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18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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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히 쓰는 그릇
귀히 쓰는 그릇
여러분 모두 한주간 잘 지내셨나요? 이번주는 특별히 고난주간으로 지켰는데요, 교회력을 따르면 오늘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면 사흘을 지나 주일에 부활을 하시는 날이 되겠죠?
이렇게 예수님은 지난 한주동안 잡히시고 하나님으로서 받을 수 없는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고 오늘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삶은 어땠나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받았던 고난이 있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떠한 고난이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죠.
주님이 그 모든 고난에서 승리하셨고, 우리를 여러 죄와 고난으로부터 해방하시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한주간의 삶이 힘들고 고난이 넘쳤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너끈히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서 앞으로 돌아오는 삶 가운데서도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바로 디모데후서의 말씀입니다. 지난번에 바로 앞서 등장했던 2장 초반의 말씀을 나눴는데요, 혹시 기억하시나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서 함께 고난에 참여할 것을 권면했었죠.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절대 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고난이 있겠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잘 견뎌낸다면,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잘 버텨낸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의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 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인데요, 바울은 주님께서 미쁘신 분이니 우리를 절대 부인하시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향해 한가지를 명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첫구절인 14절에 등장하죠. 뭘 하지 말래요?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심지어 엄히 명하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엄히 명하라는 걸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고 합니다.
말다툼에 열중해봤자 그것이 주는 어떠한 유익도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모습이 성도들을 망하는 길로 이끌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말다툼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교회 안에 존재했었던 쓸데없는 토론, 이기기 위한 논쟁을 가리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지고서 자기 생각대로 이상하게 해석하고서 그것을 가지고 설왕설래하고, 승리하면 마치 자신이 더 대단한 사람인냥 행세하는 것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당장 교회에서는 어떤 모습들로 존재했을까요? 추측해보자면, 항상 바울을 힘들게하고 괴롭히던 이들, 말씀에도 자주 언급되는 거짓 교사들의 모습을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교회를 이끌던 자가 바울의 제자 디모데였으니, 당연히 그는 어떤 것들을 가르쳤겠어요? 바울의 여러 가르침들을 따라 디모데도 성도들에게 선포하고 양육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다가와서 그것이 옳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면 당연히 논쟁이 붙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말씀을 완전히 왜곡하거나, 아니면 이상한 부분에서 꼬투리를 잡아서 논쟁하는 경우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맺어지겠어요? 진리가 아닌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 어떤 유익이 생기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주장들에 끌려들어가 마음도 상하고 까딱하다가는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논리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들도 생길 수 있겠죠.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이들을 경계하여 모든 성도들이 그들의 전략대로 말싸움에 참여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디모데에게 어떤 것에 힘쓰라고 말하나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행했던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말꼬리 잡기와 같은 변론에 열중하지 말고, 오로지 진리의 말씀, 온전히 주님을 전하는 중심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서있으라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제가 말씀을 전하는데, 예를 들어 고난주간이니까 고난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데, 예수님께서 어떤 고난을 당하셨고, 왜 그런 고난을 당하셨고, 그 고난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는지 이런 것들이 핵심이고, 이것을 전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쓸데 없는 것에 꽂혀서 전하는거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십자가가 십자가인 것은 한자 열 십자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십자가 모양이 또 뭘 닮았냐면 더하기랑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수학 문제를 풀 때, 더하기를 안쓴다고 합니다. 모양이 비슷하다보니 문제를 풀때마다 십자가가 연상되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한글 ㅗ 모양이라던지, T자 모양으로 더하기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십자가가 더하기 모양 말고도 X자로 된 것도 있던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전하면 어떨까요?
물론 그러한 내용이 그 사람의 지식을 전달하고 이야기를 잘 이어간다라는 것을 보여주긴 할테지만, 원래 전해져야 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전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대로 하면 어떻게 하라는거에요? 십자가 이야기 이상한거 다 빼고 오직 주님께서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만을 잘 분별해서 그것만 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잘 분별해서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일단 말씀을 잘 알고, 잘 묵상하고 공부해야 겠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평소의 삶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겠죠.
그래서 바울은 15절의 말처럼 디모데가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 오직 필요한 말씀만을 전하기를 바랐습니다.
이어지는 16절에서도 또 등장하죠. 망령되고 헛된 말, 쓸모없는 말들은 버려라.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이들, 앞서 말씀드렸던 거짓 선생들은 이미 경건하지 않은 자리로 나아간다. 말씀의 핵심보다는 다른 것들, 특히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한 경건하지 않은 자리에 거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말은 뭐와 같대요? 악성 종양과 같다라고까지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악성 종양의 특징은 뭐에요? 가장 큰 것은 바로 전염된다는 것이겠죠. 빠르게 처리하지 않고 두면 온갖 곳에 퍼져 큰일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그 거짓교사들의 말이 왜 악성 종양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심했던 것일까요? 이어지는 18절에 등장합니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냐,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이 지나갔다는 이야기는 어떤 것이냐, 당시 유행했던 헬라 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죠. 몸은 부정한 것이다. 그러니 몸이 부활하지는 않는다. 부활이라는 것은 그저 영적인 부활, 어떤 회심과 같은 내용들을 비유적으로 부활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 이미 우리는 부활하였다. 지금이 부활된 상태의 모습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따르면 어떤 문제가 생겨요? 부활이 된 상태면 온전해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모습이 어때요? 아직도 불완전해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죄를 짓고 무너진다는 것이죠.
