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13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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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의 주인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여러분들을 너무나도 환영합니다.
특별히 오늘 이 자리에 처음 나아온 15기 친구들이 많을텐데요, 혹시 한번 손들어줄 수 있나요? 네. 우리 오늘 처음 온 15기 친구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네줍시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네. 저도 다시한번 여러분들을 환영하고요, 우리 하임 공동체에서 말씀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을 깊이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제 소개를 간단하게 하자면, 저는 서울 용산에 있는 삼일교회 학원선교부에 소속되어있는 맹주현 목사라고 합니다. 하늘고는 2023년부터 섬기고 있구요, 아마 제가 어디 교단인지도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텐데요, 저는 장로교 합동 교단 소속 목사입니다.
아마 이곳에도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다양한 교단 소속 교회에 다니고 계신 분들이 있을텐데요, 기본적으로 하임 공동체는 초교파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아무래도 장로교의 예배와 신학이다보니, 아마 제가 말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장로교 베이스에 있다라고 생각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오늘은 우리 15기 여러분들이 공식적으로 처음 우리 공동체와 예배에 방문하신 날이니까요, 저희 공동체에 대해서 소개가 필요할 겁니다. 그 소개에 대한 내용들은 예배 이후에 우리 졸업생 교사들이 각각 소개와 간증까지 이어서 해줄테니까요, 자세한 내용은 그 시간에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는 말씀을 나누어야겠죠? 오늘 나눌 말씀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9절부터 18절 말씀.
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지난달에 나눴던 누가복음을 계속 이어서 나누게 되겠습니다. 우리 지난달 예배에 함께 참여해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가 누가복음 말씀을 나누면서, 그 내용에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있었고, 겨자씨 비유도 있었고, 또 탕자의 비유도 있었죠.
오늘도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또다른 비유의 말씀을 보게 될텐데요, 오늘의 비유는 포도원 농부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실 때, 듣는 대상들이 있었는데요,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오늘 본문 앞에 있는 20장 1절과 뒤에 이어지는 20장 19절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제가 늘 말씀을 전할 때, 배경과 상황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었죠? 오늘 이 본문에서도 앞선 상황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20장 1절부터 8절까지 등장하는 내용인데요, 당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상황이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호산나 찬양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는데요, 들어오시고 나셔서 하셨던 큰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성전 청결 사건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오셔서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을 채찍질하며 내쫓으신 사건인데요, 당시 왜 성전에 장사꾼들이 있었냐면, 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예배하러 올 때, 제물을 집에서부터 준비해서 가져오기가 꽤나 어려운거에요.
그러다보니 성전 앞에서 전문적으로 제물을 준비해주고 그것을 돈을 받고 파는 상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이죠. 그저 제사를 떼우려는 식으로 하고자하는 그들의 마음을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와서 대제사장들 입장에서는 난동을 부리고 하니까,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더 좋지 않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계속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말씀을 가르치냐, 누가 당신에게 이렇게 하라 했는지 말하라.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세례 요한의 세례는 어디서부터 온거냐? 반문하시죠. 그러자 당시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가졌던 인기와 지지로 인해 그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모른다고 하니, 예수님도 그러면 나도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죠.
그 이후에 바로 오늘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서부터 온거냐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와 연관된 이야기들이 이 비유 안에 녹아들었겠다는 것을 우리가 예측해볼 수 있겠죠?
그러면 함께 살펴봅시다.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냐, 한 사람이 포도원을 조성을 합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소작을 줍니다. 그렇게 소작을 하도록 하고 본인은 타국에서 오래 머물다 소출의 때에 맞춰 돌아오죠.
이제 어느정도 포도가 나올 때가 되었으니, 농부들은 뭘 해야해요? 생산물을 주인에게 가져다 주어야 하죠. 그래서 주인은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 받아오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소작농들이 종을 때리고 아무것도 주지 않고 보낸겁니다. 포도 생산물 주기를 거부한 것이죠.
주인은 기가 막혔을거에요. 왜냐하면, 그가 보낸 사람이 종이긴 했지만, 그 종이 누구의 명령을 받아서 간거에요? 주인의 명령을 받아서 간 것이죠.
그러면 그 종은 종으로서 간거에요? 그렇지 않죠. 물론 본인이 그 포도원 주인은 아니지만, 주인의 명을 받아 갔으니, 주인의 자격으로 소작농들에게 간 것이죠.
그러면 소작농들은 그 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주인을 모시듯 잘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종도 직접 주인에게 가서 소작농들에 대해 잘 이야기해줄 수 있겠죠.
가장 좋은 예가 어디있냐면, 여러분들 공부하셨을 한국사에 등장합니다.
