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한 가지(눅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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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ething>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2013년에 번역되어 지금까지 스테디셀러인데요.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이다.” 다양한 목표를 세우고 동시에 다 잘하려는 사람보다,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일을 찾아 몰두하는 사람이 더 큰 성과를 만든다고 합니다. 작은 핵심 행동이 도미노 효과처럼 연쇄적으로 큰 성공을 이끌어 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은 목표를 설정할 때 던져야 할 본질적 질문을 제시하는데요.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을 하면 다른 모든 것이 쉬워지거나 불필요해질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순원분들,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받기 위해 CCC에 오셨습니다. 학과 공부에, 알바에, 교회 봉사에, CCC까지 할 게 많죠. 동아리도 2~3개 하는 학생들 있습니다. 그런데 CCC만 해도 하는 게 많아 보입니다. 3월에는 캠퍼스모임과 채플이 제일 중요하다더니, 4월 다되면 순모임이 정말 중요하다 합니다, 5월 되면 여름수련회가 중요하다 할 겁니다. 순장되면 단기선교가 CCC의 꽃이라 할 겁니다. CCC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아니 진지하게 예수 제자로 훈련받기를 결단하는 시점에서 우리에게도 이 질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 따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을 하면 다른 모든 것이 쉬워지거나 불필요해질 그것은 무엇인가?” 순원들은 ‘좋습니다 하나만 정해주세요’하며 기대에 찬 눈빛이고요. 뒤에 계신 간사님들은 ‘무슨 말을 하려나’ 불안해하실 것 같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The Onething’을 말씀하십니다. 38절 시작이 이렇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누가복음은 앞부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9장 51절부터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떠나십니다. 그 여정의 끝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길, 그 길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 제자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 여정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길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길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제자도를 배우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본문 시작이 ‘그들이 길 갈 때에’ 입니다. 앞으로 나올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님께서 또 어떤 제자도를 가르쳐주실지 기대하게 합니다.
본문 38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중요한 정보가 나왔습니다. 예수님 일행을 초대한 여인의 이름은 마르다입니다. 뒤에 나올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가 초대했습니다. 마르다가 얼마나 분주해질지 벌써 예상이 됩니다. 저희 부부도 집에 손님을 초대하면요. 같이 아는 손님이더라도, 직접 초대한 사람이 더 많은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청소하고, 메뉴 결정하고, 식재료 준비하고, 요리하고, 세팅하고, 음악이라도 틀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지난 2월 말에 제가 청운재능대 학생들을 집에 초대했는데요. 요리를 못해서 메뉴 결정만 이틀 걸렸습니다. 마파두부와 굴미역국으로 해야겠다. 그래서 평생 이런 식재료가 있는지도 몰랐던 두반장까지 샀습니다. 전날 미리 연습한다고 저희 가족이 먼저 먹어보기도 했습니다.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당일에 변수가 생겼는데요. 유튜브 요리법은 2~3인분 기준이었던 겁니다. 10명이 좀 넘으니까 양념을 더 많이 하긴 했는데, 그래도 너무 싱거웠던 겁니다. 그 착한 학생들이 ‘마파두부 너무 맛있어요’ 한 마디를 안 해주는 겁니다. 빈말로라도 맛있다고 차마 말 못하게 한 제 잘못이죠. 그 말을 못하는 학생들도 얼마나 난감했겠어요. 맛보고 당황한 학생들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어떤 순장이 이렇게 변명을 해주었습니다. ‘간사님 집은 애기가 있어서 싱겁게 드시나 봐.’ 캠퍼스에 처음 와서 좀 친해지려고 불렀는데, 저만 교제는 제대로 못하고 정신이 없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물며 마르다가 노정에 지친 예수님 일행을 영접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집에 오신 겁니다. 얼마나 신경이 쓰였겠어요.
