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은 해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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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유명한 기독교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는 이를 세가지라고 말합니다.
첫번째가 허무함입니다.
너무나 애를 썼는데 결과가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허무함을 느낍니다.
또는 반대로 너무나 많이 가졌고, 높이 올라왔는데 허무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했고,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가 행복을 찾기 위한 중요한 과제입니다.
두번째는 실수입니다.
불행한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게 후회입니다.
‘그때 그것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런 생각들이 많아집니다.
그만큼 살면서 중요한 선택을 많이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실수 또한 우리가 행복을 찾기 위해 중요한 과제입니다.
세번째는 죽음입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죽음은 다 빼앗아가는 깡패와 같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죽을 때는 그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과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가는 것도 바로 죽음입니다.
허무, 실수, 죽음 이 세가지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인생의 괴물들입니다.
그런데 맥스 루케이도의 책을 보니 이 세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허무하지 않다’, ‘실수는 치명적이지 않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그 이유가 부활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어떻게 우리를 이런 것들에게서 벗어나게 해주었을까요?
부활의 능력이 무엇이길래 인생의 괴물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첫번째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 일어난 일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받아서 자신이 사놓은 돌무덤에 장사 지냅니다.
예수님이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는데, 안식일이 금요일 오후 6시입니다.
안식일이 되면 그 누구도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겨우 3시간동안 아리마대 요셉이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신경을 썼다고 해도 장사가 제대로 진행되었을리가 없습니다.
이 모습을 너무나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던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안식일이 끝날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토요일 저녁에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일요일 새벽이 되자 곧바로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분명 큰 돌이 무덤입구를 막고 있고 로마병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텐데 왜 찾아간 것일까요?
굉장히 무모한 결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을 그냥 보낼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 그들을 무덤까지 따라오게 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로 12명의 제자들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이처럼 예수님을 잘 따르던 여인들이 있던 것입니다.
그 여인들이 결국 무덤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하자 입구를 막고 있던 돌문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여인들은 놀라 안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도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너무 당황하고 있을때 갑자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나타납니다.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첫번째 주목해야할 부분은 예수님의 빈 무덤입니다.
무덤은 원래 죽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 희망이 사라진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이 인생을 걸고 따르던 메시아 예수님이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절망과 좌절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습니다.
단지 시신이 사라진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절망을 깨뜨리고 소망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무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빈 무덤은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승리의 공간이 된 것입니다.
인생이 어지간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무덤처럼 내 삶이 끝났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앞이 막막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낄때가 있습니다.
이럴때는 마치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시거나 버리신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생에 대한 허무함에 빠져 절망과 좌절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필요한 것이 해석입니다.
안 믿는 사람중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내가 실패할수록 그만큼 내 삶의 바운더리가 넓어진 거라구요.”
실패를 배움과 성장의 과정으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해석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해석을 잘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해석이란 정신 승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해석은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한 끝나도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패해도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기에 우리에게는 실패도 새로운 시작이 될수 있습니다.
그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입니다.
[두번째 본론]
우리가 두번째로 주목할 사실은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 여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당시 재판에서 여성들의 증언은 결코 신뢰성이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려면 남성들의 증언을 사용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성들을 사용하신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우스갯소리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소문을 빨리 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상의 기준을 역으로 뒤짚어 엎습니다.
세상 가치관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강한자, 가진자, 앞선자에게만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낮은자, 보잘것 없는자, 소외된 자를 들어 하나님의 큰 일을 맡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누가복음 2장을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이 탄생하실때 제일 먼저 소식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신뢰받지 못하던 목자들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립니다.
또한 부활의 첫 증인 역시 주목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던 여성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이라는 가장 위대한 두 사건의 증인들이 모두 세상에서 가장 낮게 여겨지던 자들입니다.
특히, 부활의 첫 증인들의 이름을 보십시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아닙니다.
첫번째 증인의 이름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일곱 귀신들렸다가 해방된 여인입니다.
가장 고통받던 여인이 가장 신실하게 예수님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증인이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크고 위대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 곁에 끝까지 남아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만약에 여인들도 절망과 좌절에 빠져 그냥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 될수 있었을까요?
주님은 우리의 자격이 아닌 신실함을 사용하십니다.
끝까지 주님을 찾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세번째 본론]
마지막 세번째로 주목할 사실은 여인들이 말씀을 기억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6, 8절을 보십시오.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곧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깨달은 게 아닙니다.
천사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믿으라고 한게 아닙니다.
천사들은 단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알려준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만큼 누가복음이 이 구절이 부활신앙의 핵심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그것을 스스로 기억한게 아닙니다.
기억의 주체는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에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다.
앞서 믿음은 해석이라고 했습니다.
그 해석의 핵심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이 상황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제자들은 부활 아침에 문을 잠그고 두려워 떨며 어떤 집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믿지 못합니다.
11절에 보면 여인들의 말을 ‘어처구니없는 말’로 여길 지경이었습니다.
여인들의 증언 자체를 믿을수 없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더더욱 믿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무덤 현장을 달려가 확인까지 했지만 단지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빈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인들과 제자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왜 여인들은 믿고, 제자들은 믿지 못했을까요?
그 차이는 말씀을 기억했느냐 못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말씀은 두려움과 혼란을 믿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절망이 소망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부활신앙은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삶의 절망 속에 있는 우리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을 통해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십니다.
그럴때 더이상 내 감정이나 상황, 내 생각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을 믿는데 무슨 말씀인들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씀 묵상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씀 묵상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새겨진 말씀이 우리의 현실을 해석할 키가 됩니다.
내 감정과 상황에 치우치지 않고 믿음으로 볼수 있게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빈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빈 무덤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소망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생의 끝에 서있다고 느낄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서 부활의 시작을 열어 가실수 있는 분입니다.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여인들은 세상의 눈으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킨 신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이 아닌 신실함을 통해 일하십니다.
끝까지 주님을 찾고 끝까지 사랑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무엇보다 이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빈 무덤을 보았기 때문도 아니고, 천사들을 만났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음에 새겨졌던 그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기억할때 그들의 눈이 열려 믿음이 살아났고, 절망은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무덤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허무함과 실수, 죽음이라는 인생의 장애물에 절망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결말은 달라집니다.
말씀은 우리를 허무함에 무너지지 않게 하고,
실수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게 하며,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부활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살아갈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