 이 빛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임합니다
2. 이 빛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임합니다
사가랴는 예수께서 임하신 곳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치시고…”
이 장면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 이사야 9:2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가랴는 지금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다”는 표현은, 단지 인생이 고단하고 고통스럽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는 영적 상태,
소망이 사라지고 방향을 잃은 인간의 실존,
그리고 심판 아래 놓인 어두운 세계를 가리킵니다.
오늘날 이 세상 역시 여전히 어둠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
진리의 부재라는 어둠
윤리와 도덕의 해체라는 어둠
자기중심적 쾌락주의라는 어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없는 삶이라는 본질적 어둠
이 모든 어둠은 결국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비추는 참된 빛,
생명의 광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3. 예수님은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사가랴는 이렇게 찬송을 마무리합니다: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평강의 길”은 단순한 안락함이나 정서적 안정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개념에서 평강, 곧 **샬롬(שָׁלוֹם)**은
관계적 화목, 내면의 온전함, 공동체의 회복, 하나님과의 평화를 모두 포함하는 구속적 회복의 총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는 중보자이시고, (롬 5:1)
원수 된 자들을 하나 되게 하시며, (엡 2:14)
십자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평강의 왕이십니다. (골 1:20)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그 길은 결국 영원한 샬롬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결론: 사가랴의 찬송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결론: 사가랴의 찬송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사가랴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지만, 그의 눈은 자기 아들이 아닌 곧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침묵을 찢고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셨다! 죄를 사하신다! 빛이 우리에게 임했다!”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가랴의 외침을 따라 함께 선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