그런 마르다 입장에서는 부아가 치미는 일이 벌어지는데요. 3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9절,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동생 마리아가 멀찌감치도 아니고 주의 발치, 발 아래에 딱 붙어 있습니다. 게다가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엉거주춤 앉은 것도 아니고요, 아예 철퍼덕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인사드리고 일어나 언니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겁니다. 마리아 1인칭으로 앵글을 잡아보면요. 화면에 예수님 얼굴만 확대되어 보이고, 그분의 말씀만 또렷하게 들릴 뿐입니다. ‘듣다’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능동태입니다. 언니 눈치 보이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억지로 듣는 것 아닙니다.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듣는 행위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 듣는 행위는 마리아의 선택입니다.
마르다가 어떻겠어요? 40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한가지 행동 듣기만 할 뿐 아니라 그 한 가지에 몰입되어 있는 마리아의 상태와 대조됩니다, 마르다는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합니다. 마르다의 속내를 한국말 네 글자로 하면 이렇습니다. ‘저게 지금...’
그런데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것도 공손히 마리아좀 데려가겠습니다 하지 않고요.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까지 원망하듯 질문형으로 묻습니다. 예수님이 무안하실 정도로 감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질문형 다음에는 예수님께 명령형으로 말하는데요.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명령하도록 마르다가 예수님께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마르다는 확신이 있는 겁니다. 내가 옳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당연히 내 편 들어주시는 게 마땅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나그네와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게 구약에서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덕목입니다.
마르다 마음이 이해는 가는데요. 여기서 마르다가 놓치는 게 보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 초대했습니다. 영접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마음 편히 쉬시고 음식 드시고 말씀도 전해주시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런데 방금 발언을 통해서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단시켰습니다. 무엇보다 귀한 손님 예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나 자신이 정작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아이러니가 보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예수님 자체가 중요하신가요 아니면 예수님을 위한다는 명목의 일과 나 자신의 성공이 더 중요하십니까? 둘 중 어느 하나는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좋고 좋은 것을 붙여놓을 때 극적으로 부각되는 최우선순위를 묻는 겁니다. 고3 때는 어떠셨나요? 예수님 위해 공부하고 좋은 대학 가야 하는 나 자신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고등부 예배 자리가 더 소중하셨나요?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은 후순위지만, 많은 사역에 성공적인 결과를 내는 제자와, 헌신은 좀 덜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제자 중 예수님은 누가 제자답다 하실까요?
예수님의 대답을 보겠습니다. 41-42절,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실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야 빨리 가서 언니부터 도와라.” 그런데 마르다를 부르십니다. 두 번이나 부르세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마르다는 예수님 무안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마르다 마음을 살피며 친근하게 부르십니다. 두 번이나 이름을 부르시는 데에는 안타까움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자기 확신과 분노에 차 있는 마르다를 듣는 태도로 진정시키려면 두 번이나 이름을 불러야 했을 겁니다. 마리아처럼 ‘너도 좀 들어봐’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Only one thing,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단다.” 예수님을 위한 많은 일을 몇 가지로 줄이고 그 몇 가지 마저 딱 하나로 줄여도 족하시다면 그게 뭔가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리아가 택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Only one thing입니다. 아무리 중책을 맡아도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제자의 핵심, 반대로 아무리 중책을 맡고 많은 일을 해도 이것을 빼앗기면 제자의 삶이라 할 수 없는 핵심, 그것은 주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제자는 삶의 핵심 자리가 주의 발치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최선으로 헌신하는 순장님들이 들었으면 좀 서운했을까요? 오늘 여러 모양으로 섬기신 순원분들, 이런 수고를 순장님들이 매주 해주니까 여러분이 채플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걸 아시겠지요? 마르다 민망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을 환대하고 섬기려는 마르다의 순수한 마음, 예수님께서 하찮게 여기신 게 아닙니다. 밤늦게까지 대표단회의 마치고 또 해야 할 과제가 있어 도서관으로 향하는 순장님들, 또는 잠깐 있는 공강시간에 밥도 제대로 못 챙기며 순모임을 꾸역꾸역 해내는 순장님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다 아십니다. 