우리나라가 조선시대에 어느 나라를 섬겼죠? 중국을 섬겼죠. 명나라와 청나라를 아버지와 같이 섬겼습니다. 당시 중국이 주변 지역을 관할하던 조공 체계의 질서에 속했던 것이죠.
그렇게 조공 질서에 속하면, 어떤 일을 하게 되냐, 때에 맞춰 중국에서 사신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그 사신은 조공국으로 와서 황제의 메시지를 전해주죠.
그러면 조선에서 그 사신은 어떤 지위를 갖게 되냐, 바로 황제와 거의 비등한 지위를 갖게 됩니다. 그 사람은 중국에서 그저 신하 1에 지나지 않지만, 조공국 조선에서는 마치 황제처럼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적이 있을텐데요, 청나라 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읽게 되면 조선 왕이 어떻게 하죠? 그 사신 앞에 엎드려서 칙서 내용을 듣습니다.
이런 것처럼 사신을 황제로 대하는거에요. 그리고 신하들도 그 사신이 머무는 동안 수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심지어는 뇌물까지도 꽂아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야 그 사신이 돌아가서 황제에게 좋은 이야기들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것처럼 주종의 관계에서 종은 주인의 메시지를 들고 온 자를 잘 대해야 하는거에요. 근데 이 비유에서 소작농들이 그와는 완전 반대로 행동을 한 것이죠.
그러면 어떤 의미로 비춰질까요? 우리는 주인 당신에게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죠.
사실 이렇게만 하더라도 주인이 화가나서 바로 사람들을 끌고가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주인은 다시 한번 다른 종을 보냅니다.
아마도 혹여나 뭔가 오해가 있거나 했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두번째 소작농들에게 간 종 역시 맞아서 돌아오죠. 심지어 두번째 종은 능욕까지 당하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주인은 한번 더 종을 보냅니다. 그리고 세번째 종 역시 몸이 상해서 돌아오게 되었죠.
주인은 고민에 빠집니다. 대체 누굴 보내야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까.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을 보내면 그래도 존대하겠지.
아마 주인이 했던 생각은, 지위가 낮은 자를 보내니까 그들이 무시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예 지위가 높은 아들을 보내려 한 것이죠.
앞서 예시에 적용해보자면, 조선에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가 들어온다는 것이 되겠죠. 당연히 이전 신하의 경우와는 급이 다른 방문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은 아들을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농들이 멀리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서로 의논을 하기 시작합니다. 저기 주인의 아들이 온다. 저 아들은 상속자니까 죽여 없애면 상속받을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포도원을 비롯한 그 유산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작농들은 아들을 내쫓아 목숨을 빼앗아버립니다. 어쩌면 다른 종들보다도 더 극심한 행위를 아들에게 행한 것이죠.
예수님은 여기서 한번 끊고 사람들에게 질문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겠죠. 예수님은 16절의 이야기로 대답하십니다. 직접 주인이 포도원으로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될 것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죠.
그러자 예수님은 이야기를 마무리하시고 그들의 이야기에 반문하시죠.
그러면 말씀에 기록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이렇게 오늘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전하신 비유의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까요. 그리고 왜 백성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반응하고, 예수님은 왜 말씀을 인용하며 반문하셨을까요.
이 비유의 이야기에 숨겨진 뜻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국어 시간에 잘 배우셨겠지만, 비유라는 것은 보통 어떤 의도로 사용하게 될까요?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유의 이야기에서 사용되는 것은 상징일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상징들이 사용이 되었겠죠. 그러면 한번 그 비유의 내용들이 상징하는 것들을 찾아봅시다.
가장 먼저 등장한 등장인물, 포도원 주인은 누구를 상징할까요? 바로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조성한 포도원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 포도원에서 소작일을 하던 농부들은 누구를 상징할까요? 바로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기관들과 대제사장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주인이신 하나님이 유대인 농부들에게 보낸 종은 누구를 상징할까요? 바로 구약시대 내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던 선지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안타깝게 희생당한 주인의 아들은 누구일까요? 이건 아마 잘 아시겠죠. 바로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이야기의 진정한 메시지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고 그것을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에게 맡기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나라를 경영하고 운영하다보니 어떤 착각에 빠지게 되었냐, 이것이 원래 자신들의 것인냥 착각하게 된 거에요.
그러니 그 포도원을, 이스라엘 나라를 자신들의 맘대로 운영하기 시작하게 되었죠.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그들의 잘못을 수정하기 위한 메시지를 담아 선지자들을 보내십니다.
하지만 그 선지자들을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지 않게 됩니다. 결국 선지자들은 수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죠.
예를 들어볼까요? 엘리야시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수없이 죽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갈멜산 전투를 행할 때, 엘리야는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또 어땠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다 나라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남유다 왕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과 반대된 이야기,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는 거짓 메시지를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는 행동을 합니다.
