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신 왕을 맞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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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당신은 어떤 왕을 원합니까?
당신은 어떤 왕을 원합니까?
여러분, 혹시 “진짜 리더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가족 공동체부터 한 나라에는 반드시 리더가 있습니다.
착한 리더보다 무능한 리더?를 협오합니다.
이태원클라쓰에서 보여준 나를 공감해 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리더를 원합니다.
요즘 시대는 리더보다 인플루언서가 더 익숙한 시대입니다.
말 잘하고, 멋지게 보이고,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왕’처럼 느껴지는 시대죠.
그런데요, 어떤 사람을 여러분의 인생에 초대하고 싶은가요?
성공을 가져다주는 사람?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
그런데 만약…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다면요?
그는 당신이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당신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진실과 구원을 들고 온 사람이라면요?
오늘 소개할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그는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았지만, 당신이 꼭 필요한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 이 순간에도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계십니다.
📍1. 본문 앞 문맥 — 마태복음 20:17–34
📍1. 본문 앞 문맥 — 마태복음 20:17–34
✴️ (1) 20:17–19 — 예수께서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심
✴️ (1) 20:17–19 — 예수께서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심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한 구체적 순종의 길을 제자들에게 다시 선포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말로 입성 본문과 시간적으로 연결되며,
입성은 단순한 ‘왕의 행진’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시작점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2) 20:20–28 — 세베대의 아들들의 자리 요구
✴️ (2) 20:20–28 — 세베대의 아들들의 자리 요구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의 왕국을 오해하고 좌우 편에 앉기를 원함.
예수님은 “섬김”과 “대속”의 개념을 강조하며 고난받는 메시아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곧 이어 등장하는 입성 본문에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왕’은 사실 십자가를 지러 오신 종의 왕임을 문맥상 대비시킵니다.
✴️ (3) 20:29–34 — 여리고의 두 맹인 치유
✴️ (3) 20:29–34 — 여리고의 두 맹인 치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이 등장.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이 바로 21:9 무리의 외침과 연결되며,
맹인들이 육체의 눈 뿐 아니라 영적 눈을 떠서 예수를 메시야로 알아보는 반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히려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는 영적 장님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본론
본론
오늘 본문은 마태가 그동안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자 사용하였던 행동과 말씀의 패턴의 5번째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행동으로써 예수님이 왕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 행동의 근거를 구약 성경의 권위에서 가져옵니다.
마태는 유대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예수는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증명하려는 목적을 지님 (마 1:1)
이 입성 장면은 마태가 보여주고자 했던 메시야 정체성의 공개적 선언이자, 정점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반응을 보이십니까?
1. 🏛 예루살렘 입성의 정치적·종교적 긴장
1. 🏛 예루살렘 입성의 정치적·종교적 긴장
📌 예루살렘은 "왕의 도시", 성전이 있는 하나님의 거처로 인식
📌 예루살렘은 "왕의 도시", 성전이 있는 하나님의 거처로 인식
구약에서 예루살렘은 메시야가 오실 도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될 도시로 기대됨 (시 48; 사 2:2–3).
예수님의 입성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왕의 귀환" 또는 **"종말론적 주권의 회복"**을 상징.
이는 당대 유대인들에게 극도로 민감하고 정치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졌음.
📌 로마의 감시 아래 있는 유월절 시기
📌 로마의 감시 아래 있는 유월절 시기
유월절에는 순례자 수십만 명이 예루살렘에 몰려들었고, 이는 로마 당국에게는 항상 위험 요소였음.
예루살렘 성 안은 구원의 절기, 해방의 메시지로 고무된 군중으로 가득함.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다윗의 자손", "왕"**으로 환영받는다면? → 정치적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였음.
예수님의 입성을 통해 드러난 왕의 진짜 모습과 우리의 반응
예수님의 입성을 통해 드러난 왕의 진짜 모습과 우리의 반응
1. 📜 예수님의 입성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1. 📜 예수님의 입성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이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4절)
예수님은 스가랴 9:9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하신 메시야
하나님의 구원은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진행 중임을 확신할 것
🐎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상징성
🐎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상징성
📌 왕의 입성 방식: 말 vs 나귀
📌 왕의 입성 방식: 말 vs 나귀
고대 근동에서 말은 정복과 전쟁의 상징.
