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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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인가?
_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인가?
우리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을 갖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일상이 매일 같이 기쁘거나 행복하지만은 않다.
여러분은 언제가 가장 힘겹고 어려운 순간으로 기억되는가..? 여러 아픔과 힘듦을 마주했겠지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운 때 중 하나는 삶 속에서 주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이 내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다는 믿음이 있다면 버틸 수 있는 법.. 또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 끝에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면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들은 캄캄한 터널에 들어선 것처럼 막막해진다. 우리의 인생이 막막해지는 이유가 여기에서 시작됨.
그러나 문제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 더 문제는 내 삶이 막막해지는 것을 돈이나 좋은 직장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 여러분 우리 삶의 문제는 돈이 많거나, 좋은 직장을 들어가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딱 하나 방법은 우리가 주님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살아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_ 막달라 마리아
_ 막달라 마리아
오늘 본문 1절을 보자.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다.
마리아가 무덤을 왜 갔을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보려면 이 땅에 무덤과 승화원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무덤의 존재가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목적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죽은 자를 위함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함.
ex. 우리 아버지는 종종 돌아가신 할머니의 묘를 가고 싶다고 함. 왜 일까?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함.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큰 위로이며 힘이지만, 사람인터라 누군가와의 추억이 그리울 때가 있다. 무덤은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
이 땅에 무덤과 승화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떠나보낸 그 사람을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그 따스한 감정을 갖고 다시금 살아가는 데에 목적. 고대 사회에도 그 의미가 다르지 않았고,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던 것.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가서 주변을 정돈하고, 예수님과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막달라 마리아가 도착해보니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굴려져 있었다. 즉,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의미. 여러분 이 광경을 목격한 마리아의 심정이 어땠을 것 같은가? 이미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깊은 상실감에 빠져있었음..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 마저 사라졌다? 이것은 단순히 시체를 도난 당한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과의 추억, 즐거웠던 기억,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모든 시간을 잃어버린 것.
_ 요한의 표현
_ 요한의 표현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표현을 볼 수 있는데..
1절, 아직 어두울 때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건의 시점에 대해 기록을 한 것인데.. 이 내용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냐면 '새벽에, 해 돋을 때에' 라고 표현함. 그러니까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아직 어둡다'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이렇게 표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의도가 있는 것. 이 본문의 저자인 요한은 당시 빈 무덤을 목격한 마리아의 증언을 직접적으로 봤음. 그래서 마리아의 심정을 볼 수 있었음. 2절.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여기에 등장하는 그 다른 제자가 바로 요한이다. 요한은 마리아의 증언을 실제로 보고 들었다. 그 얼굴, 목소리 톤을 보고 들었다는 것. 그 얼굴이 어땠을까? 깊은 상실감에 빠져있는 것을 실제로 목격함. 그러니 요한이 복음서를 작성하면서 그 때가 아직 어둡다라고 표현한 것. 이것이 단순히 그 당시의 시기만을 표현 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느꼈던 심경이었던 것. 예수님을 잃어버렸으므로 마음도 생각도 아직 어두움에 갇힌 상태이더라..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어두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눈물이 남.
ex. 예전에 첫째 딸을 놀려주려고 장난을 침. 양치한다고 화장실에 들어간 걸 보고, 불을 꺼버림.
그러니까 아빠 아빠 무서워요! 하고 절규하면서 막 움. 그래서 딸에게 미안하다고 어르고 달랬던 일이 있음.
예수님을 잃어 버린 삶은 결국 눈물이 남. 왜냐하면 아무것도 안보이니까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뭐 우리가 때론 예수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고,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음.
그런데 직장과 돈이 캄캄한 삶을 밝혀주지는 않음. 그것들을 움켜쥐어도 어두움 속에 헤매이다가 넘어지면서 직장도 날아가고, 돈도 다 놓쳐버리는 것. 그래서 결국은 울게 된다. 마리아도 11절을 보니까 결국 울어 버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
여러분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상실감 속에서 울 수 밖에 없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면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음.. 아무리 세상의 즐거움을 좇아 기쁨을 획득 할 지라도, 내가 세상에서 어렵사리 찾은 그 기쁨은 다시 상실해버리는 것. 기쁜 척을 해도 결국 눈물이 쏟아짐.
