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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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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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625 수요설교
하박국 3:17-18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반갑습니다. 이태성 전도사입니다. 몇 주 전부터 계속 어슬렁 거려서 누군가 싶은 분들도 계셨을 텐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설교의 자리까지 올라와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오직 복음만 전달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함께 말씀 나누겠습니다.
사실은 굉장히 본문을 정하기가 오래걸렸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모르시지만 저도 여러분을 전혀 모르고 심지어 저는 이 지역조차 처음이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나눌까 기도하며 고민하다가 이 문구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한번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
사실 제가 이전 사역지를 마무리 하면서 나눴던 본문이고 주제인데요, 그때도 저는 부사역자였고 마지막으로 고별설교를 하고 가라 하셔서 고민중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사실은 더 단순해지더라구요. 제가 이들에게 사역자로써 마지막으로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바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반대로 여기 와서도 첫 수요 설교를 맡겨 주셔서 본문을 고민하던 중 이 자리가 제 소개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선포하는 자리라면, 제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가장 담대하게 제가 아는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답이 명확히 나오더라구요. 역시나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였습니다.
아마 이런 수요예배까지 나오실 정도의 신앙인이시라면 이 말이 크게 불편하시거나 부정하시는 분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당연하겠죠.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 중에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고백을 안해본 분이 있을까요.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크게 감명이 없는 말이기도 할 거라 생각됩니다. 찬양을 통해서도 고백하고 수많은 말씀을 통해서도 접하기에 참 익숙한 개념이라 생각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만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고백이기 때문에, 그 익숙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간과하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선하심의 절대성입니다. 어떠한 개념에는 절대성과 상대성이 있죠. 예를 들어 수요예배가 1시간이고 60분 3600초 라는 수학적 개념은 절대적입니다. 변하지 않죠. 어떤 순간에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 1시간이 지루해서 길게 느껴지거나 너무 좋아서 짧게 느껴지는 것은 상대적이죠.
아직까진 안지루하시죠?
하나님의 선하심은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해서 표현하고 말을 하고 생각할 때 우리 개인의 기준과 판단을 이용해 ‘상대적’으로 그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범주 내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사제간의 사랑 등 최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을 생각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찌 그걸로 하나님의 사랑을 다 표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정의를 생각할 때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정의의 범위와 범주 내에서 그의 정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요?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어찌 인간을 뛰어넘어 초인간의 생각을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바로 이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는 것이죠.
이 오해의 대표주자가 오늘 말씀의 주제인 하나님의 선함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 ‘선함’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이라는 그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보죠. 여러분이 누군가를 선하다고 한다면, 보통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 하십니까. 제가 아직 잘 몰라서, 여러분은 스스로 보시기에 선하십니까? 아니면 악하십니까.
저는 선할까요 악할까요. 선하다면 왜고, 악하다면 또 왜죠?
아이들을 보시죠. 그냥 보면 천진난만하고 귀엽기만한 아이들이라 참 선해보입니다. 그런데 키워보신 부모님들은 다 아시죠. 아이들이 마냥 선합니까? 본능만 있는 그 아이의 고집과 욕심을 본 부모님이라면 쉽게 그 말이 안나오실 겁니다.
여수의 자랑 이순신 장군은 선한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구했으니 그는 선한걸까요? 선하겠죠. 상대적으로. 이순신의 두 얼굴이라는 책을 보면 그의 어떤 인간적인 어쩌면 포악하고 폭력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모습이 나옵니다. 당연히 그의 업적은 위대하지만 결코 절대적 선함을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군들 말이죠.
몇가지 예를 들었지만, 선하다는 표현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누군가보단 선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선 선할 수 있지만, 모두가 인간이기에 그 반대의 연약한 모습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실체가 드러났을 때 ‘선하다’에서 ‘선한 줄 알았는데’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선함의 기준을 신에게 갖다 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선의 모습을 신에게 투영하는 것이죠. 내가 실망했던거, 내가 기대했던 모습들, 세상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들을 생각하며 신을 기대하죠. 특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그렇게 좋으신 분이라고 하고 성경을 봐도 수도 없이 선하시다! 라고 표현을 하며 찬양에서도 교회에서도 하나님 좋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에게는 이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개념이 기본적으로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선하심에 대한 개념과 기준은 여전히 나의 개념과 기준에 갇혀 상대적으로 존재한 채 말이죠.