반면 나귀는 평화와 일상의 동물.
구약에서 솔로몬 왕이 즉위할 때 나귀를 탔음 (열왕기상 1:32–40).
스가랴 9:9: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나귀, 곧 어린 나귀를 타셨도다.”
➡️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스가랴 예언의 성취일 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왕권을 지니신 메시야인지 선언하는 행동이었음.
정복이 아닌 평화, 폭력이 아닌 섬김, 권력이 아닌 순종의 왕
성부하나님-섭리하시고 예언을 성취하시는 분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불안 속에서도 그분의 성취 신뢰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적용 질문:
“나는 내 삶의 계획을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섭리에 신뢰하고 있는가?”
✨ 붙잡을 약속: 왕 되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내 삶에 오고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겸손한 왕으로 내 삶에 찾아오신다.
그분은 외면적 위세가 아닌, 내 내면의 혼란 속으로 진리와 평화로 임하신다.
💡 수도권의 현실 적용:
혼잡하고 바쁜 일상, 불확실한 사회 구조 속에서 예수는 왕으로 지금 내게 오신다는 약속은
성공과 속도에 지친 이들에게 평안과 정체성 회복의 약속이다.
2. 🐾 예수님의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2. 🐾 예수님의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 1. 역사적 배경 –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 1. 역사적 배경 –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 시대적 상황:
🧭 시대적 상황:
기원전 520년경,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황폐한 예루살렘에서 재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약하고, 경제적으로 가난하며, 주변 나라들의 위협 속에 있는 상태였죠.
다윗 왕조는 끊어졌고, 메시야의 약속은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 이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왕”이 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 2. 문학적 구조 – 9장 전체의 흐름
✍️ 2. 문학적 구조 – 9장 전체의 흐름
구절내용특징
1–8절하나님의 심판: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선언가짜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전복
9–10절참된 왕의 도래: 겸손한 왕이 평화로 통치본문 핵심
11–17절회복과 구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심전쟁과 승리의 역전 메시지
🧠 3. 신학적 메시지 – 왜 이 예언이 중요한가?
🧠 3. 신학적 메시지 – 왜 이 예언이 중요한가?
✅ (1) 가짜 왕국은 무너진다 (1–8절)
✅ (1) 가짜 왕국은 무너진다 (1–8절)
두로, 시돈, 블레셋 등 당대 강국들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심판 선언
인간의 지혜, 군사력, 부요함이 하나님의 왕권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냄
이 배경 속에서, 진짜 왕은 누구이며, 어떤 방식으로 오시는가?
✅ (2) 참된 왕은 겸손하게 오신다 (9절)
✅ (2) 참된 왕은 겸손하게 오신다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나귀의 작은 것 곧 어린 나귀를 타셨느니라.”
구원자 왕의 성격:
공의로우며(צַדִּיק):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자
구원을 베푸시며(נוֹשָׁע): 백성을 구원하는 자
겸손하며(עָנִי): 자신을 낮추는 종의 태도
나귀 타심:
전쟁의 말이 아닌 평화의 상징
“권력”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택하시는 분
✅ (3) 그분은 평화를 선포하신다 (10절)
✅ (3) 그분은 평화를 선포하신다 (10절)
“그가 이방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브라데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 왕은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니라, 온 열방의 왕이심
그분의 통치는 지리적, 민족적, 정치적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통치
“온유하시며 나귀를 타셨도다” (5절)
세상은 힘 있고 위풍당당한 리더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이 아닌 새끼 나귀를 타심
낮아지심, 섬김, 십자가의 길이 왕의 방식임을 보여주심
왜? 새끼 나귀인가?
고대 근동에서는 왕도 두 종류의 짐승을 탄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전쟁 때는 말을 타고,
평화 시대에는 나귀를 타는 것.
예컨대, 솔로몬 왕도 즉위식 때 나귀를 탔습니다 (열왕기상 1:33).
📌 따라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왕은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 따라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왕은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나는 정복하러 온 전사 왕이 아니라, 평화를 주러 온 왕이다.”
