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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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views거룩한 낭비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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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낭비란 무엇인가?
거룩한 낭비란 무엇인가?
오늘 새벽만나 본문은 마가복음 14장 1~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4장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좋지 않은 문장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흉계’ 로 쓰인 헬라어는
‘속임, 교활함, 간교, 거짓말’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사단이 사용하는
용어이고, 사단을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 때문에
본문을 잘 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단, 또는 그가 부리는
악인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오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단의 흉계에 걸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
못 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하는,
죽음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 이를
하나님의 뜻을 성취, 또는 성경의 말씀을
응하기 위함이라 설명해 놓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사단의 승리를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아직 죽으실 때가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이 사단의 흉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뜻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마저도
준비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마저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치료해 주셨던
한 문둥병자, 이름 없는 한 여인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나병환자 시몬은 분명 예수님께
치료 받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경험하면
그 은혜를 갚고 싶은 게 정상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나병환자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향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향유는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해 주는 방부제로 사용될
뿐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이
향수로 사용한 아주 귀한
물질이었습니다.
그 향유가 옥합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옥합은 향유을
담고 있는 비싼 보관병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이 그 비싼 옥합을
깨뜨려 향유 전체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는 마치 그 여인의 이름보다
그 여인이 했던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본문은 강조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여인이 했던 행동은 어떤
행동이었기에 중요할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고,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구원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그 여인의 행동은 매우
중요한 행동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이와 같이 칭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서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라는 표현은
그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라는 뜻입니다.
그 여인이 했던 행동이
예수님에게 무엇이 그리 좋고, 아름다웠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흉계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맛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선택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이
기쁘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
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죽음을
참고 이기실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셨던
방법을 가리켜
사람들은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늘 본문도
예수님의 고결한 죽음을
예비하는 이름 없는 여인의
헌신을 가리켜 세상은 ‘낭비’라고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사람들 눈에는
향유의 값 300데나리온만
보였습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300데나리온은 평범한 노동자가 약 1년 정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하루 5만원 버는 노동자는
300일 동안 일해 벌 수 있는
1500만원 상당의 향유를
깨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낭비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름 없는
그 한 여인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 이상으로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도다”
“당신은 너무 많은 낭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여인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종교적인
일들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돕는
일들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일인가?”라는
질문 앞에 빠질 수 있는 고민입니다.
실제 이 본문을 가지고
교회는 구제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더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 복음은
그리스도가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에는 구제, 치료, 희생, 헌신, 사랑
모두 포함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제와 복음을 분리시킬 필요
없습니다. 구제가 복음이다 라고 정의될 수는
없지만 복음에는 구제의 요소가 분명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구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부요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제 보다 복음이 더 중요하다
라는 말씀을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작은 자들에게 에게 했던 행동이
곧 예수님께 했던 행동이라
말씀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고 그 나머지는
그 다음입니다.”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하우 주석은 이에 대해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여기서 대조 되는 것은
‘가난한 자들’과 ‘예수’가 아니라
‘항상’과 ‘단 한 번의 특별한 때’다.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일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번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쩌면 우리 인생에
찰나에 경험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특별한 때에
경험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은 우리 주변에 항상, 아무때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 반 정도만 함께 하셨고
지금 시점으로 볼 때 며칠 안에 돌아 가실 것을
말씀하시며 십자가 사랑이라는 희소성
있는 가치에 자신의 것을 낭비하고 있는
그 여인의 낭비를 ‘거룩한 낭비’로
도리어 칭찬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칭찬에 대해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경험될 수 있지만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동안만
경험하실 수 있는 아주 희소한
사랑이라는 것 아십니까?
나중에 경험해야지 하고
다른 곳에 눈을 파는 순간
양심이 화인 맞아
예수님을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은
심령 상태로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언제 어디서든 경험할 수 없는
바로 그 때만 경험할 수 있었던
아주 귀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뒤 늦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옥에서 입니다.
그래서 짐 엘리엇이란 선교사님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물질 젊음이란
자원을 ‘거룩한 낭비’로 선교지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여러분 거룩한 낭비는
희생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실 때 사단은 예수님을
분명 조롱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하잖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저런 수모를 감래하는 ‘낭비’를
하고 있지?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 때가 아니면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복음을 들을 수 없고, 또 구원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거룩한 낭비’를 감행하시어 십자게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만 하실 수 있으셨던 그 소중한
헌신과 희생이란 ‘거룩한 낭비’
덕분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는
오늘 꼭 필요한 그 곳에
저와 여러분들의 시간과 지혜와
물질 그리고 섬김을 통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다 감당하고 있는
그 일 말고 저와 여러분들의 눈에만
보이는 그 일과 사명에
거룩한 낭비를 감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거룩한 낭비의
대상이
혹자에게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돌보지 않는
분들, 열등감, 좌절감, 두려움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있으신 분들은
자신을 위해 ‘낭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처소고, 살아 움직이는
교회임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에
밟고 맑고 환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환경은
그런 분들에게 필요한 ‘거룩한 낭비’일 수
있습니다.
또 거룩한 낭비가
혹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과 주변에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배우자, 동료, 타인을 위해
거룩한 낭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에덴 동산에는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라는
강이 흘렀습니다.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목회 하셨던 이재철 목사님은
이 강들을 이와 같이 해석했습니다.
에덴을 에덴되게 했던 이 강들은
물이었습니다. 이 물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물은 ‘희생’이란 과정을 통해
에덴에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물은 더러운 물체를 씻깁니다.
물은 더러운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깨끗했던
물은 그 더러운 물체와 사람들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에덴의 기쁨은 바로 그 네줄기 강, 희생을
통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은
낭비와 같아 보이는
하찮은 일 같아 보였지만
한 이름 없는 여인에게 그 죽음은
그 때만 기릴 수 있고, 그 때만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고, 그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자신의 것을 다 깨뜨려 예수님께
헌신합니다. 그것은 희생이었습니다.
그 희생은 ‘거룩한 낭비’가 되었고,
그 ‘거룩한 낭비’는 또 다른 희생인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준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만
보여지는, 남들이 보는 그 현장과
대상이 아닌 여러분들의 눈에 목격되는
그 현장과 대상에 ‘거룩한 낭비’를
감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항상,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닌
바로 그 때만 할 수 있는 소중함들에
거룩한 낭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그 거룩한 낭비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될 것입니다.
오늘 한 줄 기도는
거룩한 낭비의 삶을 살아보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