이렇듯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했고, 메시지를 받아야 할 백성들은 그 말씀을 거부하고 계속 나라를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운영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지금 농부들 앞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을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구타와 모욕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목숨을 빼앗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
실제로 당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어떻게든 없애고자 논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지혜로서 충분히 무찌를 수 있다 판단하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어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 했죠.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그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고, 결국 그들은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바로 로마를 이용하여 사형을 시키도록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시도가 성공한 후,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치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 된 것처럼 생각하던 농부들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죠.
하나님은 그 유대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다른 이들에게 넘기십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포도원, 즉 이스라엘은 실제 이스라엘이 아닌, 이후에 있을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결국 그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 가게 되죠? 유대인들이 그렇게 무시하던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구약시기 모세를 통해 받았던 제사장 나라의 지위를 잃게 되었고, 그 지위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넘어가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에 의해 수많은 이방의 교회들이 세워지는 아름다운 결론으로 맺어지게 됩니다.
본문 16절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외쳤던 이유도 그 마지막 결론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듣던 모든 백성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상당부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용하신 포도원이라는 개념은 이미 구약의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죠.
이사야 5장만 보아도 좋은 포도를 심었는데 나쁜 들포도가 맺어졌다는 비유를 사용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말씀하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있던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운영하고 있던 자신들이 심판받아 멸망하고 나라는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게 된다는 이 비유의 숨은 뜻을 이해하고 그것이 벌어져서는 안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유대인들에게 소중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이죠. 자신들의 나라와 그 안에서 자신이 누릴 영광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그 마음을 보시고 말씀으로 반문하십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의 말씀인데요,
시편 118:22–23 NKRV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말씀은 어떤 내용인가요? 건축자가 버린 돌, 즉 집을 짓는 건축자가 전혀 쓸모 없다고 생각하여 버린 돌이 이후에 어떻게 쓰인다는 거에요? 집의 머릿돌, 즉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행하셨다고 말씀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에 덧붙여 이 모퉁이의 머릿돌 위에 떨어지면 깨어질 것이고, 사람위에 돌이 떨어지면 사람이 가루가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모퉁잇돌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실 십자가 사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아들이 죽고 포도원이 넘겨지는 그 상황을 벌어지지 않아야 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죽음과 심판은 그저 그 자체로 모든 것의 종결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죽음과 심판은 종결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죠.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듯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수없이 고난당하시고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수많은 이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모든 죄악과 죽음의 굴레를 깨어버리십니다.
그 주님은 자신의 사랑으로 새로운 집을 지으십니다. 바로 교회라는 집을 지으시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집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그 머릿돌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집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사랑을,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릿돌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농부들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돌 위에 떨어져 깨어질 것이고, 머리 위로 돌이 떨어져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돌의 이미지는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6:18 NKRV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 이름 자체가 반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죠. 그리고 그 반석 베드로 역시도 그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베드로전서 2:6–7 NKRV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보배로운 모퉁잇돌 예수님 위에 주님은 교회를 세우실 것이고, 그렇기에 교회는 그 반석 위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보배로운 반석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그 돌은 걸려 넘어지는 심판의 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본문의 말씀을 전하고 나신 이후 말씀 그대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보혈의 피를 흘리시며 죽음을 맞으십니다. 그리고 사흘 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그 부활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의 핏값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이 원래 나의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 하나님, 왜 이거 안해주세요. 왜 나 사랑하신다면서 내 삶을 내가 원하는대로 안해주세요.
주님, 이건 제 삶이니까 제 시간 제가 알아서 쓸게요. 주일 오전만 드리면 충분하시죠? 나머지는 제 맘대로 쓰겠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여러분, 방금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살리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 포도원 농부들처럼, 주님의 포도원이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맘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포도원 소작농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 삶은, 이 세상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핏값으로 사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삶을 우리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뜻하시고 원하시는 그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모퉁잇돌이신 주님께 의지하시면 됩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는 아름다운 집 안에서, 그 집을 받치고 있는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든든한 반석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키시고, 그 안에서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으로 그 삶을 온전하게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여러분의 이 학교에서의 삶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여러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 판단과 가치관, 숫자로 여러분들을 줄세우는 그러한 현실들로 여러분을 뒤흔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든든한 반석이신 주님입니다. 그 주님은 여러분들을 흔들려는 모든 세상의 시도 앞에서 여러분들을 붙드실 것이고, 주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교회라는 집에서 여러분들이 안식을 누리도록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하임 공동체 여러분들, 주님 사랑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 이 하임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사랑, 공동체의 사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앞에 펼쳐지는 여러 고난들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는 우리 귀한 하임 공동체 한 영혼 한 영혼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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