이 차이가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 않아도요, 언젠가 결국 내 안에 가시로 우리를 찌를때가 옵니다. 언제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선한길로 내 삶이나 세상이 흘러가지 않을 때, 어 이상하다. 하나님 선하시다 했는데, 그는 선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했는데. 왜 대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거지? 굳이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게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사고가 터지지 않습니까? 악이 점점 세상을 더욱 깊게 지배하는 것 같고, 나을 거 같은 병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 선하시다면서 왜 이런일들을 허락하시는걸까. 하나님 대체 뭐하십니까. 탄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하박국 역시 그 마음이 심히 가난해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하박국 1장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뭔가 잔뜩 화가 나서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모습이죠. 말씀 배경을 보면 하박국의 분노가 사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심지어 정당해 보이는 분노입니다.
하박국이 누굽니까? 시기상 영적으로나 나라적으로 정말 어두웠던 남유다 말기 시대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요시야 왕 때의 선지자였어요. 요시야왕 아시죠. 아버지 아몬왕이 우상 숭배하다가 부하에게 암살되어서 어린나이였던 8살에 왕이 됐죠. 어렸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10대부터 깨어서 종교개혁을 하고 나중에 그의 나이 26살 되던 해 무너진 성전을 수리하다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온 나라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사역하던 선지자가 당시 하박국이에요. 얼마나 신나게 사역을 했겠습니까? 왕이 나서서 그렇게 하니까 하박국 입장에서도 이 나라가 이제 회복하려나보다. 다시 일어서나보다 그런 기대가 가득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젊은 요시야 왕이 한창일 나이 38세에 므깃도라는 곳에서 전쟁 중에 애굽 왕에게 죽고 맙니다.
아니, 이제 좀 괜찮은 왕이 나와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좀 바로 서는가 싶었는데 너무 허무하게 젊은 나이에 죽어버리는 겁니다.
이어지는 그 후 상황은 더 암울합니다.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즉위하지만 3개월만에 애굽으로 잡혀가고 계속해서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가 이번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남유다는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학자들은 바로 이 혼란스럽고 절망의 시대에 하박국서가 기록되었을 거라 봅니다. 회복을 경험했고 부흥을 경험했던 하박국이었기에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 세력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멸망하는 모습을 납득하기란 쉽지 않았겠죠.
그래서 이렇게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부르짖음이 안들리십니까? 저 죄악이 안보이십니까?
그 절규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대답을 보시죠. 6절입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여기서 말하는 갈대아 사람이 바로 바벨론 사람들입니다. 그 뒤로 11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이 바벨론 사람들소개인데 특히 11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 신으로 삼는다. 지나치게 행해 범죄하는 자들이다 라면서 쉽게 말해 얼마나 악하고 악한 자들인지를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설명까지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바벨론 사람을 누가 일으킨다는 겁니까? 내가.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일으셨데요.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바벨론 사람을 들어 유다백성을 멸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납득이 가십니까?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는 겁니다. 그들이 아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전혀 다른거에요. 하나님께서 친히 멸하면 멸했지, 왜 악의 축, 바벨론입니까? 이 말을 들은 하박국의 분통이 당연히 터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계획 앞에 그의 선하심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잘못하고 죄가 많다 한들, 그들은 악하디 악한 바벨론 아닙니까.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 자녀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타락한 교회를 징계하기 위해 악랄한 공산정권을 사용하신다면 여러분은 그 일하심을 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상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내가 만든 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해서 믿고있는 지도 몰라요. 여러분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지금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악의 축인 바벨론을 이용해서 당신이 선택하신 언약백성 유다를 친히 멸망시키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 모습에도 여러분의 기준에서 하나님은 아직 선하십니까?
아마 하박국은 아니었나 봅니다. 12절에 호소하죠. 함께 읽겠습니다.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무슨말입니까? 하나님! 하나님 그런 분 아니시잖아요! 위대하시고 만세전부터 계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지켜주시는 분이잖아요! 하박국이 안다고 생각한 하나님의 선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는거에요. 그리고 13절에 말하는 겁니다. 왜 악한 나라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려 하십니까? 과연 그것이 옳습니까. 어찌하여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질문에 질문입니다. 왜 그러는거에요 대체. 왜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까. 마치 사극에 왕이 좀 햇갈리면 신하들이 어떡합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이런 모습 같지 않나요?