셤김 너무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교제하는 일을 미룰 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좋은 것을 빼앗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르다에게 좋은 쪽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면 마르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삭개오는 예수님 보려고 체면 불고하고 뽕나무에까지 올라갔습니다. 혈루병 앓는 여인은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무리 속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중풍병자 친구들은 지붕을 뜯어내고라도 예수님께 달아 내렸습니다. 심지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는 게 마땅하지 않다는 모욕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얼마나 치열한가요. 그런데요. 마르다는 예수님 말씀을 방구석 1열에서 들을 기회가 있는데도 일하느라 못 누립니다. 제자는 세상으로 부름 받기 전에 예수님께로 부름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주님과 감히 교제할 수 있는 자녀요 제자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한 감격이 사역과 삶의 동력이 되시는지요?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대제사장 조차도 감히 함부로 하나님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못 들어갔습니다. 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면 죽었다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죽었습니다. 짐승에게 안수하고 내 죄를 전가한 걸로 인정하여 잡아 각을 뜨고 피가 낭자한 제사의 현장. 하나님 앞에 서기에 내 죄가 이렇게 참혹하구나 뼈저리게 느끼는 풍경과 피비린내. 그나마도 일시적인 용서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듯 처절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위험한 동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늘 휘장이 찢깁니다. 제사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한 명 한 명이 우리를 대속하신 어린양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보좌는 은혜의 보좌인데 이 죄인이 그것도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권세를 주셨습니다.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 임재 앞에 방구석 1열에서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은 몰랐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경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까지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입니다. 그나마도 라틴어로 되어 성도들은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일반인은 꿈도 못꿀 정도로 비싼 성경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말로 다 번역되고 인쇄되어 이리도 싼 가격에 성경을 다 가질 수 있는 시대에 삽니다. 아니 어플만 다운받아도 성경을 보는 시대입니다. 이 성경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이 누구인지, 우주와 인간의 시작이 어떠했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며, 이 세상의 끝은 어떨 것이며, 그 끝을 염두할 때 지금 삶의 방향은 무엇이며, 무슨 비전을 품어야 하며, 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우리 손 안에 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발치에 앉을 수 있는 은혜의 때에 살면서도 그 은혜를 너무 사소히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왜 제자는 예수 발치에 먼저 앉는 것이 중요할까요? 왜 사역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여야 할까요? 짧은 시를 한 편 소개하고 싶은데요. 유홍준 시인의 <사람의 쬐다> 일부입니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사람이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시인은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 산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사람과 사귀어야 한다, 교제해야 한다. 이런 표현보다 쬐어야 한다는 표현이 더 많은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햇볕을 쬔다 하죠. 쬐는 건 생명과 관련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쬐는 것도 생명과 관련이 있어서 사람을 오랫동안 안 쬐면 검버섯과 저승꽃이 핀다고 합니다. 빨랫감도 햇볓을 쬐어야 바싹 마르고 향긋합니다. 사람을 쬐지 않은 사람 내면은 퀴퀴한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 이 좋은 공동체에서 마음을 열고 사람을 쬐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사람을 쬐지 않아도 검버섯이 핀다면, 말 그대로 생명이신 예수님을 쬐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쬔지 오래된 분들 계실까요? 고등학생 시절 주일예배보다 공부가 우선이고, 교회 가더라도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다 온 것 아니라 그냥 의자에 앉아 있다 가기를 너무 오래한 채로 이 자리에 계신 분 없을까요? 사실은 부모님 신앙으로 오랜 시간 예수님 주변을 서성이기만 했지, 그분의 발치에 앉아 인격이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게 뭔가 낯선 분이 계실까요? 예수님을 위한다는 명목의 나의 성공이 예수님보다 중요하여 정작 예수님을 바라보지는 못하는 분들 계실까요? 순원 때 잘 누리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여러분 다른 거 안해도 되니까 먼저 예수님 좀 쬐세요. 스크린 전자파 조금만 쬐고 예수님 많이 쬐세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쬐지 않으면 자기가 주인인 줄 알지 않겠습니까? 창조주가 계시다는 걸 잊고 살면 인생의 목적도 묻지 않습니다. 내 삶이 우주인 줄 알고, 내 관심과 한계 밖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쬐지 않는데 캠퍼스 복음화가 마음에 들어오겠습니까?
