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3일 주일 1부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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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외침 뒤에 십자가

요한복음 12:12–15 NKRV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호산나 외침 뒤에 십자가” --> 봄과 사순절 고난주간
어떻게 사순절을 잘 보내고 계십니까? 그리고 봄이라는 계절도 잘 보내고 계십니까? 유달산이나 지역 곳곳에 핀 벚꽃을 보면 참 아름답고 예쁘다는 생각도 들지만 동시에 이 봄이라는 계절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사순절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생각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의 영어 표현 Lent의 어원을 보면 봄이라는 계절과 사순절이 딱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영어 렌크텐 봄이라는 단어에서 왔는데요. 점점 낮이 길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즉, 봄이라는 계절이 점점 낮이 길어지는 계절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순절은 점점 부활로 가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절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봄과 사순절은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 사순절이 이 번주간만 지나면 끝이 납니다. 오늘은 에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동시에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화려했지만 실제로는 골고다로 향하는 입성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의 환호와 찬양은 그 십자가에서는 철저한 침묵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는 역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신데 인간이 되셨고 왕이시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분이었으며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살기위하여”가 아니라 “죽음을 향해”가셨던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새끼 나귀를 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왕이라고 하기는 무엇인가? 어설프고 하지만 종려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무엇인가를 해결해줄 구원자로 보이기도 합니다.
먼저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전 이야기를 해보려합니다.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은 옛남유다의 수도로서 명성은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매력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이면서 팔레스타인의 모든 부가 모이는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매력적이고 많은 부가 모이는 도시가 된 것은 “성전”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점거 당했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 스룹바벨이 제 2차 성전을 지었지만 턱 없이 왜소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예루살렘은 허약하고 별 볼품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헤롯 대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예수님 당시에는 아들들이 유대지역 사마리아를 다스리고 있음)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아주 화려하고 거대하게 성전을 완성한 것입니다.
헤롯대왕은 예루살렘의 밑천이 종교라고 믿고 성전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성전을 재건했던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지만 매절기 때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외국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보내는 성전세 및 순례자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사는 모든 유대인이 내야 하는 십일조 통해 예루살렘으로 자본이 유입 되었습니다. 성전세 그리고 희생제물을 판매하는 돈이 모두 흘러들어왔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가장이 돈이 많은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부유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자석처럼 이끌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기업과 사람들이 서울이나 경기도로 몰려가는 것처럼 유대지역에서 예루살렘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으로 유입된 모든 자본의 주인은 대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있는 안나스 가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지도자였지만 로마에 정치적으로 로비하며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만을 위해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안나스와 가야바 가문에게 꽤 인기를 끌었던 예수라는 젊이은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으며 병자를 치유했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이러한 움직임이 반로마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면 그들의 모든 것 “성전을 관리하는 권리”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엄청난 인파가 모여든 유월절 주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있는 상황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2.죽이기로 결단하다. --> 나사로의 부활

그러던 중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서 놀라운 소식이 들립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4km정도 떨어진 베다니에서 들려온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죽은지 4일이 지난 그래서 무덤에 안치된 나사로라는 사람을 살렸다는 거짓말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나사로 부활 이후의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입니다.
요한복음 11:45-53 (함께 읽기)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1: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나사로의 부활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결정에 결정적인 이유가 된것이죠. 종교지도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얼마나 경계하였는지 요한복음 12장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들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회의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때인 것 같지만 주님이 생각하시기에는 지금 딱 정한때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 다달았을 때 바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 십자가 죽으심 때가 가까워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2.예수님과 빌라도의 입성

