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
Notes
Transcript
제자의 삶과 복 (1)
마 5 : 1~3절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눅 12 : 16~21절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무슨 말씀을 준비할까 기도하며 고민하다가 “제자의 삶과 복”에 대해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8복에 대해 나누려고합니다. 이 8복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어느 특정한 날  제자들을 불러 모아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기자가는 예수님이 평소에 제자들을 만나 마음다해 교훈하신 그 진수와 핵심의 말씀들을 모아 요약한 것이 8복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임명하시고 난 후 그들이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6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먼저 임명하는 장면이 나오고 난 다음 8복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이처럼 제자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와 자세, 또는 그들이 구하여야 할 것, 그리고 누리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8복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즉 제자의 삶의 방식 혹은 제자의 삶의 태도에 대해 가르셨습니다. 
우리의 궁국적 목표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불량에 이르는 것 아닙니까? 참 제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실제로 누리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산상수훈 8복을 통해 성숙한 제자로 자라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것을 구해야 하는지, 우리 삶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 져야 하는 지, 그러면 어떤 복을 받는지에 대해 함께 배우고자 합니다.
이 산상설교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된 사람들이 목표로 삼고 추구하는 이상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라고 권면해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학자가 이 산상설교 해설을 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너무도 과대평가했다”. 그 만큼 인간의 나약함으로는 그 말씀을 실현하기가 어렵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자 또한 적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포기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것을 사모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거듭났고, 제자로 살기를 결심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더 갈망합니다. 더 기대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다 오붓하게 쉬는 토요일 저녁, 우리는 지금 이렇게 모여 예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 밤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큰 도전과 깨달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이 새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팔복의 첫번째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 ‘가난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토코스 입니다. 이 뜻은 그냥 조금 가난해서 노동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되는 절대적 극빈상태를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상태를 말합니다. 자, 그럼 보십시오. 심령이 궁핍난자가 복이 있다니 이건 쫌 말이 안 맞지 않습니까? 오히려 심령이 부요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해야 맞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제자가 되어가는 첫단계가 심령이 궁핍한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 빈곤상태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영적상태가 아무것도없는 파산난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외면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영적 상태가 텅텅 비워져있다는 사실을 진단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차원 즉 영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눅 12: 16~21절에서 비유로든 “ 어느 한 부자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한 부자가 예전부터 농사가 잘 되었는데, 올해도 풍년이 들어 수확량이 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곡식들을 쌓아 둘곳이 없어 고민합니다. 마침내 그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들을 거기 쌓았습니다. 그리곤 그것을 보고 마음이 흡족했겠지요.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해 쓸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그 사람의 생각과 생활 방식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부자는 말할때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주어인 “내가” 라는 표현을 6번이나 사용합니다. 한국말은 보통 주어를 생각합니다. 특히 자신을 가리키는 주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의 번역에선 자신을 가리키는 주어가 6번이나 등장합니다. 이 것을 볼 때 이 부자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하나님은 부자의 잘 못된 생각에 직격타를 날리십니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 부자는 물질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전부인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믿지 않았습니다. 진짜 영혼과 생명을 유지하고 책임져 주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부자는 먹을 것이 풍족하면 평안히 먹고, 쉬고, 즐거울 줄만 알았습니다. 그것이 끝인줄 알았습니다. 이 부자는 창고에 재물이 많아 부자였지만 그의 심령의 창고는 휑하니 텅텅빈 빈곤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참 생명을 공급받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한 세계를 인정하십니까?
진정 이런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는 곧 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의 삶과 복을 누리기 위해선 방금 말했듯이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둘째는, 그 영적 세계를 인정한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가 늘 어떠한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한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있느냐? 아니면 다른 것으로 그자리를 대체 시키고 있느냐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1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부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 맺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재산은 풍부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산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런 수고나 투자도 하지 않았기에 그의 영혼은 절대 빈곤상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살아계신자로, 창조주로, 생명의 주인으로, 삶의 인도자로, 구원자로, 궁극적인 생명으로 인식하고 인정한다면 그 분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 되십니다. 우리의 운명이 그분께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에 가장 많은 신경을 집중하고. 시간을 쓰며, 에너지를 쏟으십니까? 저는 잘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그것에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을 쏟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집중을 하나님께 먼저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땐 옳은 소리고 맞다 싶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말을 실천하려 하거나 집중하려하면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 너무 바쁘고,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만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말입니다. 시간과 에너지 사용에는 그 총량의 한계가 있기에 하나님께 집중하려 할 땐 이미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차원과 신앙의 차원 사이에 큰 괴리 감이 든다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함에 있어서 큰 장애물중 하나는 바쁘게 돌아가는 삶입니다. 늘 분주합입니다. 그래서 늘 힘이 모자랍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과 사귐이 끊이지 않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불필요한 것들은 걷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의 분주함에 내가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것 마저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루 24시간이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영적인 시간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과 속 즉, 거룩한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뉘지 않고 모든 것이 성스러운 일로 변화 될 것입니다.
