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7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7 viewsNotes
Transcript
본문을 몇 번 읽어보면 느낌이 원수를 만난 나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일어나사(7), 막으시며(7), 깨어나서(7), 심판을 요구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3-5절까지 잘못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게 살았다면 원수에게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이러한 심판의 근거는 ‘나의 성실’(8)이다.
그런데 나의 성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깨어나고’, ‘심판’ 하시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원수에게 구해달라는 요구가 정당하기 위해 자기의 성실을 심판자에게 던진다. 그만큼 시편 기자의 간절함이 있다. 그는 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다. 기도는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간절하기에 무조건적 요구를 하는 식이 이유로 기도라고 오해 해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의 확실은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심판의 요구가 아니라 ‘공의로운 심판자’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하심’에 자신의 성실함도 분명하게 판단을 받을 것을 알고 있다. 시편은 대조를 하는 데 ‘의인’과 ‘악인’이다. (1편 참고). 대조로만 끝나지 않고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끝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의인의 삶’을 강조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길이 악인의 길이 아님을 자신의 행위로 변호하는 것이다. 그 길을 살다가 만난 원수는 여호와 하나님께 심판 받음이 그분의 공의에 따라 일어난다. 그래서 심판을 ‘속히’ 또는 ‘빨리’ 해달라는 요구이다.
간절함 속에 일어나는 기도는 많은 논리를 만들어 하나님께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전 전쟁 영화를 보면 진지를 방어하는 아군이 밀려드는 적군에 버거워 포격을 요청하는데 문제는 방어 진지로 포격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격이 아군의 진지로 향할 때 아군은 자신의 벙커로 들어가 목숨을 걸고 포격을 견뎌내는 것처럼 시편 기자는 자신의 성실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 아래로 피하는 결단을 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임박한 위험에서 구해달라고 호소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도는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라고 간결하다. 위험 속에서 기도는 크고, 간결한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이라는 시간에 ‘의인의 길’을 따라 살아야 한다. 기도자에게 의인의 길을 따라 살아 온 삶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근거가 된다. 자신의 무죄함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근거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갖는 복이다.
지난 주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살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또는 우리를 또는 공동체를 심판한다면 어떻게 심판이 정의/공의로운가를 의심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을 사는 우리는 굽어진 판결 뿐만 아니라 그러한 힘을 가지고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모습을 보고 있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가? 하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하기 보다 ‘아닐 수 있다’ 또는 ‘어떻게 100% 공의로울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는다고도 극단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7장의 기도자는 우리가 볼 때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지만 기도자는 하나님이 피난처를 제공하신다는(1) 것 그래서 자신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건져 달라고 기도(2)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안계시다. 왜냐하면 심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앞서 우리가 자주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차이가 있다면 자기의 잘못을 알면서도 심판을 받지 않으니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과 자신을 살피며 비록 자신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질지라도 자신까지 파멸하지 않고 건져 주시기를 바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을 말합니다. 1. 정직한 자를 구원하실 것(10),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직접 심판하실 것(11-13)인데 의로움은 불의를 보고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하지 않고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11) 그래서 분노는 심판을 촉발한다.(12-13)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가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 일어난 과정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의 압제로 인한 고통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모세를 준비, 보내셨는데 바로는 자신을 더 악하게 합니다.(14-16) 하나님께서 세상에 만연한 악에 대해서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징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압제할 뿐만 아니라 유아를 선택적으로 살해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행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회개를 외쳤을 때 니느웨는 사람들을 죽이고 허리에 목을 매달고 다니는 폭력적인 나라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7족속을 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난폭성을 지금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7족속은 애굽이나 니느웨와 같은 폭력의 나라들이었습니다.
민족 뿐만 아니라 개인에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을 믿을 때(17)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출15장 홍해의 사건을 통해 모세의 찬양, 미리암의 찬양처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평안’을 받습니다.
부당한 것 같은 나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먼저 나를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 때(아는 만큼) 믿고 맡기게 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