하나님 그거 아니잖아요. 왜 그러세요 대체. 하박국 선지자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극에 달은 그 순간, 바로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찬양도, 기도도, 말씀도 다 부질없게 느껴질 때 있지 않습니까. 도통 이 삶에 흘러가는 흐름이 이해가 안가는 거죠. 하나님의 선함은 고사하고 계신지 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믿음이 연약해 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박국 선지자의 선택은 다름아닌 기다림이었습니다. 2장 1절에서 하박국은 성루에 서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보며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본다고 하죠. 사실 달리 방법이 없었겠죠.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있었나요. 그냥 흘러가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버티는거죠. 다만, 뭘 기다립니까?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문제를 넘어 근본적 해결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일하시는지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죠.
응답을 기다리는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부터 말하죠. 내가 묵시를 줄 건데 잘 새겨라.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 그 종말이 속히 임할 건데 마지막에 뭐라합니까?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의 하나님에 대한 쌓이고 쌓인 오해에 대한 질문의 대답은 내가 처리 할테니 기다리라는 겁니다.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할테니 그 하나님의 정한 때를 기다리라는 겁니다.
당장 이해 되지 않아도, 내가 너의 그 선함의 기준에 맞지 않게 일을 하는 것 같아도, 때론 내가 너의 부르짖음에 침묵하는 것과 같을 때에도 너는 기다리라는 거에요. 왜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나는 너의 하나님이니까. 여기서 필요한게 바로 믿음아니겠습니까?
믿음이 뭔데요. 뭔가 이렇게 하시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겠다는 신뢰 아닙니까? 가끔 제 아들 승준이가 제가 뭐 하라하면 왜? 이럴 때가 있어요. 이런저런 이유를 얘기해도 납득을 못하면 어떡합니까? “아빠가 말했으니까!”
권위를 인정하고 따른다는 것은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 명하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1장과 갈라디아서3장에서 인용하고 히브리 기자도 히브리서 10장에서 말한 그 믿음의 말씀이 여기 나옵니다.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너가 어떻게 기다릴 수 있는지, 나의 때를 기다리는 방법, 그 도구가 무엇인지 말하는 거죠.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벨론이라는 악인이 형통하고 있고 교만하고 하나님께서 심지어 그 악인을 사용해서 우리를 심판하신다 하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선하심의 근본이 흔들리는 그런 상황이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고, 그것은 거짓되지 않으며 더딜지라도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신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데 어떻게 기다리라는 거에요? 믿음으로. 믿음을 도구로 사용하라는 겁니다. 의인이 누구라고요? 그 믿음을 사용해서 끝까지 살아내는 사람이요.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는 믿음.
여러분 세상이 다 악하게 살아도 우리가 악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거 아닌가요?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 기준과 생각과 개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궁극적이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아직 끝이 아니라고 한 이상 우리가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이해되지 않아도, 납득이 안가도, 가슴치게 답답하고 심지어 화가나도 그 하나님께 결국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믿음에 있어야 하는 거라는 겁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 수많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신앙의 선배들을 순교의 길로 가게 했으며 지금도 세계 곳곳에 누구도 찾지 않고 돌보지 않는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궁국적으로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라는 그 믿음.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의 전재조건이 회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을 인정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제한적이고 모자를대로 모자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나를 부인하는 과정이 회개잖아요. 내 기준을 내려놓는 과정.
이 과정이 없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이해도 안가고 선한지도 모르겠고 믿음의 개념도 대상도 사라진 채 열심과 형식만 남은 신앙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내가 가진 선 이해와 선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을 인정하는 것.
그렇기에 하박국서가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결국 절대자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근본적인 대상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거에요. 그가 하시는 일이라면 절대적으로 선하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경우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대한 상태를 의미하게 되는 경우를 보게 돼요. 너무나 많은 경우 믿음에 대한 대상이 없고 그 형태만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모습과 믿음의 형태는 그럴싸해 보여서 그게 믿음이 좋고 나쁘고를 결정하게 되고, 정작 믿음의 대상에 대한 고민이나 확신은 없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오늘 이 하박국의 모습.