한번 도전해 보십시오. 신앙은 도전입니다. 신앙은 도약입니다.
제가 잘 쓰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단어지만 자극을 드리기 위해 말씀드립니다.
투자하십시오. 하나님께 투자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께 투자하십시오. 우리의 심령이 빈곤하지 않도록 밥 먹는 것부터, 하는 일, 자녀 교육, 사람과의 관계등 우리 삶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 투자하십시오.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사람들이 손해를 볼 위험을 감수하고 영끌하여 주식에 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크게 얻으려는 것 아닙니까? 투자는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염두해 두고 자신이 피땀 흘려번 재산을 겁니다. 투자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합니다. 그래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투자한 돈뿐아니라 생명 또한 뺏어 갑니다. 운이 좋아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주식투자는 늘 위험성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안전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수학자 파스칼이 확률적으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없다면 잃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이 있다면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이 없다면 잃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이 있다면 지옥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말을 우리의 운명을 건다는 말로 바꿔 이해하시면 더 와 닿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늘 정비하시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충만하도록 여러분의 영을 그분께맡기십시오.
심령에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은 늘 겸손합니다.
마치 신앙의 깊이가 깊은 사람일수록 나는 영적으로 풍요하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앙의 깊이가 깊던, 깊이가 얕던, 하나님 앞에서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합니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의 크기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신앙의 분량이 터무니 없이 작고 부족하다는 사실만 확인 받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으로 일어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죄성이 우리를 무너 뜨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늘 부족합니다. 늘 목마릅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의 영으로 나를 채워주소서라고 기도 할 뿐입니다.
우리의 영이 늘 쉬지 않고 하나님께 조율 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하루만 게을리 하면 본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적 빈곤의 상태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복된 이유를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마 5:3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천국은 다른 말로 천당,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고, 하나님의 운행하심이며,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 곳입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나라를 잘 못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크게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어느 공간이나 장소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구 소련의 우주비행사들이 처음 우주로 올라가 했던 말이 “하늘 끝에 예수님이 안보이더라, 그러니 신은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죽어서만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지금 이곳에, 여기에 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완전히 도래 할 것이지만 지금 이미 이곳에 또한 와 있습니다.
엡 4-6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서는 닿을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우리 내면 깊은 곳에 또한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말은 죽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모든 것을 공급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책임지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그분 자신이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절대신뢰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자 만이 하나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저의 이야기가 너무 뜬 구름 잡는 소리 처럼 들리십니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확실히 손에 잡히는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했습니다. 그분의 삶 또한 늘 분주했지만 심령이 가난하지 않도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맺으셨습니다. 그 분이 보여준 삶과 사역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밖에는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발을 딛고 계셨지만 늘 하나님 나라에서 사셨습니다. 늘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결국 미련한 인간들에게 저주받아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부활 생명을 주심으로 그분을 다시 살리 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곁에서 영생을 누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리얼 현실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실존이며, 이것이 복입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아 봐야하지 않을 까요? 하나님 나라가 그냥 뜬 그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 깊이 경험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체험해야 하지 않을 까요?
진정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십니까?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원하십니까?
길은 한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이 빈곤한 상태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그 영이 충만해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여기에 와있습니다. 다만, 그 나라를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만 있을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본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 그 나라에 살아야 옳습니다. 아니면 그 나라에 살고자 매일 발버둥 쳤어야합니다.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우린 그 나라에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심령의 갈급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시선을 고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저와 여러분 사이에 하나님께서 새일을 시작하고 계시며, 우리의 결단을 통해 이미 그분의 통치안에 들어 갔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도약하며 제자의 길을 걷는 여러분들께 하나님의 복이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생략
찬양, 말씀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고 결단하는 시간을 갖는다.
참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결단.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주의 나라가 임할 때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