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지으심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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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소개

갈라디아는 지역 이름입니다. 지금 튀르키예의 남동부 지역을 가르키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중동부 지역까지도 갈라디아 지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이 후로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오늘 날도 그렇지만, 초대교회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성경공부 교재가 없었습니다. 또한 지금처럼 종이가 있어서 누구나 책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었었지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배웠는가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배웠는지가 그 사람의 정체성과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들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증언인 바울의 주장들이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너무 새로워서 기존에 있던 모든 종교와 사상들과도 어울리지 못할 정도로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고,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일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들은 어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동안 자신들이 믿어왔던 것들과 그에 따라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완전히 잘못되었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후대의 말로, 오늘 날 우리들에게는 오래된 고전과 같은 말이지만, 루터와 동시대 인물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이루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율법을 주신 분입니까? 아니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맞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잘 지키면 의인으로 구원을 얻고, 잘 지키지 못하면 죄인으로 낙인찍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누구나 의지를 고양시켜 율법을 지키며 살도록 강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을 얼마만큼 지키느냐에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생겨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인간이고,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열등한 인간이 됩니다.
단지 유대교만 이런 원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이방 종교와 헬라 사상도 비슷한 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지혜롭고 더 많이 알고 더 말을 잘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권력이 있는 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 돈이 좀 더 많은 자들이 위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은 이렇게 위에 있는 자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갑니다.
이러한 사회 시스템과 원리에 대해서 니체와 같이 망치를 들고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증언인 복음입니다. 당시의 종교와 사상과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 완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으로부터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세상과 무엇이 그렇게도 다른 것입니까?
구원의 주체가 율법을 지키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과 동격이시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주체로서 구원을 이루어 나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진실되게 성찰해본 사람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복음은 정말 쓸데 없는 것이거나 어리석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데, 복음이 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 자신의 힘으로는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 진지하게 학문에 매진한 결과 인간이 알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 모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해보았으나 그 선이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된 사람, 결국,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완전함에 다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복음은 놀라운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자랑하는 자들만이 복음의 위대함과 복음의 놀라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더 자신을 맡기고, 복음을 알기를 원하고,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층민들에게 전파가 잘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사회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위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위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한 복음은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성공이 완벽함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소망이 있으며,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성공한 사람에게도 복음은 필요합니다.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과 관련한 모든 것을 싫어하겠지요. 그가 싫어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우리의 세계관과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복음을 사탄은 싫어합니다.
마이클 호튼 교수는 “그리스도없는 기독교"라는 책에서 장로교 목회자인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의 CBS 주일 설교를 인용합니다.
“사탄이 필라델피아를 장악한다면,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도색물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깨끗해진 거리는 서로 웃음을 머금은 보행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저주도 악담도 사라질 것이다. 아아들은 “예, 선생님" 혹은 “예, 부인"하고 공손하게 말할 것이며,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복음을 듣기 전의 세계관과 삶의 방식이 마음 속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당했던 유혹을 우리도 오늘 날 똑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줄세우기 문화에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줄세우기에서 항상 가장 위는 아니더라도 상층부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 형제 자매 사이에 아무런 위계질서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그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낫다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내가 저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나 안수집사가 되기 위해서 사역을 도구로 삼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합니까?
그렇게 우리들은 복음을 듣기 이전의 세계관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그것이 정말 치열한 영적 싸움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배우는 데에도 힘겨워합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수용하는 것도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는 변화를 싫어합니다. 어려서부터 익숙한 것들에서 돌아서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 없이 복음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폴 틸리히 “당신이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라"
칼 바르트 “예, yes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면서, 애끓는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꾸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는 것입니까? 물질을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음을 무시하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태도입니다. 복음을 알고자 하지도 않고, 다시 예전의 가치관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이 그를 진심으로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도 그와 같은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이 복음을 무시할 때에, 복음과 상관없는 모습을 보일 때에 그것이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흔적은 스티그마라고 낙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문으로 인하여 당한 상처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소유의 의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값주고 사신 예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말은 자기 자신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4 NKRV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3:1 NKRV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의 흔적, 예수님의 낙인을 지니고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 분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셨고, 여러분들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 분 안에서 평안하시고 소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의 뜻대로 이 땅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길에 고난이 있고, 조롱이 있고,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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