하나님이 이해가 안가서 씨름하고 고민하고 부르짖는 이모습.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런 하박국을 보고 야 너 왜 이렇게 못 믿냐 믿음이 약하냐 책망하실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바로 이 씨름하고 고민하는 모습은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고민이고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있는 모습인거에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을 찾고 알려는 열망이 가득한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삶에 수많은 물음표와 고민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매일의 삶이 그 답을 찾기 위한 싸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의미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시고 더딜지라도 지체하지 않고 이루실 분이라는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그 자체가 신앙 생활입니다. 믿음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세상에 벌어지는 불의한 일들의 이유를 알 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앞으로도 수천 수만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견디고 버티고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으로 보여지고 증명되었는가 로마서 1장에서 말하는게 뭡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라. 그 선하심의 증거이자 완성.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거죠.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들은 하박국의 반응이 3장 전체입니다. 특히 2절에 그런 말이 있어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게 여러분 교회 부흥케 한답시고 이 말을 인용하는 걸 봤는데, 전혀 다른 의미죠. 이건 하나님의 그 이해가지 않는 그 일, 바벨론을 사용해 멸망시키겠다는 그 예언의 말씀을 하박국이 인정하고 주의 일을 이루시라는 말씀앞에 굴복한 대답입니다. 또 16절을 보시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마치 하나님의 전능함을 본 욥이 했던 고백처럼 하박국은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함으로 그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굴복하게 됩니다. 애초에 하박국은 그 모든 문제와 고민의 답과 원인을 물었다기 보다 사실은 하나님을 찾았던 거잖아요. 대체 하나님 뭐하십니까. 이게 뭡니까. 물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신뢰한 자의 반응이 이렇게 변한겁니다.
그리고 그런 자는 이런 명 대사를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17절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반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러분 처음에 했던 고백을 다시 되새겨 봅시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고백이에요.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이 앞에 어떤 문장이 들어가도, 어떤 잔인하고 상상도 하기 싫은 그런 일들이 내 삶에 일어나고 보여져도 우린 이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이시간 간절히 선하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기도
함께 기도할 때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는 연약합니다. 잘 믿고 싶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려 하지만 늘 현실에 벽에 넘어지고 때로 원치 않는 고난의 벽 앞에 주저앉아 허덕이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한심하고 무능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붙들려 다시 산 존재이기에 내가 오늘 다시 부르짖습니다. 주여 연약한 나를 붙드사 주의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달라고 그 선하심을 내 마음 깊이 고백하게 하여 달라고 주님의 이름 부르짖고 기도합시다!
한번 더 기도할 때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길 원합니다. 우리 예수사랑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 이 교회가 올바른 복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울려 퍼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과 타협이 아닌 불을 지피러 오셨다 말씀하신 주님처럼 우리가 담대히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서게 하여 달라고 함께 기도하시고
또한 실제로 원치않는 병마와 싸우고 숫한 고난으로 힘겨워하는 성도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주여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함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게 하시고 그 모든 역경, 하나님을 알아가고 천국을 누리는 재료가 되게 하셔서 힘들어도, 지치고 더디고 넘어져도 결코 주를 향한 발걸음 멈추지 않도록 내가 우리가 교회가 함께 품겠노라고 함께 주여 이름 부르짖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선하십니다. 제가 감히 이 부족하고 더럽고 모자란 입술로 고백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언제까지나 선하십니다.
때론 우리의 한계로 아버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잘못 호도된 복음으로 인해 말씀을 곡해하는 우리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고 바른 복음 바른 지식이 우리에게 부어질 수 있도록 은혜 더하여 주시옵소서. 인생의 풍파로 힘들어 하는 수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그들과 친히 함께하시는 주님. 세상의 안락과 축복이 우리 모두의 목표가 되기 보다는 주어진 모든 환경과 상황 속에서 모든 것 뛰어넘는 담대한 믿음 허락하시고, 아버지 당신과 깊은 관계 가운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 평안을 누림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을 넘어 하나님을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 주께 의탁 드리오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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