또 자녀가 아버지를 쬐지 않으면 그 삶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가 공급하시는 걸 못 믿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제자의 삶 어떻게 살겠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할 생각도 못하고 자기 힘으로 삽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쬐지 않으면 교만해지지 않겠습니까? 이 죄인이 날 구원하신 구속주를 쬐지 않으면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그 마음에 세워지겠습니까? 본문과 같은 장, 누가복음 10장 앞부분에는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역의 성공보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는데, 예수님 쬐지 않으면 사역의 성공으로만 기뻐하고 자만합니다. 유한한 인생이 부활을 소망하게 하는 예수님을 쬐지 않으면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땅의 것에서 시선을 돌려 하늘의 것 구하는 삶 능히 살 수 있겠습니까? 유한한 자가 영원하신 주를 쬐지 않는데 어떻게 영원히 가치 있는 일에 내 인생을 걸 수 있겠습니까? 한치 앞도 모르고 근시안적으로 사는 먼지 같은 자가 반드시 도적같이 다시 오실 것이며 심판하실 주님을 쬐지 않으면 경외함으로 깨어있겠습니까? 그저 세상에 취해 삽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쬐지 않는데 빛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제자라면서 예수를 쬐지 않는데 제자의 삶이 뭔지나 알며 살겠습니까? 생명이신 예수님을 쬐지 않고 어떻게 생명력 있는 순사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더군다나 새친구들 계시다면, 먼저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구원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영양분이 있습니다.
예수님 쬐지 않으면서 순장 살면요. 흉내 내며 사는 겁니다. 다음 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처럼요. 겉만 그럴듯하게 외식하며 삽니다. 제자의 기본기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겁니다. 세계기도의 날 저의 첫 번째 기도제목도 이겁니다. 저도 여전히 가장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순원분들 평생 순장 삶의 초석을 잘 놓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누가복음 10장이 끝나고 바로 다음 절 1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걸 하면 저걸 포기해야 하는 시간과 공간과 육체의 한계 속에 사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지구 어느 구체적인 날과 시간에 지구 어느 구체적 장소에서 기도하십니다. 본문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도 모범을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는데 첫 마디를 이렇게 하라 합니다. ‘아버지여’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여’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발치에 앉아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눴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기도하셨습니다. 바쁘고 피곤한 예수님의 적극적 선택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기 원하시는지요? 예수님처럼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순원들에게 바라시는 한 가지, 그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많은 사역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플, 캠퍼스 모임, 순모임, 여름 수련회 등등 많은 데 어떤 하나를 해야 하는지 궁금하실까요? 이 모든 것을 주의 발치에 앉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오늘 예배 섬긴 순원분들 혹시 실수했더라도 괜찮습니다. 오늘 내 역할을 퍼펙트하게 했다는 기쁨만 가지고 이 자리를 떠나면 예수님 주변에 서성이다 가는 겁니다. 오히려 이 예배의 자리에 들어오며 예수님께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순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저 여기 왔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예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곳 CCC로 부르신 이유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리도 많은 청년들로부터 영광받고 계심이 벅찹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제자의 삶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공동체에서 저를 훈련시켜 주세요. 오늘 우리 순원들의 예배를 통해서도 주님 한 분만 영광 받아 주세요. 주님 말씀해주세요. 듣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새생활시리즈 5~6과에 나오지요.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도 순장님들 도움 따라 훈련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사랑하는 기쁨 빼앗기지 않고, 그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