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7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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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알려지셨다’고 시작한다. 대부분 들어본 히브리어 단어 ‘야다’이다. 다양한 번역에 ‘동침하다, 깨닫다, 알다, 배우다’로 번역되는 단어로 은밀하면서도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어 아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는 하나님을 그렇게 알았다. 오늘 신자 역시 하나님을 그렇게 알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편의 시작이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의인의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하나님의 성소’에서 흘러 넘쳐나는 물의 은유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삶에서 깨달아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의 그러함을 깨닫는 과정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기도하니까 응답받았다 하고, 어떤 이는 이렇게 하니까 이렇게 되었다는 일종의 ‘하나님 사용법’처럼 자기 앎에 갇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자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모두 알고 있지 않는가? 결코 그런 앎이 아니다. 오히려 유다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안다고 했다가 오히려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예수께서 오셨던 당시에도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고발 당해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시작되는 고난 주간을 통해 나는 그런 것이 없는가하면서 철저하게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알았던 것은 8절에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즉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공의가 드러났기 때문에 1절에 ‘크신 분’, 2절에 ‘살렘에 있는 분’, ‘시온에 계신 분’이시며 그런 능력으로 말미암아 3절부터 일어나는 일 ‘전쟁이 없다’, 4절에 ‘영화롭고, 존귀하시다’는 것이다. 힘과 권력을 가지면 ‘자기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어한다. 줄을 서지 않고 먼저 입장하는 특혜를 누리고 싶어하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합니다 규칙과 방식을 무시하고 내가 누군데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 권력이라면 하나님의 권력만 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에게 정해주신 방식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 그대로 공정과 상식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사자들과 어린 양이 함께 뛰놀며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을 필요가 없는 참 사랑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통치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포는 믿는 자에게 만 주는 특혜적 공의와 기울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11절 ‘사방에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것이다. 예수를 향하여 예물을 들고 온 동박박사들을 보라.
유다는 그러하신 하나님을 깨달아 알았기에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나만 믿으면 좋은 것을 함께 전하며 나누겠는가? 하나님의 판결이 선포되길 누구보다 우리는 바라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세상이 평화를 이루며 사는 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세상에는 평화’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절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하나님을 향하여서도 잘못이 없다고 우기며 사는 인생이야 가장 불쌍한 인생이다.(롬1:28) 그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내버려 두사’이다. 그들 역시 안다. 스스로가 ‘사형에 해당한다’(롬1:32) 알고도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자이다.
6절 꾸짖으시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꾸짖음을 받고 있는가? 부끄러움과 책망이 사라진 시대에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받는 즐거움을 회복하는 고난주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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