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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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요 4:1-10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오늘 말씀 제목은 ‘물을 좀 달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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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성장하면서 공동체(조직)생활을 하게 됩니다.
유치원에서 초,중,고 그리고 대학에 가고 직장에 가고 가정을 이루어갑니다.
이러한 인간의 인생 중에 정말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만남’일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는지를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 삼국사기 ‘온달 열전’
고구려의 장수이자 봉성 온씨의 시조. 일반인들에겐 바보의 대명사 혹은 거기서 아내의 내조와 본인의 노력 덕분에 성공한 입지전적의 인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인물이다.
-> 한 인생의 만남이 주는 영향력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모, 친구, 스승, 배우자, 목회자 등등 누구를 만나는 것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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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마리아 종교에서 메시아는 곧 타헤브(Taheb)로 묘사되었으며,
이 단어는 아람어와 히브리어의 합성인데, “돌아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타헤브가 종말에 나타날 것을 믿고 고대했다.
사마리아인들의 신은 유일신인 하나님 한분이다. 모세는 유일한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오경만 유일무이한 불변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리심산이 사마리아 종교에서 유일한 성소이다.
천지창조 후 6,000년이 되었을 때
그리심산의 성소와 사마리아인의 번영을 회복하는 타헤브가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타헤브는 ‘메시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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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마리아 여인도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메시아”(타헤브)를 고대하고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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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한복음 4: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은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신다.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 하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겠다는 것입니다.
꼭 이쪽으로 지나야 한다는 것은,
이 ‘만남’은 의도가 있는 만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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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만나셨을까?
이 만남에서 예수님의 의도성은 (1)자신이 메시아임과 (2)예배에 관해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여인을 만나시러 했던 예수님의 의도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예수님을 통해서 무너지게 된다.
[고정관념] 이란?
1 잘 변하지 아니하는, 행동을 주로 결정하는 확고한 의식이나 관념. 고정 관념을 갖다.
2 어떤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하고 지나치게 일반화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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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무너진다.
유일한 선지자 모세,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인 모세오경, 그리심산이 유일한 성소인
‘고정관념’은 ‘유일한’것임을 알 수 있다.
->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러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 종교적 신념은 예수님만이 깨뜨릴 수 있음을 지적한다.
여러분 안에 있는
유일하게 생각했던 종교적 신념과 고정관념은 유일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모두 다 무너지길 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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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을 만나는 장소가 “우물 곁”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여섯시쯤” 또는 “제 육시”이었다고 기록되어집니다.
-> 씨에스타(육시), 전통적으로 가장 뜨겁고 오침을 하는 시간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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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여인은 아침이나 저녁시간에 나와서 물을 기르는 시간의(일반적) 고정관념을 이미 깨뜨린 상태에서 물을 길으러 나온다.
무언가 불완전한 상태를 가진 여인으로 나타난다.
제 6시는 아무도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이용해 물을 길으러 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분명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홀로 우물을 찾은 여인과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가고(8절),
혼자서 우물 곁에서 쉬고 있는 예수와의 만남은 특별한 의도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 6시에 만난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함께 하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다.
즉, 이 여인은 여섯 번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
6이라는 동일한 숫자의 사용을 통해
예수와 여인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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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다. 특별히 요한은 숫자의 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정리하면, 숫자 7은 ‘완전한’이라면, 숫자 6은 ‘불완전한’것을 말한다.
즉, 인간의 한계를 말할 때 쓰이는 숫자이기도 한다.
-> 예수님은 불완전하고 한계를 가진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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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언급되는 ‘우물 곁’은 ‘만남’이라는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1)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났을 때
2) 야곱이 라헬을 만났을 때
3)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에 딸들을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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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때, 우물은 성 밖에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보통 여인들은 아침이나 저녁 선선한 때 물을 길으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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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보면, 우물 곁에서 만남이 이루어진 다음에 상황은
새 언약이라는 새로운 언약의 길로 전진하기 위한 첫 시작점처럼 보여 진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나고 야곱이 라헬을 만날 때도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하나님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새 언약’에 사건으로 전진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불완전에서 완전함으로 가는 전조현상처럼, 우물 곁이라는 장소가 사용된다.
****우물 곁이라는 장소는 만남을 뜻하고,
이 만남으로 인해서 여인이 가지고 있던 불완전하고 한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적 배경과 신념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 체계와 대상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고 있다.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우물 곁이 되길 축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하루에 우물 곁에 우리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우리가 우물 곁으로 나오질 않는 것이 문제이다.
우물 곁에 계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시길 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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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번주는 고난주간이 시작하면서 이 여인처럼,
고정관념을 가득찬 그리고 불완전하고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우물 곁에서 기다리시고 계시는 그 은혜 앞에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되시길 축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는 귀한 시간 되시길 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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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은 이 만남을 통해서 불완전한 상태(종교적 한계)에서
완전하고 온전한 상태로 변화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또한, 예수님은 예배의 근원(세겜 지역)이 되는 곳에서
세겜이 ‘어깨’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조상들이(아브라함, 야곱) 제단을 쌓았던 지역이 세겜 지역입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모세 오경은 불변한 진리이자 계시였기 때문에
이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야곱이 예배의 근원지가 세겜지역이었다.
예배의 근원이 되는 곳에서 예배의 근본을 가르친 사건이다.
예배는 장소에 국한 되지 않는다.
바로 여러분이 있는 그 곳이 ‘우물 곁’이 되는
예수님만의 만남이 되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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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에 의도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의도성은 새로운 언약에 매개체로 우물 곁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고, 예배의 근원이 되는 곳에서 예배의 근본을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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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오늘 여기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려다 보고 싶은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서 대화법을 제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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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된 가장 첫 번째 시점이 예수님과의 대화의 시작점에서부터라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의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이 여인이 어떻게 마음이 열릴 수 있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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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물 곁에 앉아서 그곳은 야곱의 우물입니다.
그곳에 앉아서 한 여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물을 좀 달라”
여자의 반응은 “어째서( Πῶς,포스 9절)?” 포스 쉬...너는 어째서..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여인의 물음에 대하여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이 덧붙여진다.
저는 예수님의 “물을 좀 달라“
이 한 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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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여인의 그릇으로 마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급진적인 함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1) 예수님은 강력한 사회적 관습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상종)
2) 수세기에 걸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물을 좀 달라”라는 말로 인해서 사마리아 여인의 경계심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이 여인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서서히 경계심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대한 인식의 변화가 오게 된다.(수용적으로 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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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들이 바라던 “타헤브”(메이사)를 수용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의 과정속에서
젠더(성), 국적, 인종, 종교라는 네 차원의 장벽이 우르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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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만남”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화’입니다.
마치,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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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자의 삶을 유지하는 것처럼,
만남이 중요하지만 그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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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마음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말,
상대방과 나 사이의 긴장의 벽을 무너뜨리는 말...
저는 이런 입술이 “메시아”을 만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이런 입술은 “메시아”을 만나게 안내하는 하늘의 입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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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09장] - 목마른 내 영혼
오늘 본문이전 3장에서는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언급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에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언급한다.(요한복음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