새끼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함, 죄 없으신 예수님의 정결함
멍에를 메지 않음새로운 구원의 길, 아직 누가 타보지 않은 새로운 언약의 시작
성자 예수님-겸손한 왕, 예언을 성취하며 구원을 이루시는 메시야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비움과 섬김을 따르는 삶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환호를 따르기보다, 십자가를 향하는 삶의 방향을 택해야 합니다.
✅ 적용 질문:
“나는 어떤 왕을 따르고 있는가?
능력과 성공의 왕인가, 아니면 고난과 섬김의 왕이신 그리스도인가?”
🦁 예화: “강하고 멋진 사자왕, 그런데 그는 죽으러 갑니다”
🦁 예화: “강하고 멋진 사자왕, 그런데 그는 죽으러 갑니다”
혹시 여러분, **《나니아 연대기》**라는 이야기를 아시나요?
그 이야기 속에는 아슬란이라는 사자왕이 나옵니다.
그는 나니아라는 나라를 지키는 아주 강한 왕이에요.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죠.
그런데 어느 날, 한 소년이 잘못을 저지르고 죽게 되자,
아슬란이 그 소년 대신 자기 목숨을 내놓고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를 보낸 사람들도 깜짝 놀랐어요.
“왕이 왜, 힘 있고 멋진 사자가 왜… 죽으러 가지?”
그리고 놀랍게도, 그 다음 날, 아슬란은 다시 살아나죠.
그의 사랑과 희생으로 나니아는 다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지은 C. S. 루이스는 사실 이 아슬란을 통해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예수님은 강하시지만, 힘으로 다스리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나귀를 타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 연결 포인트:
아슬란처럼, 예수님도 왕이시지만 겸손하게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왕은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죽음과 사랑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삶에 나귀 타고 오시는 그 왕,
예수님을 당신은 어떻게 맞이하시겠습니까?
🧭 따라야 할 모범: 겸손, 섬김, 자기 비움의 제자도
예수님의 요청은 작고 평범한 것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큰 계획이 담겨 있다.
그분은 당신의 일상과 재능, 시간, 재물을 왕의 입성을 준비하는 데 사용하길 원하신다.
💡 오늘의 순종:
내 시간을 드리는 것
내 돈, 내 집, 내 플랫폼을 그분께 드리는 것
예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내 ‘나귀’를 드릴 수 있는가?
내가 나귀처럼 예수님이 오르시어 드러내고 영광받으시도록 섬길 수 있겠는가?
성공이 아니라 섬김으로,
드러남이 아니라 비움으로
소셜미디어의 '좋아요'가 아니라, 한 영혼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3. 🧠 우리의 반응은 외형적일 수 있으나, 본질이 중요하다
3. 🧠 우리의 반응은 외형적일 수 있으나, 본질이 중요하다
🌿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깐 행위의 상징성
🌿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깐 행위의 상징성
📌 겉옷을 길에 깔다
📌 겉옷을 길에 깔다
구약에서 왕을 환영할 때 백성이 옷을 깔아 왕을 맞이함
→ 열왕기하 9:13: "그들이 각기 자기 겉옷을 가지고... 제위 위에 펴고 외쳐 이르되, '예후는 왕이다!'"
이 행위는 복종과 존경, 왕권의 상징적 승인을 뜻함
📌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다 (요한복음 12:13에서 명확히 언급)
📌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다 (요한복음 12:13에서 명확히 언급)
종려나무는 승리와 자유, 민족적 구원의 상징
특히 마카비 혁명 당시(BC 2세기), 시몬 마카비가 성전을 탈환했을 때 백성이 종려나무 가지로 환영했음
따라서 이 행동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 "우리를 해방시켜 줄 민족적 구원자"를 맞는 상징적 행동
🔎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해방자(로마를 물리칠 군사적 메시야)가 아님 → 백성들의 환호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
🗣 “호산나(Ὡσαννὰ)”의 의미와 배경
🗣 “호산나(Ὡσαννὰ)”의 의미와 배경
📌 어원과 의미
📌 어원과 의미
히브리어: “호시아 나 (הוֹשִׁיעָה נָּא)” → “지금 구원하소서!”
시편 118:25–26에서 사용된 구절: 유월절과 초막절 절기 때 성전 예배 중 반복적으로 사용
의미 변화:
원래는 간청형(부탁) → "제발 구원해 주소서!"