이렇게 예수님을 잃어버린 삶은 괴롭고 힘겨운 것.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 '예수님 없이 살아도 별 문제 없는 것 같던데요'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 어둠 속에 넘어져본 사람이라면 알지만 아프고, 쓰라리고 결국 눈물이 남.
그래서 나는 나의 심령을 비롯해서 모든 청년들에게 권면한다.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이 되길 바람. 아직도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길 바람.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ex. 예전에 군대 GOP에서 야간 근무를 섰던 적이 있음. 언젠가 전기에 문제가 생겨서 가로등이랑 다 꺼져버린 적이 있었음. 산 중간이라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디가 길인지 뭐가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군대 후임은 자기가 뭔가 해보려다가 걸려 넘어져가지고 총에 부딪혀 크게 당쳤다.
여러분 어두움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 나에게 빛이 없는 이상 어둠 속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면 도리어 크게 다침. 그래서 우리에게는 빛이 필요함. 내가 빛을 찾거나 아니면 빛이 오던가..
특별히 본문의 마리아는 주님이 정말 돌아가셨고,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기에 그 절망감이 컸다. 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음.
_ 생각에 골몰하다
_ 생각에 골몰하다
15절.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은 상실감 속에서 울고 있을 때 마리아에게 다가오심. 여러분 우리가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빛이신 주님께서 찾아오신다. 우리라는 존재는 주님이 먼저 해주시지 않으면 실마리 조차 잡을 수 없는 존재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마리아가 다가오신 예수님을 못알아봄. 이 말씀을 묵상했을 때는 마리아가 눈물을 많이 흘려서 예수님을 못알아봤다고 생각했음.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눈물이 앞을 가리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니 눈물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몰라 본 것. 9절.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우리도 하나의 생각에 꽂혀버리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있는 것도 못보고 듣지도 못한다.
지금 마리아가 그런 것..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계속 증언하시고 이야기하셨지만 예수님이 없다는 생각에 꽂혀 있으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인지하지 못함.
우리들이 예수님을 왜 잃어버리는가. 예수님이 없어지셔서 잃어버린게 아니고, 존재하지 않으시기에 잃어버린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나만의 생각에 꽂혀 있는 것.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약속하신 메시지들이 있지만.. 내 생각에 골몰하느라.. 혹은 세상에서 말한 그 헛된 이야기에 골몰하느라 스스로 주님 잃어버린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
이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마 9:35.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불쌍히 여기시니.. 애간장이 녹으시는 것.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에 함몰 되어 어두움 속에 거하지 말고..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집중하라. 여러분이 여러분을 평가하지 말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를 생각하라는 것. 살아계신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우리들은 집중 해야 함.
_ 예수님이 말씀하시다
집중을 하지 못하고 슬픔에 집중하고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예수님은 다시 깨우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자, 마리아는 내 앞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단번에 깨달음.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실 때 마리아의 심경이 어땠을까? 예수님을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여전히 계시는 구나 라는 기쁨이 있었을 것.. 아직 어두웠던 마리아의 삶이 이제 밝아지는 것.
이 현장을 생각해보라. 예수님을 잃었을 때에는 캄캄했다. 울고 있었을 그 때에도 여전히 어두웠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니 해가 떠오름.
지금 마리아의 삶에는 다시금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것. 이제 인생의 어려움이 와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여러분 잘 생각해보라. 마리아의 삶에 새로운 해가 떠오른 것은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되지는 않았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시작하셨다. 다시 찾아오셨고, 다시 부르셨고, 다시 아름다운 관계를 시작하심.
여러분 우리의 삶에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비결이 무엇일까? 주님께서 나를 찾아주신다면..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면 내 인생의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새로운 소망을 누릴 수 있음.
그래서 요 10:3를 보게 되면 이런 구절이 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3]
주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계심. 관계를 맺길 원하시고, 그 이름을 불러서 인도하여 내신다.
_ 적용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들이 적용해야 될 점이 무엇일까?
먼저 주님의 부활은 실제이다. 이 말은 주님께서 실제로 살아계시고,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죽음조차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 그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그 관계로 계속해서 초청하심. 지난 3주간 계속 반복되는 메시지이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초청하심.
그러나 우리들은 나만의 생각에 골몰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잃어버린다. 내 앞에 계시는데 안보이는 것처럼 안 느껴지는 것처럼 살아가서, 어두움을 향하여 걸어가버린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의 부활에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에 뜻을 두어라.
그러면 우리의 어두움에서 새로운 은혜의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