심지어 이미 부활이 지나갔다면, 나 자신이 완전하다는 생각 속에서 어떻게 되겠어요? 방탕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이미 죄로부터 매임이 풀렸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미 부활하여 온전해야 할 사람이 그렇게 무너지는 모습들을 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시험에 들수밖에 없겠죠. ‘아니 저사람은 분명 부활했는데, 왜 저렇게 살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
결국에는 많은 성도들의 믿음이 상하고 무너지는 일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 바울은 그들이 진리에 관해서는 그릇되었다고 대놓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죠.
바울은 17절에서 그들 중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그들을 주의해야 할 것을 디모데에게 전달합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들의 무리에서 주된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19절의 말씀을 통해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지할 곳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의 견고한 터가 이미 섰다. 그리고 인침, 즉 도장과 같이 찍어서 새겨진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이냐,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이것은 민수기 16장 5절에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고라와 그의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사람을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
그리고 또 어떤 말씀이 있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 26장 13절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다른 악한 세력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 주께서 악한 자들의 불의로부터 떠나게 하실 것이다.
자. 이 두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죠? 하나님께서 그가 택하신 그의 백성을 모두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짖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지키시고 불의, 즉 악으로부터 떠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공동체 내에서 그 악한 일들을 행하고자 할지라도, 주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 안에는 주의 견고한 터가 서서 성도들을 아신다, 성도들을 지키신다 새겨주셨기에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세상은 시간이 갈 수록 점점 더 악해지고, 악한 세력을 모든 곳에서 그 세력을 뻗칩니다. 심지어는 주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도 그들이 활동하며 성도들을 괴롭히기까지 하죠.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활동하고 성도들을 괴롭히고자 할지라도, 주님의 진리는 그러한 여러 시도들에 꺾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분명 성도들을 지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악해져만 가는 세상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떤가요. 혹시나 여러분들이 거하는 공동체, 교회 공동체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공동체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나요?
아마도 어떤 곳에서든 여러분을 힘들게하고 무너뜨리고자 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백성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백성들을 끝까지 지킬 것이다.
주님은 분명 주께 택함받은 여러분들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삶 끝까지 여러분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자, 이어서 20절을 볼까요? 바울은 이어서 그릇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 은 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이 있다. 무슨 이야긴가요? 갑자기 그릇 파는 곳을 홍보하는 것도 아닐테고, 당연히 이것은 비유의 이야기겠죠.
큰 집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여러 그릇들은 그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지체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 안에 여러 다양한 모습과 성정을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면 주님은 그들 중에서 귀하게 쓰는 자들, 또 천하게 쓰일 자들을 택하실 것이다.
자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의 입장에 있다면, 어떤 그릇을 택하실 것 같나요? 그 답은 이어지는 21절에 등장합니다.
어떤 그릇이래요? 은, 금이 아니라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그릇을 사용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중요한 내용을 한가지 더 발견할 수 있죠.
주님은 개인의 어떤 능력이나 배경이나 이런 것들로써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금 그릇이니 귀하게 사용하고, 질그릇이니 천하게 사용하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어떤 그릇이든지 깨끗한 모습으로 있어야 귀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바울은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어지는 22절의 말씀을 통해 디모데가 하나님께 택함받을 깨끗한 그릇으로 설 수 있기를 당부합니다.
두 가지 당부를 하는데요, 첫째로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청년의 정욕은 어떤 것이냐, 일차적으로는 당연히 성적인 유혹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청년이니까 잘 아시잖아요? 청년의 정욕이 성적인 것만 있나요?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을 크게 무시하는 것이죠.
또 어떤 욕망이 있으신가요?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 여러가지 욕망들이 있겠죠. 어쩌면 이것은 청년이기에 있는 감정일 수 있겠죠.
사실은 그러한 욕망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청년들이면 어떤 사람들이에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신의 가치관이 세워지는 시간이고, 점차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자적 존재로서 세워지려고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스스로 어떤 것들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마음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들은 당연히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귀한 달란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바로 그 귀한 달란트가 한순간에 욕망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신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 계획을 목적으로 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그 목적이 한순간에 나 자신으로 변화한다면, 그 모든 달란트는 바로 우리의 욕망으로 변화하고 맙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바울을 통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 그리고 동시에 그가 양육하는 여러 청년들에게 그러한 정욕을 피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두번째 바울의 당부는 무엇인가요?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말합니다.
