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단 하나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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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4장은 신약성경 네개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록 중 하나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일어난 하루의 일을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크게 3가지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첫번째는 새벽에 빈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으로 낮에 일어난 일
그리고 오늘은 저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일
이 저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3가지를 배을 수 있습니다.
1. 부활은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역사적 사건이다.
1. 부활은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역사적 사건이다.
첫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그렇지 기독교의 신화적인 요소 중에 하나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상징으로 의미가 있지. 기나긴 어둠은 끝나고 밝은 새 아침이 올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거지.”
“슈퍼맨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듯이 예수의 부활도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지만, 부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활을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가르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라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신화와 같은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혹시 부활이 믿기 힘들다면, 부활이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왜 누가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기록했을까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겠죠. 그럼 이 본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자 보세요.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근데, 죽은줄만 알았던 예수님이 눈 앞에 나타났다니... 너무 기뻤지만, 제자들은 믿기지 않는 겁니다. / 굉장히 극적인 장면
근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여기 뭐 먹을거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예수님께 드리자, 그것을 받더니 그 자리에서 드십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이것을 왜 기록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배고프시다하면 바로 생선을 줄 수 있는 제자들의 섬김을 본받게 하기 위해? / 예수님이 생선을 좋아하시니깐, 우리는 언제든지 생선을 드릴 준비를 해야한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 아니면, 기름진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누가는 왜 갑자기 이러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일까요? 아, 물고기 심볼이 기독교의 상징이니깐, 이 이야기를 넣은 걸까요? 아닌데? 물고기가 기독교의 상징으로 쓰인 건 초대교회 때이지 이때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일까요?
정답은 아무것도 교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아요. 그럼 누가는 이걸 왜 썼을까요?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상징을 기록한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겁니다. 상징이 아니죠. 역사적 사건입니다.
37절을 보면 부활한 예수님이 나타나자 제자들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유령으로 나타난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나는 영이 아니야. 내 손과 내 발을 봐, 나를 만져봐.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지금 눈으로 보고 만졌잖아. 나는 실제 존재해”
예수님은 상징과 영적 의미로 부활을 해석하려는 우리를 일깨웁니다. / “상징과 의미에서 깨어나! 이건 실제이고 현실이야” /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볼 때 어떤 상징과 전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적 시간과 공간 속에소 죽음에서 부활한 역사적 기록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와 주장들은 이것말고도 많은데, 오늘 다 소개할 수 없습니다. 두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부활의 첫 증인들이 여성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당시 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기 때문에 이들의 증언은 믿을만한게 못되었습니다. / 법정에서 증거로도 채택되지 못했어요.
그런데, 굳이 이것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써봤자 신빙성만 떨어트릴텐데, 왜 썼을까요?
간단합니다, 부활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한 겁니다.
두번째, 1세기 역사의 팩트.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수백명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일이 생깁니다. /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 놀라운 것은 예수를 부활의 주님이라고 믿는 이 믿음이 몇백년도 안되서 로마제국을 휩쓸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로마는 수많은 철학과 종교가 넘쳐나는 곳이었습니다. / 하지만, 그 모든 경쟁에서 기독교가 독보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로마의 국교가 되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게다가, 초대교인들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순교까지 당합니다. 이 점이 또 강력한 증거인데요./ 여러분, 진실을 위해서 죽을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파스칼은 이러한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나로서는 목이 잘려 나갔던 증인들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다”
파스칼 (Blaise Pascal)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증거는 넘쳐납니다.
이렇게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면, 부활은 역사적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여러분, 1492년도에 있었던 콜럼버스의 신대륙 사건은 당시 유럽 중심의 세계관 속에 갇혀있던 인류의 패러다임을 전세계적 세계관으로 바꾼 사건이죠.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었다고 여겼던 유럽인들은 이 사건을 믿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거스를 수 없죠. 자신들이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들은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이고, 죽음이 끝이고, 그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는 패러다임이 있다면, 그저 이 땅의 행복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게 전부겠죠.
그런데,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이 패러다임을 깨트립니다. / 부활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고 말합니다. / 그래서 부활은 이 세상 중심에서 영원한 삶이라는… 삶이 변화될 수 밖에 없는 획기적인 관점을 가져다 줍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기독교? 뭐든 종교가 다 똑같은거 아냐? 착하고 선하게 살면 되는거 아냐?” / 이게 여러분의 패러다임이라면 부활은 이 패러다임을 깨트리죠.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라고 말합니다.
