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특새 3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3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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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에 대한 완전히 다른 두 해석

마 26:3-5, 요 11:47-53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고난의 일주일을 시간순서대로 잘 정리하였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통해 그 순서들을 정리해볼수 있다. 그 말씀이 마 26:3-5 입니다.
마태복음 26:3–5 NKRV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함께 모여 예수를 죽이기 위한 계략을 세우고 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일주일을 순서적으로 정리해보기 위해 마태복음 본문을 선택하였지만 좀더 자세한 상황을 알기위해서 병행본문의 도움을 얻으면 좋을 것같다.
요한복음에 상황이 가장 잘 설명되어 있다.
요11:47-53 이다.
요한복음 11:47–53 NKRV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1. 예수를 죽여야 하는 이유(48절) – 땅과 민족을 빼앗길 것이다.
요한복음 11:48 NKRV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만일 그를 내버려두면 많은 사람이 그를 믿을것이요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그들은 예수님때문에 로마사람들에게 침략의 구실을 얻게 되어 이스라엘이 큰 피해를 볼것이 걱정이 된다고 말한다.
그들이 정말로 나라를 걱정해서 그럴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이스라엘 사회의 주도층이 되었고 기득권들이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장의 세금논쟁에서 보듯이 그들은 뼛속까지 가이사의 원리로 무장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금도 내고 헌금도 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 속해서 가이사를 위해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씀이었다. 그러시면서 주머니에서 그렇게 쉽게 가이사의 동전이 나오는 너희는 과연 누구에게 속한 자이냐? 물으시면서  책망을 하신 것이다. 너희는 겉으로는 애국적이고 이스라엘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처럼 보이지만 너희의 마음과 생각은 이미 힘의 원리, 세상의 원리, 즉 가이사의 원리로 가득차 버렸지 않느냐는 책망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다른 복음서를 보아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걱정해서 예수를 죽일려고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무슨 말인가? 이스라엘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간다는 말은 결국 내가 움켜쥐고 있는것을 빼앗아 갈것이라는 말인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특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결국 그들이 예수를 죽여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삶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땅이라는 말이 주석에 보면 다른 사본에는 성전으로 번역된것도 있다고 한다. 성전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유지되어야 욕망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두려움의 실체는 기득권과 특권을 놓치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득권과 특권을 유지하고 살리기 위해서 예수는 죽어야 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프레임은 가야바의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50절이다. 한사람이 죽어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느냐 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50 NKRV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2. 예수의 죽음을 나의 삶 으로만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50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의 죽음과 자신의 생명을 바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죽어야 하는 존재로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매우 잘못된  해석이 이와같은 해석 아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사는것으로만 연결되어지는 것으로 가르치고 받아드리고 할렐루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고 우리는 살게 되었는가? 그것에 아멘이신가? 단지 그것뿐이라면 우리와 이 대제사장의 고백과는 무슨 형식적 내용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인가? 아마 내용적인 측면에서 약간의 다름은 존재할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본인들이 예수를 죽일려고 했지만 우리는 그런적도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것을 믿어 드리는 것도 나의 딴에는 엄청난 생각과 판단을 해서 한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의 이면에는 십자가에 그렇게 죽으셨으니 이제는 내가 살게 되었다는 결론에 감사하고 기쁜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사는것으로만 바로 연결되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만일 이렇게만 복음을 받아드리면 우리는 전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  대제사장들도 예수의 죽음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예수의 죽음을 나의 사는것으로만 연결시킬때 우리는 대제사장들처럼 예수의 죽음을 알지만 그 죽음이 참된 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지 못한채 그저 우리의 탐욕과 욕심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만 사용될뿐이다.
3. 예수의 죽음에 나의 죽음을 함께 보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것이다.  51-52절.
요한복음 11:51–52 NKRV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가야바는 자신의 욕망을 지키기 위해 예수의 죽음을 결정하고 해석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조차도 이용하셔서 그들의 죄를 위해 지셔야 할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은 이스라엘민족을 위한 것일뿐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개개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앞으로 로마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연결되어진다.
로마서 6:3–4 NKRV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4 NKRV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1:17 NKRV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로마서 12:2–3 NKRV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왜 이런일이 벌어지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소유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분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존재의 변화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소유의 변화가 있어도 존재의 변화가 없으면 그것은 구원이 아님을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을 통해서 보는것이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제사를 통해 끊임없이 소유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존재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보지 못하였다.
이유는 죄인된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인된 자신의 존재를 보지 못한채 바라본 예수의 생과 예수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죄인된 자신을 의인으로 존재를 바꾸기 위해 오신 절대적 의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위한  부분적 의가 된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의를 나의 소유를 받쳐주고 유지시켜 주기위한 상대적 소유의 지렛대로 삼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으면 존재의 변화만 의미있고 소유의 변화에는 무관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가버리는 것이 영지주의이다. 영은 거룩하고 육신은 저급하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가치관 역시 복음에 합당한 생각은 아니다.  소유의 변화 소유의 가치도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형식의 변화, 남들의 눈에 비춰지는 변화도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변화이냐 소유의 변화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 우선순위와 복음의 본질을 이야기할때는 존재의 변화가 우선하는 것이다. 형식이란 내용에 종속되어야 하고 소유란 존재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과 성전제사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될때 종속적으로 따라오는것이어야 하고, 소유의 축복이란 존재의 축복에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 종속적 개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존재, 즉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죄인으로 존재하는 내가 얼마나 큰 지옥이었고 불행인가를 복음을 통해 날마다 확인하고 의인되는 존재에 대한 갈망과 소망으로 오늘하루의 삶을 살아가게 우리를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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