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0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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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만찬
마지막 만찬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주님의 날에 모여서 말씀을 듣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크신 말씀의 은혜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함께 인사를 하면서 시작했으면 좋겠는데요, 이렇게 인사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진 고난과 모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후, 삼일이 지나 부활하심으로 모든 사망의 굴레를 끊으시고 승리하십니다.
바로 오늘이 그 부활의 날을 기념하여 올려드리는 부활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주에 미리 예고해드렸던 대로 성찬식을 함께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나눈 후에 함께 진행을 하도록 할텐데요, 그래서 오늘은 성찬식에 앞서 성찬이 무엇인지, 우리가 왜 성찬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유월절 만찬을 함께 나누시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유월절 만찬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 10번째 재앙을 통해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그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열번째 재앙 기억하시나요? 장자의 죽음 재앙이었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그것을 보고 지나가 재앙을 피하도록 하셨죠.
그래서 그것을 기념한 것이 유월절입니다. 영어로는 Passover이죠. 문설주의 피를 보고 지나갔다는 의미가 되겠죠.
유대인들은 이 당시 저녁에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함께 식사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유월절 만찬을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잡히시기 전날 밤 그 전통대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신 것이죠.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날의 유월절 만찬은 평소의 그것과는 다르게 매우 특별했습니다.
15절에 뭐라고 하시죠?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날의 식사를 오랫동안 고대했다는 것을 볼 수가 있겠죠.
그리고 이어지는 16절을 보시면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이야기죠? 이제 앞으로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던 유월절의 만찬이 이루어지지 않겠다는 것이죠.
곧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후로 포도주 잔을 나누십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떡을 나누시며 이것을 자신의 몸이라 말씀하십니다. 이후에 잔을 나누시면서도 이것을 나의 피라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식사하시면서 배신자의 존재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대체 그 배신자가 누구일까? 생각합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마피아 게임을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사실 그 식사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찬을 하시면서 말씀하셨던 이야기들이었죠. 다시는 이러한 식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제 잡히시면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 그리고 부활하시는 그 일을 통해 주님의 새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무엇일까요. 새 언약이 있다는 것은 옛 언약이 있다는 말이 되겠죠.
여기서 우리가 옛 언약이라고 볼 수 있는 체제는 바로 율법의 체제입니다.
율법 체제는 딱 이 한구절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죄에는 죽음이. 순종에는 복이 따를 것이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가장 깊숙한 곳에 원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죠.
그러면 죄를 지은 우리에게는 뭐가 따라야 해요?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남아나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 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시니,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흠없는 깨끗한 제물에 자신의 죄를 씌워서 대신 죽도록 하는 것이죠.
죄를 짓고 그러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면, 각 사람의 죄는 사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람은 계속 제사를 드려야 했죠.
이것이 바로 율법으로 대표되는 옛 언약의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 언약은 어떤 것이냐, 이제는 더이상 그러한 율법의 옛 체제에 매이지 않고, 자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 우리의 원죄를 해결할 수 있는 단 한번의 제사를 통해 가능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죽으시고 이루신 모든 의로움을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는 원죄의 죄와 그로 인한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며 모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심으로써 우리는 죄로부터 영원한 승리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제 옛 체제인 율법의 일들로 의로움을 얻을 필요가 없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모든 율법을 대신 이루셨기에, 우리는 그를 믿는 것 만으로도 그 숱한 율법의 조항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신 이 행동은 왜 행하신 것일까요?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의 설명을 참고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 성찬의 기본이 되는 이 떡과 잔을 나누는 행위. 이것은 일차적으로 주님의 이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전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를 하며 출애굽을 기억했던 것처럼, 성 만찬을 통해 예수님을 기념할 수 있겠죠.
그리고 또 어떤 의미가 있느냐, 바울이 전한 마지막 26절에 나오죠. 먹고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한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전한다는 것일까요? 떡을 먹으면 지식이 상승되고, 잔을 먹으면 자신감이 상승되서 먹자마자 나가서 전도를 하고 이런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죠.
여기서 바울이 전한다는 것은 우리 성도들의 총체적인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우리가 직접 친구들을 전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친구들은 해외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는 경험들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주 쉽게, 또 자주 주어지는 전하는 자리는 바로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일 것입니다.
당장 오늘 예배를 끝나고 이 강당을 떠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삶의 자리인 것이죠.
