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가 들리기 시작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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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제목: “하나님 나라가 들리기 시작한 날”
제목: “하나님 나라가 들리기 시작한 날”
서론 : 많은 말, 들리는 말
『바벨의 도서관』 이야기
호세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소설가가 쓴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바벨의 도서관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도서관이 등장합니다. 무한히 이어지는 방에 수많은 책들이 놓여있습니다.
이 책들은 우주의 모든 조합으로 이루어진 무작위의 문장들입니다.
이 수많은 책들 안에는 무한에 가까운 글들과 정보가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책들을 찾다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찾는 진리를 담은 내용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너무 많은 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글들은 대부분 찾으려는 진리의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혹은 진리에 대한 내용일지라도 그것이 거짓된 내용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진짜 글을 찾을 수 없는 것이죠.
결국 진리를 찾던 사람들은 미쳐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진리를 찾으며 미쳐가기보단, 진리에 대해 침묵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비슷합니다.
정보가 너무 많죠.
바벨의 도서관은 글들이 많아서 읽어야하는 것이지만, 지금 시대는 들리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들리는게 많은만큼 진리가 들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sns에서는 컨텐츠형 큐티 나눔, 유튜브에서는 수많은 설교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할 것은 ‘복음이 말해지고 있는가’보다 ‘복음이 들려지고 있는가’입니다.
말해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들려지고 있는가’에요.
1. 오순절, 말하는 날이 아니라 듣게 된 날 (행 2:1–4, 6, 8, 11)
1. 오순절, 말하는 날이 아니라 듣게 된 날 (행 2:1–4, 6, 8, 11)
오늘 본문을 보면 진리, 그 복음이 ‘말해지는 것’만큼 ‘들려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의 내용을 얼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2제자 중 비어버린 유다의 자리가 맛디아가 선출되어 채워집니다.
그렇게 신약에서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열두제자의 자리가 회복되고 새이스라엘인 교회공동체가 회복됩니다.
그 이후 예수님이 약속하신대로 보내신다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 자리에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현상은 신기하다 못해 기이할 수도 있게 느껴집니다.
성령을 받은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 언어가 아닌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 등등등
이 수많은 지역의 언어로 서로 소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 본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전의 관점을 해체해보려고 합니다.
이 본문을 처음 대하듯이 다시 보면,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것’ 만큼 ‘듣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우리는 이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는 사람이 있어야한다는 것이죠.
말하는 사람만 있고, 듣는 사람이 없으면 허공에 울리는 소음일 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그 안에 어떤 ‘정신’을 담는 것이죠.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정신은 듣는 사람에게 전달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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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이 본문이 받아왔던 오해에 대해서 한번 다뤄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이 주는 신비로움 어쩌면 기이함 때문에 그 자극으로 인하여 본문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능력’으로 봅니다.
물론 능력이 맞죠. 그런데 본문의 성령의 능력을 ‘힘(power)’의 개념으로 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 본문을 인용하면서, 소위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어떤 사람들은 외국어를 갑자기 하게 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더라 이런 말 많이 들었었어요.
실제로 우리 한국 교회에 있어왔던 교육의 흐름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거죠. 영어 어렵죠? 중국어, 일본어 배우기 어렵죠? 기도해서 성령의 은사 받으면 외국어도 잘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본문에서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은 저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의 역사가 어떤 ‘힘’, ‘power’가 되어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얘기하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의 능력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 파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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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의 능력은 ‘하나님의 큰 일’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해도, 결국 듣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알게 되는 ‘연합’과 ‘소통’의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큰 일’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성경에 드러난 복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복음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언어로 얘기해도, 서로 들리게 되고, 서로 알게 되는 그 역사.
이것이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지. 그냥 외국어를 말하게 되는 단순하고 자극적인 그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2.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2:5–11)
2.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2:5–11)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여러분 하나님의 큰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갑자기 서로 다른 외국어들을 얘기하면서, 복음을 서로 얘기하게 된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놀라야할 일은 뭐냐면, “우와 너 외국어 해!”가 아니라요, “우리의 입을 통해서 복음, 그 하나님의 큰 일이 말해지고, 그것이 다른 언어인데도 들려!”가 되어야해요.
이 성령의 능력은 신비합니다. 외국어를 말하게 해서가 아니라요. ‘각자의 언어’, ‘각자의 경험’, ‘각자의 다른 삶’, ‘각자의 다른 배경’ 속에서도 하나의 이야기, 그 복음의 이야기를 서로 얘기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신비로운 일,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행할 수 있는 분입니다. 능히 하실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을 우리에게 행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복음으로 우리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복음을 서로 말하게 하시고, 서로 듣게 하시는겁니다.
서로가 복음으로 소통되고, 연합해서 한 공동체, 듣는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하나로 연합하고, 소통되고, 복음으로 똘똘 뭉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갑자기 누군가가 미래의 일을 예견하고, 이상한 방언을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님이 오신 궁극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복음이 서로 얘기되고, 서로가 복음을 듣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없는 일이에요.
자극적인 것에 속지 않으시기 바래요.
적용 1) 내적인 적용
여러분 우리 청년부 공동체가 성령님으로 연합하는 공동체라는 특징은 여기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모이는 공동체의 모임들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일’이 서로 얘기되고, 듣게되고 있는가입니다.