점차 승리의 외침, "메시야 만세!" 의미로 발전
📌 신학적 충돌:
사람들은 구원을 외쳤지만, 그 구원의 내용은 정치적/사회적 기대였음
예수는 죄와 죽음에서의 영적 구원자로 오심 → 기대와 실재의 충돌
“온 성이 소동하며 말하되, ‘이 사람이 누구냐?’” (10절)
“호산나!” 외쳤던 무리는 곧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침으로 바뀜
입술은 환영했지만, 마음은 거부함
성령 하나님-백성의 외침과 반응 속에 드러나는 조명과 오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보지만, 성령의 조명 없이는 진정한 인식에 이르지 못함.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올바로 인식하고 따르게 하심.
✅ 적용 질문:
“나는 성령의 조명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 경험과 기대 안에서 예수를 해석하고 있는가?”
🚫 피해야 할 태도: 예수님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환영하는 신앙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찬양은 하지만,
그분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삶
😔 고백해야 할 죄: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모르고 있었던 죄
기독교 콘텐츠는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르는 문화
‘예수 잘 믿으면 잘 된다’는 성공주의적 신앙 소비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누군지 모르는 존재”
이런 태도는 본문에서 ‘예루살렘의 소동’,
겉은 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허한 종교 문화와 같습니다.
결론
결론
📍2. 본문 뒤 문맥 — 마태복음 21:12–27
📍2. 본문 뒤 문맥 — 마태복음 21:12–27
✴️ (1) 21:12–17 — 성전 정화 사건
✴️ (1) 21:12–17 — 성전 정화 사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고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것은 입성의 상징적 행동을 실제적인 심판 행위로 연결시키며,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가 단지 외형적인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고 심판하시는 자임을 드러냅니다.
✴️ (2) 21:18–22 — 무화과나무 저주
✴️ (2) 21:18–22 — 무화과나무 저주
열매 없는 무화과는 형식적 신앙과 외식의 상징.
호산나 외쳤던 무리들이나, 신앙을 가장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로 연결됩니다.
✴️ (3) 21:23–27 — 예수의 권위에 대한 도전
✴️ (3) 21:23–27 — 예수의 권위에 대한 도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며, 본격적인 충돌 구도가 시작됩니다.
입성은 단지 ‘왕의 대관식’이 아닌, 종교 권력과의 대립과 갈등의 서막이 됩니다.
1. 📜 예수님은 왕처럼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 📜 예수님은 왕처럼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 입성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 말은 이런 뜻이에요: “우리를 지금 구원해주세요!”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리더라고 기대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해방자요,
기적을 일으키고 빵을 나눠주는 기적의 선생님이었죠.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무기 하나 없고, 군대도 없고, 위협도 없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쳤지만, 정작 며칠 후에 이렇게 외칩니다:
“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왜요?
예수님이 자기들의 기대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2. 🧨 이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2. 🧨 이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도 삶이 힘들 때,
문제를 해결해 줄 누군가를 찾습니다.
잘 되는 방법, 위로되는 말, 기도해 주는 사람, 나를 도와줄 사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종교에 기대고,
어떤 사람은 스승을 찾고,
어떤 사람은 ‘좋은 에너지’ 같은 걸 믿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예수님을 찾으면서도,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호산나!”를 외치지만,
그분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오실 때,
나는 과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3. 🐾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입니다
3. 🐾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말이나 전차, 화려한 장식을 두르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나귀를 타고, 조용히, 평화롭게 오셨습니다.
왜요?
그분의 목적은 당신을 다스리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을 구원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죄, 상처, 부끄러움, 거짓, 실패…
그 모든 것을 짊어지기 위해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 🙋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4. 🙋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이 본문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외적으로 환영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방식대로 예수를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곧 예수를 외면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필요에 즉각 반응한 제자들입니다.
“주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에, 자신의 나귀를 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 삶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삶에 들어가고자 한다. 너의 나귀, 너의 겉옷, 너의 마음을 나에게 줄 수 있겠니?”
그분은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당신에게 오십니다.
🎯 결론: 오늘, 이 겸손한 왕을 맞이하시겠습니까?
🎯 결론: 오늘, 이 겸손한 왕을 맞이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 정말 필요한 방식으로 오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잘되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구원하시고,
당신을 진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본문 10절)
예루살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