가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성경에 이 부분은 제가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시대와 맞지 않고, 너무나 퇴행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의미가 없죠. 그것이 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럽 중심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신대륙 발견을 불편한 것처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불편하고, 믿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이라는 이 역사적 사실을 더 이상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속의 관점, 나 중심 의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라는 영원한 관점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징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2. 부활은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다.
2. 부활은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기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겁니다.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오늘 본문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과 오랫동안 있으면서 가르침을 받았을텐데, 왜 이것을 몰랐을까요?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 전까지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사도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종교 지도자였고, 구약에 정통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선 전문가였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 댈해서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그 말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 뿐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오심에 관한 내용인데, 메시아라는 단어는 기름부음 자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축복받은 자,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 사랑받는 자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이죠.
그런데, 메시야로 불리우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거죠. 여러분, 이건 말이 안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범죄자들, 사형수들이 매달리는 사형대입니다.
그리고, 구약, 신명기를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메시야가 저주를 받는다고? 말이 안되죠. 게다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고, 사랑하고 축복받는 메시야가 버림을 받는다고? 그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라고? 누굴 바보로 아나. /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가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가. 그는 메시야가 될 수 없어.”
그런데, 어느날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울을 비추었고, 그는 엎드러져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목소리가 들리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 이 일로 인해 사울은 잠시 시력을 잃게 되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합니다. / 그렇게 사울은 사람들에 의해 다메섹으로 가서 몇일을 보내면서 회복하기까지 있는데요. / 이 시점에서 사울은 바울이 되죠. / 박해자에서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무엇이냐면, 이때부터 바울은요. 모세의 모든 선지자의 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메시야라고 주장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추측하건데, 다메섹에 있는 동안 바울은 생각했을 겁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고, 나는 그분을 보았어. 부활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하신거야. 예수가 메시야야!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신거지? 그분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실리가 없지. 다른 이들의 죄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고 죽으신 거야”
순간 바울은 자신이 알던 구약성경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위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죠.
바울은 생각합니다.
잠깐… / 이사야서는 메시아에 관한 기록으로, 전반부에는 왕이신 메시아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에는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에 관한 것이지. / 항상 이 부분이 이상했는데, 어떻게 둘이 같은 사람일 수 있는거야?
아, 잠깐만. 나사렛 예수는 고난받는 종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죽으신 동시에 부활하신 왕이야.
성전과 장막에서 속죄를 위해 행해진 그 수많은 제사들, 제물로 드려진 수많은 소와 염소와 짐승. 그 어린양의 피.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린 희생을 가리킨 거였어.
그래. 에스겔은 예언했지.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고, 하나님의 영이 직접 우리 가운데 임하여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이제 더 이상 피흘림의 제사나 대제사장, 성전이 필요없다라는 거야. /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라면 가능해.”
바울은 성경 전체를 새롭게 깨닫기 시작합니다. /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도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죠.
이전의 바울은 권력의 메시야. 힘의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가 아니라, 천군천사를 거닐고 구름 속에서 나타나 모든 적을 무찌르는 위대한 왕. /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강하고, 선하고, 탁월한 자들만 상을 받게 되는 그런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단는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살펴보니, 모든 것들이 연결되고 통하기 시작하고,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 약함으로 오신 메시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메시야.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메시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자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을 이해해야만 이 모든 것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 이유죠.
따라서 부활은 역사적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사건이며,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3. 부활은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다.
3. 부활은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다.
마지막으로 부활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니, 내가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증언하기 위해 세상을 보내시죠?
46 …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니
바로 복음이죠.
오눌 목장 모임 후에 골든타임 노방전도팀에서 부활절 전도를 나가는데요. 함께 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얼마든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부활절 계란도 준비했는데,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가? / 이 복음은 우리가 할 위대한 소식이며,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 왜 부활의 복음이 강력한 소망될 수 있는지 세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부활은 미래의 소망이다.
1) 부활은 미래의 소망이다.
첫번째, 예수님의 부활은 미래에 우리가 누릴 미래, 부활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소망이 있다는 것은 미래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죠. / 그리스-로마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쾌락주의의 창시자이죠.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으면 끝이며, 이생 너머에는 미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데스노트의 듀크가 그런 말을 하죠. “죽은 자는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무만이 있을 뿐이다” / 사람이 죽으면 마치가 스위치가 꺼지듯이 미래도 없고, 영혼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삶은 고해다. 고통의 바다라고 하잖아요. 게다가 우리의 삶은 바다에 이는 흰 거품처럼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100년만 지나도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 이 삶을 넘어서는 미래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바다에 이는 거품과 같은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인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강력한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2) 부활은 관계의 소망이다.