복음이 얘기되고, 복음이 들려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아에 몰랐거나, 복음에 대해서 잘 모르던 자들이 우리 공동체에 들어와 복음을 듣게 되는 일이 생겨야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의 모든 삶을 통치하신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은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복음이 되어 서로에게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장 모임을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분의 삶은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각자 다른 언어”와 같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언어라는 것은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말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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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라는 언어철학자는 언어는 곧 ‘삶의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To imagine a language means to imagine a form of life.”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곧 하나의 삶의 양식을 상상하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말 이상의 것이죠.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 환경을 담고 있고요. 그 사람의 사고, 가치관을 담고 있죠. 그 사람의 됨됨이 심지어 윤리, 도덕적 가치관을 담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같은 한국어를 사용해도, 그 사람들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 체계가 한국어일 뿐, 나름의 삶의 양식을 담은 언어로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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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러분의 목장 모임을 가정해봅시다.
여러분은 한국어로 대화하지만 각자 다른 삶의 양식이 담긴 언어로 얘기합니다.
여러분의 언어에는 여러분의 삶이 녹아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은 각자가 모두 다르죠.
그 다른 삶의 양식을 다른 서로 다른 언어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세상 공동체에서는 이렇게 서로 다른 언어가 말해지기만 할 뿐, 진정한 소통과 연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그 각자 다른 언어들이 서로 말해질 때, 서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요. 모든 사람들의 각자 다른 언어가 복음이라는 구원의 언어로 번역되고 예수님의 통치받는 삶이라는 같은 양식으로 향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힘들 때도, 여러분이 기쁠 때도
여러분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도, 순탄할 때도
여러분이 직장인이든, 취준생이든, 학생이든
여러분의 서로 닮은 삶을 통해 여러분이 살아낸 예수님께 통치받는 삶이 복음의 언어가 되어서 서로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복음과 맞닿아있었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교제는 ‘하나님의 큰 일’을 서로 듣게 되는 교제가 될 것입니다.
적용 2) 외적인 적용
우리 공동체가 들리는 언어로 서로 내적으로 교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봅시다.
오늘 성령이 임했을 때 있었던 이 일이 교회 내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이들의 언어를 듣고 하나님의 큰 일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이 복음의 언어는 교회 바깥, 외부로 향해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사도행전의 전체 맥락을 보면, 이 일 이후로 사도행전은 계속해서 선교의 발걸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복음의 전파가 향하는 것이죠.
외국어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이방인을 향한 선교로 한 걸음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는거죠.
그런데 우리가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본문의 사건을 단지 외국어를 말하는 능력, 힘으로 이해했다면, 우리는 어떤 함정에 빠질 수 잇을까요?
우리가 비기독교인을 향해 전도하고 복음을 전할 때요.
마치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비해 더 힘이 있고, 우위에 있고, 수직적으로 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복음을 몰라서 심판받는 죄인으로 낮게 여기고, 겉으로는 안 그래도 속으로는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것처럼 대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령을 받으면 더 많은 파워,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이 이해를 벗어났잖아요.
기독교인은 힘이 더 많이 있어서 세상보다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혹은 윤리적 능력이 더 있어서 세상보다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을 세상이 듣게 하는 능력’입니다.
즉 ‘복음을 세상이 듣게 하는 능력’이죠.
우리는 한번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우월감과 능력주의에 고취되어서 세상에게 들리는 복음이 아닌, 영적인 우위에서 억압하는 왜곡된 복음을 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제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슬로건을 달면서 전도를 하시는 분들이 그 행위 자체를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부는 아니지만 꽤나 많은 분들이 이렇게 전도하는 경우 마치 영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전도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저 사람들이 듣는 말든, 안 들으면 어차피 심판 받을 세상 사람들이다.’
‘나는 구원 받았으니 못 듣는 사람들은 못 듣는 무지함 때문이다.’
이런 전제가 있는데요.
이게 결국 어떤 방향으로 가기도 하냐면, ‘듣든 말든, 말하기만 하면 내 책임은 끝’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우위에 있어서 영적으로 고차원적인 것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들려지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이 듣도록 하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거에요.
그 듣도록 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본문에서처럼 언어를 바꿔야하는 경우가 있겠죠.
근데 그런 1차원적인 적용이 아니라, 이런거죠.
교회 공동체에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난 사람에게 들리는 복음은 무엇일까요?
교회 공동체가 정말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됩니다.
공동체 안의 사랑의 언어로 전달해야합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들리는 복음이 필요합니까?
그의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적절한 논리적인 답변과 함께 복음을 전해야죠.
만약에 한국교회 공동체 전체가 정말 사회에서 적절한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회개하고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가운데 들리는 복음을 전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는 아예 복음을 들은적이 없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예수님이 구원을 주신다라는 식의 단순한 메시지로도 들리는 복음이 됐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우리가 들리는 복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끼리 얘기해서 들리는게 아니라, 우리끼리도 들리고, 세상 가운데도 들리는 복음이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 가운데 나아가 여러분이 세상에 복음을 들리게할 방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말로, 입술로만 말고요. 무엇이 있나요? 여러분 이런 고민을 해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고, 더 이상 전도는 통하지 않는다, 복음 전하는 것은 의미없다 쉽게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죠.
들리는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