바로 앞선 욕망들을 내려놓고 피한 이후에, 그 자리를 뭘로 채우는거에요? 부르는 자들과 함께함으로서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은 무엇이냐, 주님이 절대로 그 빈자리를 혼자서 채우라고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죠?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 즉 주님이 함께하시는 교회 공동체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청년의 정욕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또 동시에 그 자리를 온전히 믿음과 사랑, 화평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세우신 공동체가 함께해야지만, 온전히 주님 기뻐하시는 깨끗한 그릇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이어서 바울은 23절에서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 다시한번 앞서 등장했던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왜요? 앞서 보았듯이 이러한 변론들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고, 성도들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유익은 주지도 않으면서, 성도들을 다툼의 자리로 내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지는 24절부터 디모데가 교회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마땅히 무식한 변론으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잘 가르치고 잘 인내해야 한다.
그래서 혹여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더라도 온유함을 가지고서 훈계해야 한다.
지금 바울이 뭘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말씀을 따르지 않고 거절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향해 온유함과 인내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처음에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악성 종양이라고까지 바울이 표현했던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조금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온유와 인내로 훈계할 것을 말했을까요?
그것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25절 하반절부터 볼까요?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무슨 이야기에요? 아무리 잘못을 행하고, 악성 종양과 같은 이들일지라도, 혹시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것을 권면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왜 바울은 그렇게 인내와 회복에 중점을 두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바울 자신의 삶이 그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이전 사울의 시기 그는 말씀의 선포자라기보다는, 이단을 처리하는 마치 이단심문관과 같은 역할을 행했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그렇게 악성 종양이라고 말하던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모습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죠. 사람들을 판단하고 상대하여 이기고자 했던 모습이 이전 사울의 모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사울의 모습을 주님은 놀랍게도 변화시키셨고, 지금의 바울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자신이 받은 주님의 은혜와 같이, 교회 공동체의 다른 이들을 향해서도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가르칠 것을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지점에서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바울이 기록한 다른 말씀인 디도서 말씀입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어떤가요? 바울은 해당 본문에서도 비슷하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다툼을 피하라고 말하는데, 이어지는 말씀이 본문과 조금 다르죠. 이단에 속한 사람, 즉 오늘 본문에서는 거역하는 자에 대해서는 멀리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같은 바울의 글임에도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생각이 변화한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변화와 별개로 바울의 이 글들이 적혀있는 곳이 어디에요? 성경말씀이죠. 그렇기에, 이 말씀은 서로 충돌한다라고 볼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하냐.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이단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히 이단들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통해 변화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이 이단들을 다 수용하고 품어야 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실 계획이라면, 그것을 기도하며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인간적인 생각으로 지레짐작하여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단이라는 존재는 그 존재자체로 공동체에 분란을 만들고 많은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이단들이 그들의 분명한 목적을 갖고 변화를 거부하며, 지속적으로 말씀을 거부하는 행동들을 한다면, 우리는 디도서의 말씀대로 죄의 길을 선택하고 행하는 이들을 단호히 끊어내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이단들을 그 존재만으로 완전히 무시하고 배척하고 끊어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정말로 변화될 마음으로 공동체에 나아오고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신들의 주장을 이어가며, 지속적으로 잘못된 가르침들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깨끗한 그릇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끊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 이야기를 듣더라도 과연 어느정도에서 그것을 결정하느냐에 있어서는 힘든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속내를 숨길수도 있고, 우리가 대체 몇번이나 그들을 참아주어야 할지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 본문의 19절 말씀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나요? 아무리 공동체 안에서 악한 이들이 그들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들의 뜻을 이루고자 할지라도, 교회 공동체는 어디에 서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에 서있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들을 끝까지 지키시겠다고 아예 인을 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한줌의 이단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실 것이구요, 주의 뜻대로 온전하게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어떤 분명한 수치나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주님께서 놀랍게 우리 공동체를 사용하셔서 그들을 대처할 수 있도록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것은 무엇이다? 그저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면 됩니다. 그렇게 행하며 모든 공동체가 깨끗한 마음으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깨끗한 그릇들을 사용하실 것이고, 또 놀랍게도 더럽혀졌던 그릇들도 깨끗하게 닦으셔서 놀랍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한번 정리해봅시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 공동체 안에 수많은 그릇들이 있으며, 그렇기에 그들 중에는 천하게 쓰이는 더러운 그릇들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그릇들로 인해 공동체가 힘들 것 같고, 우리 스스로도 어려움을 겪을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공동체를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지키시겠다고 인을 치면서까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공동체의 귀한 그릇들을 사용하셔서 그의 뜻에 아름답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을 정욕들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지키실 공동체를 신뢰함으로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신뢰함으로 다투기보다는 온유함으로 정죄보다는 인내함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공동체가 아름답고 깨끗한 그릇으로, 주님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드려질 수 있는 귀한 하임 공동체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주만 의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