2) 부활은 관계의 소망이다.
두번째 부활은 단순히우리에게 미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래가 관계적인 것이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에 이런 말 많이 하죠. “이번 생은 망했다” / 이번 생이 끝나도, 어떻게든 다음 생이 이어진다라고 생각하는거죠. 힌두교와 불교가 말하는 윤회사상이죠.
라이언킹의 인트로곡, “써클 오브 라이프” 엘튼 존 곡으로 뮤지컬로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압도적입니다. 근데, 이 노래 가사는 생명의 순환으로 여러분이 태어나 죽으면 흙의 일부가 되어 흙을 비옥하게 하고, 식물이 자라고, 그 식물을 먹는 동물이 자라고, 또 우리가 죽고, 이 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서 “절망과 희망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자”라고 노래합니다.
이 노래 자체는 정말 멋진 곡이지만, 과연 그럴까요?
불교나 힌두교 같은 경우에는 비슷하게 말하죠.
다른 점은 이렇게 순환하다가 해탈을 하게 되면, 신과 우주와 하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죽어서 흙이 되어 자연의 일부가 된다라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주나요?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 않나요?
여러분, 우리 솔직해집시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어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 소망이 되나요? /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에 태어나는게 소망인가요? / 그래도 여전히 세상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거 아닌가요? / 이것이 우리의 가장 깊은 소망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말하죠 /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내가 이룬 성취, 돈? 아닙니다. / 여러분이 이제 곧 죽는다면 누구를 찾을거에요? /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 아니겠어요?
그래서, 사랑은 사람일 때만 가능하죠. 오직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죽으면 자연의 일부가 된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고, 강력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때문입니다. / 제가 자주 말하잖아요. 가족과 함께 있으면 너무 행복한데, 행복한만큼 슬프다고 / 죽음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 생이 있다고요? / 모든 것이 다 리셋되는데? 전혀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보지만, 나중에는 서로가 알아보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은 제자들과 친구였다라는 것입니다. / 죽음 이후 부활에도 이 땅에서의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줄로 믿습니다.
천국에서 저 모른 척 하지 마세요. / 근데 처음에는 서로를 못알아볼겁니다. / 왜냐하면, 모든 죄와 흠이 사라진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있기 때문에 서로를 보면서 “누군가” 할거에요.
하지만 이후에 서로를 알아보겠죠 / 이 땅에서의 겪었던 찰나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서로 기쁨으로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부분적으로 알았던 것을 이제 실제로 보니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 무엇도 뺏기지 않을거에요. 여러분은 영원히 사랑받을 것이고,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에요. 부활은 우리가 누리게 될 부활의 삶이 확실한 것이라 말해줍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천국에는 갈 수 있지만, 이 땅에서 업적을 쌓아야 하고,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 그런데, 여러분 누가 천국에 들어갈 만큼 충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노력을 한다해도 어느정도까지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불안해 하면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형벌을 치르셨다는 확실한 증거죠.
여러분이 만약 죄를 지어 5년행을 선고 받아서 감옥에 갔다면, 5년 후에는 풀려나겠죠. 왜? 여러분이 그 댓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죗값을 치루셨다는 영수증과 같은 거에요.
여러분, 코스트코 가보셨습니까?
요즘에는 간적이 없는데,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어요. 코스트코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점원이 “잠시만, 멈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하죠. / 영수증을 보여주면 통과시켜 줍니다. / 물건을 샀다는 증거가 영수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은 거대한 영수증과 같은 겁니다. 어떠한 영수증이죠? (사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지불하셨다는 영수증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이 확실한 것이라 말해줍니다.
3) 인생 단 하나의 소망, 부활
3) 인생 단 하나의 소망, 부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생 다 하나의 가장 위대한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그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게 무슨 말이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자들에게 말씀하시죠. “나를 만져봐라. 나는 영이 아니다. 나는 살과 뼈를 가진 실제 존재야. 못 믿겠다면 생선을 가져와봐. 천국에서 우리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떠다니면서 하프만 연주하지 않아. 함께 식사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떠들고 웃고, 함께 일하고, 우리는 삶을 살아가게 될거야”
천국은 꿈이 아니고 현실이고 실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제시하는 미래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물질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게 될 거에요.
따라서 부활은 잃어버린 삶의 회복이죠. 우리가 너무나 꿈꾸지만, 가질 수 없는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옛 몸으로 부활하지 않았죠. 새 몸을 입으셨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새 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원하고, 항상 꿈꾸었던 삶을 얻는 것입니다.
