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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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은혜
제목: 하나님의 은혜
본문: 사도행전 15장 5-11절
본문: 사도행전 15장 5-11절
찬송: 303장 날 위하여
찬송: 303장 날 위하여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우리는 살면서 늘 조건을 마주합니다. 일터에서는 "이 정도 실적을 올려야 인정받는다", 가정에서는 "이런 모습이어야 좋은 부모다"라는 조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이런 능력이 있어야 성공한 사람이다"라는 기준이 끊임없이 우리를 평가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에도 조건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해야 구원받는다", "저렇게 해야 좋은 신앙인이다"라는 생각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중대한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이 질문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라 불리는 이 역사적인 모임에서, 교회는 믿음과 구원의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처음에 유대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방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관습, 특히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종교적 관행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본질,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은혜>
<베드로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은혜>
베드로는 전형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불결한 자'였고,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베드로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보여주시며 "일어나 잡아먹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부정하고 속된 것을 먹은 적이 없다"고 거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셨고, 베드로에게 이방인도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무엇인가를 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먼저, 우리의 반응은 그 다음입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에 이끌려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베드로는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8절)라고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나 배경이 아닌 사람의 내면을 보십니다. 인간은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고넬료는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셨고, 그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등합니다. 로마 제국의 백부장과 갈릴리의 어부, 세금 징수원과 제사장,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이 모든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제공됩니다.
셋째, 하나님은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9절). 율법 준수나 할례가 아닌 믿음이 중요합니다. 외적인 의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믿음이 우리를 정결케 합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유대인들은 율법 준수와 의식적 정결함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그런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깨끗해질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멍에와 은혜의 자유>
<율법의 멍에와 은혜의 자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리새파 성도들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 율법 준수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중요시했고, 오랜 전통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들의 의도가 나쁜 것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주장에 강력히 반박합니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0절). 여기서 '멍에'는 무거운 짐을 의미합니다. 멍에는 소나 말에게 씌워 무거운 물건을 끌게 하는 도구입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멍에'에 비유함으로써, 율법이 짊어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조차 지키기 어려웠던 율법의 부담을 이방인들에게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유대교 내에서도 랍비들은 모세의 율법에 613개의 계명이 있다고 계산했고, 이 모든 계명을 완벽히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무거운 짐을 대대로 짊어져왔고, 그 짐에 눌려 종종 율법의 정신보다는 외적 형식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율법의 멍에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성령을 통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주셨는데, 인간이 추가적인 조건을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도전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본질이 아닌 것들을 강조하며 무거운 짐을 서로에게 지우곤 합니다.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이런 모습이어야 좋은 신앙인이다"라는 눈에 보이는 행위들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기준들이 신앙의 본질이 될 때, 우리는 은혜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베드로의 선언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11절).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베드로가 11절에서 "우리와 동일하게"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인 자신들조차도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는 겸손한 고백이었습니다.
<은혜에 반응하는 믿음의 항해>
<은혜에 반응하는 믿음의 항해>
은혜는 무조건적이지만, 그렇다고 무반응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100주년 기념교회 은퇴 목사인 이재철 목사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을 '믿음의 항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베드로는 그 은혜에 반응하여 기꺼이 자신의 편안한 지대를 벗어나 고넬료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용기 있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결정 순간에 그저 침묵하거나 중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은혜의 경험을 토대로 소신 것 담대하게 발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에 반응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 아이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경험한 자녀는 자연스럽게 그 사랑에 반응합니다. 말을 배우면서 "아빠", "엄마"라고 부르게 되고,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부모에게 달려갑니다. 좀 더 자라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부모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은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은혜에 반응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는 유대적 전통과 편견을 뛰어넘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용기 있게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믿음의 항해는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순종의 여정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말한 후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행함의 관계는 마치 나무와 열매의 관계와 같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한 행실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나무가 된 것이 아니라, 나무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말씀의 문을 닫으며>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초대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한 결정 덕분에 복음은 유대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결정의 수혜자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인의 후손입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요? 복음의 본질을 지키고 불필요한 장벽을 제거한 베드로와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결단이 오늘 우리의 신앙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 신앙생활에서 행위와 업적을 강조하다 은혜의 기쁨을 놓쳤다면, 오늘이 바로 그 은혜로 돌아갈 때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감사하며, 그 은혜 안에서 기쁨을 회복합시다.
율법의 무거운 짐이 아닌, 은혜의 가벼운 짐을 지고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 우리 모두가 이 쉽고 가벼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조건 없이 사랑받은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어진 선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이 은혜가 우리를 안일함으로 이끌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더 깊은 감사와 순종으로 인도하소서. 베드로처럼 믿음의 항해를 시작할 용기를 주시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도 풍성히 나눌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소서.
우리가 때로 다른 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며 정죄했던 모든 순간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포용의 마음을 주소서. 우리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우리 중앙교회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우리가 믿음으로 심고 물을 때,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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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풍랑주의보가 없을 경우 7:20에 교회에서 가산으로 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