면학실에서, 교실에서, 기숙사에서 나타나는 여러분들의 삶은 당장 성도들의 삶이 어떤지를 아주 잘 드러내주는 요소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찬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전하는 것에 도움을 줄까요.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성찬이라는 것이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있고 난 후, 교회는 이 만찬을 성례, 즉 성스러운 예식으로 정하여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성찬 예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되었습니다.
가장 처음 나타났던 해석은 중세 카톨릭의 해석입니다. 이들은 화체설이라는 해석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떡과 잔에 신부가 안수하여 기도한다면, 그 순간부터 떡과 잔은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면 그것이 우리 몸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화체설의 성찬은 어떤 위험성이 있느냐, 예수님의 몸과 피가 더렵혀질 위험성이 있었어요. 성도들이 떡을 먹다 떨어뜨린다던가, 잔을 먹다가 쏟는다던가 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로마카톨릭 교회는 어떤 결정을 하였느냐, 최대한 성도들의 손을 제한시키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로마카톨릭의 성찬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 떡을 먹기 위해 모든 성도들이 신부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신부 앞에서 입을 벌리면 신부가 그 입속에 떡을 넣어주고, 성도는 최대한 그 떡을 녹여서 먹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죠.
그러면 잔은 어떨까요? 잔의 경우는 아무리 잘 넣어주려고 해도 쉽지가 않죠. 결국 잔은 신부가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여 마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카톨릭, 현재 천주교의 성찬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종교개혁시기, 중세 로마카톨릭의 수많은 오류들을 개혁하던 종교개혁자들에게 이 성찬역시도 오류로 발견이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문제삼은 것은 떡과 잔에 대한 것이었죠. 그들은 떡과 잔이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실제 몸과 피로 변화한다면, 예수님의 몸이 무한대로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몸이니 뭔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인성과 동일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를 짊어지실 수 있었죠.
결국 뭐냐, 그 몸은 우리의 몸과 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몸이 무한대로 모든 곳에 존재할 수는 당연히 없겠죠.
또한 여러분, 예수님의 몸은 어디있을까요? 예수님이 마지막에 어디로 가셨을까요?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죠. 그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우편에 계셔야 할 몸이 갑자기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 되겠죠.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의미로 화체설을 배격하였습니다. 성찬식에 사용하는 떡과 잔은 그저 동일한 떡과 잔이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성찬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가장 먼저 마틴 루터가 주장한 공재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해석이냐, 떡과 잔은 실제로 떡과 잔이지만, 그 떡과 잔에 예수님의 몸과 피가 같이 붙어서 우리 몸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존 칼빈이 주장한 영적 임재설입니다. 떡과 잔은 그 자체로 떡과 잔이지만, 그것을 먹을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우리 안에서 그 성찬의 행동이 효력이 있도록 하신다는 해석입니다.
마지막 해석은 츠빙글리의 기념설입니다. 이 해석은 말씀 그대로 떡과 잔을 먹는 이 성찬 자체가 기념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비한 효과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학자들에 따라 츠빙글리가 그것을 주장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기본적인 해석에 따라 이렇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듯, 학자들에 따라 성찬의 예식적 효과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교단마다 어떤 것을 채택하는 것도 서로 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뭐냐, 그것이 어떻게 들어오든, 성찬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바로 거룩함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함께 성찬을 하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에 함께 참여한다면, 우리가 더욱 주님과 연합하고, 모든 공동체가 머리 되신 주님 아래 하나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이 성찬에 함께 참여함으로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머리되시고, 모든 성도들이 그 아래 함께 연합하여 모든 교회가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찬을 하는 이유입니다. 더욱 주님께 가까워지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더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이 성찬의 자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뭐죠?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고, 부활하시며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이죠.
세례를 통해 온전히 성도로서 인정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성찬을 통해 한 교회로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 인정하는 유이한 성례, 성스러운 예식이 바로 이 세례와 성찬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이 성찬에 대해서 나누어보았는데요, 주님은 자신을 흠없는 제물로서 십자가에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죄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 새 언약, 구원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로 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한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이 삶에서 주님을 더 전하고, 더 많은 이들을 주님 나라로 이끌 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러한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시고, 또한 성례를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이제 곧 행할 이 성찬의 예식을 통해, 주님의 고난을 더욱 기억하고, 주님과 더욱 연합하여 거룩하여짐으로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귀한 일들이 우리 하임 공동체 가운데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