가끔 구글 포토에서 10년 전, 15년 전 사진이라며 아내와 아기였을 때 아이들 사진이 뜨면요. 아내랑 저는 종종 그런 사진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들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 사진 보니깐 제가 너무 젊은거에요.
여러분 그래요.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잃어가는 과정입니다. 젊음도 시간이 흐르면 잃게 되고,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도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더디에서 함께 한 청년의 때, 너무 아름답지만,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어제 한주간 특새 끝나고, 컨디션이 완전히 무너져서 내일이 부활절인데 어떻하지, 그러면서 집에 들어왔는데, 아 모르겠다. 그냥 쓰러져서 잤습니다. / 그렇게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눈 앞에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거에요. / 그래서 눈을 떳는데, ‘왜 천사가 내 눈 앞에 있지 / 죄송합니다. 아내가 아니라서, 딸 에스더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거에요. / ‘아빠, 나 오늘 아빠 처음 본다고.” / 그 순간 모든 피곤이 사라지는거죠. / 부활하듯이 일어나서 아내의 설거지 도우고 잤는데요. / 아내가 수고했다고, 안마도 해주고, 발과 얼굴에 팩도 해주는데, 영혼이 회복되는 것 같더라고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도 찰나죠. 아름다운 순간들은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입니다.
[반주] 여러분, 어렸을 적에 추억이 있는 장소에 가본 적이 있나요? 아무리 그 때를 추억한다해도 그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상실을 경험합니다. 왜?
죽음이 그 모든 것들을 끝내고, 빼앗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요.
하지만, 부활이 사실이라면, 부활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삶의 회복입니다.
친구 여러분 들어보세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지금까지 믿지 않았다면, 오늘 이 시간 부활이 여러분의 가장 큰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갈망했던 모든 것들을 채워줍니다. 부활의 소망은 여러분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딜런 토마스의 시,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와서 유명해진 시죠.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딜런 토마스(Dylan Thomas),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중에서
이 시는 딜런 토마스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완성한 시라고 하는데요.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막강한 빌런이요. 원수이며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이 시인은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을 뺴앗아가는 죽음을 향해 소리치고, 저항하고, 분노하죠.
하지만, 아무리 저항해봤자, 죽음에게 권세를 부여한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인간은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기록하고 증언합니다. “그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분이 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신 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함께 선포합니다. “사망아 /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 사망아 / 너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믿는다면, 이제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죽음에 끌려나닐 필요가 없어요, 두려움에 매여 살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죽음을 향해 승리를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감사의 찬양을 부르십시요, 승리의 노래를 부르십시요. 여러분이 꿈꾸고 생각했던 것 이상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이로운 삶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더 이상 두렵게 하지 못하죠. 절망이 우리를 더 이상 낙심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더 큰 부활의 영광으로 역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불안과 허무, 우울과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이 있다면, 오늘 부활의 날, 모든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찬양
찬양
1절
깊은 절망의 수령 가운데 / 주님께 닿을 수 없던 우리
어둔 밤중에 하늘을 향해 / 주의 이름 나 부를 때
어둠을 뚫고 오신 주 사랑 /나의 절망 거두셨네
주님의 공로 다 이루셨네 /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2절
그 누가 주의 자비 다 알아/ 한없는 은혜 측량할까
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신 / 죄가 되신 구주 예수
주의 십자가 내게 말하네 / 영원히 난 용납됐네
아름다우신 왕 나는 주의 것 / 그리스도 나의 산 소망
후렴
할렐루야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자유케 하셨도다
죄의 저주 끊으신 주께 구원 있도다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3절
언약된 아침 장사 된 몸에 / 부활의 호흡 시작됐네
유다의 사자 위엄찬 선포 / 사망이 무너졌도다
이제 사망은 무덤이 더는 / 우리를 주장할 수 없네
유다의 사자 위엄찬 포효 / 사망이 무너졌도다
사망이 무너졌도다 / 주 예수 승리하셨네
기도제목
하나님, 우리 삶 가운데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봉헌기도
봉헌기도
아버지, 우리에게 이 놀라운 소망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망을 오늘 우리가 있는 현장에서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이 말하는 불안과 허무나 아니라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소망에 흠뻑 젖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 소망과 기쁨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 부활의 소망에 붙들려 살아가는 자들 되게 하옵소서.
오늘 목장모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골든타임
이 시간 하나님이 내 삶과 소유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예물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을 담은 이 헌금을 통해 이 헌신을 통해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소망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곳에 모인 청년들에게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들 세상 오티, 다음주 1시 체육관
담임목사님 20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