이렇게 서기 33년 3월 29일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예루살렘에 유월절 주간이 시작되는 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아직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주간이 아니지만 예루살렘 및 예루살렘 근처는 이미 순례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 순례자들이 “ 성 밖에 있는 장막”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여건이 허락되면 사람들은 성 안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유명연예인들이 거리에 나오면 순식간에 그 거리가 마비 되듯이 예수님께서는 수 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루살렘은 입성은 구약에 이미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의 새끼니라.”
나사로 부활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기다렸던 구원자임을 확신시켜주었습니다. 수 많은 군중들이 외칩니다.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구원하소서, 메시아시여”
예수님 스스로 “나는 왕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으로” 메시지를 던지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이며 왕이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며 예루살렘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 때 쯤, 같은 날은 아니지만 또 한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본디오 빌라도” 유대총독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 중앙에서 살았던 폰티부족 출신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유대 총독은 그리 높은 계급은 아니었습니다. 유대 총독을 지냈던 펠릭스라는 자도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빌라도는 평상시에는 유대 지역의 총독으로서 3만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시리아 특사의 수하있었고 지중해 북부에 있는 도시인 팔레스타인 가이사랴의 궁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명절 때 마다 예루살렘에 들어와 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대개 예루살렘의 치안은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가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명절 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 탓에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났고 3만명이 깔려 죽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명절이면 예루살렘은 강한 역사의식과 종교적 열성을 가진 유대인들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명절 기간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대제사장에게 명절에 입을 제사장 복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열쇠만 주면되는 간단한 행사였습니다. 이미 성전은 로마의 정치적 도구로 그리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러한 일을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는 제국을 상징하는 독수리를 앞세우고 말 위에 탄 기병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이스 캠프인 베다니(나사로의 집)에서 감람산을 지나 동쪽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그곳은 하부도시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서민들이 사는 곳이었으며 악취과 진동하는 곳이었습니다.
반대로 빌라도는 해안도로를 타고 옛 도시인 욥바를 지나 서쪽으로 들어왔는데 그 곳은 대제사장, 귀족, 혜롯 궁이 있는 상부도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서쪽으로 입성해서 헤롯대왕의 옛 궁전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지중해 해안을 타고 욥바라는 도시를 지나 예루살렘의 서쪽에 위치한 문을 통과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에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동쪽 3-4km 쯤에 있는 베다니에서 출발하셔서 감람산을 지나 지금은 막혀있는 동문이나 하부 도시로 연결되는 본문(똥문)으로 예루살렘에 입성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성전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있었기 때문에 성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금문 혹은 동문이라는 불리는 곳으로 입성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아래도시로 이어지는 “본문”을 지나 악취가 진동하는 하부도시를 지나 성전을 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서쪽에는 강력한 권력과 힘이 있습니다.치와 경제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황제를 상징하는 “빌라도”가 있습니다.
동쪽에는 악취만 있습니다. 그 지역을 “나귀 새끼를 탄 왕이 입성했습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입성은 분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대조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

세상 나라는 존경할만한 영웅, 칼, 강력한 권력, 부를 가지고 세워집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독립의 꿈,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이스라엘 재건의 꿈을 이룰 사람으로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힘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오심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축의 먹이통이 예수님의 첫 처소였고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세워지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들인 것입니다.
이 상징적인 메시지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지만 동등됨 취하지 않고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시 가장 비참한 형벌이었던 로마의 반역자에게만 내려졌던 십자가 처형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예수님께서는 로마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른 나라와 싸워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온갖 조롱이 썩인 푯말이었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그들이 기다리던 기름부음 받은 자였으며 다윗의 자손에게서 날 구원자였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셨지만 3일만에 부활하셨을 때는 더 이상 유대인만의 왕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선포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로마제국은 멸망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여전히 우리 안에 세워져 있고 이 땅에 수많은 교회를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고 실재한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북교동교회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군중들은 어떠했습니까? “호산나 찬양하리로다.” “곧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이시여” 이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외쳤지만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로서 능력을 행하지 않자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무리들로 변해버렸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환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위한 메시야, 자기 원하는 해주는 신으로고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가치와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언제든지 우리도 예수님을 아무생각 없이 못박으라는 선동에 현혹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네가 하나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한다.”고 책방받은 베드로가 될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로 세워지고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항상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빌라도 “로마”의 구도는 모양만 다르게 계속해서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마다 어디에 서야 합니까? 무엇을 바라봐야 합니까?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 빌라도의 행렬입니까? 아니면 새끼 나귀탄 왕입니까?
바라바 예수입니까?(마태복음 27:16-17 어떤 고대 사본에는 예수 -바라바 / 희랍어 바르 아빠스- 아버지의 아들) 아무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겉으로는 승리의 행렬이며 왕의 입성이었지만 실제로는 골고다로 향하는 희생과 고난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 번 한 주간 예수님 고난의 흔적을 쫓아가며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그 십자가의 길에 비춰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은 삶 자체가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인간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모두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공생애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였습니다.
그리고 계시의 절정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인물이 위대한 종교지도자로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면 그것은 역사책에 한 줄 정도 기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분이시라면, 그것은 인간 모두 가지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되었다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 그 일주일 간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복음이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인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회복시켰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극적으로 변화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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