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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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교회 목회자들은 콜라를 참 좋아합니다. 어느 날 교회 냉장고를 열었는데 콜라가 있었습니다. 페트병에 담긴 콜라를 마시려고 병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들려야 할 치익하는 소리가 들리질 않습니다. 또 달콤하긴 한데 콜라의 친숙한 달콤함이 아닌 다른 달콤한 냄새가 납니다. 자세히 보니 매실을 콜라병에 담아두셨더라구요. 겉은 콜라처럼 보이지만 속은 매실이었습니다. 다행히 먹지는 않았습니다만, 이후로도 몇 번을 당했습니다.
고난주간, 사복음서를 읽으면서 문득 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겉은 비슷해보여도 속이 다르면 다른 겁니다. 같은 검은색 액체가 담긴 콜라병이지만, 그 본질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콜라병이 매실병, 간장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함께 말씀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소망합니다.
1.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
1.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사역은 낮은 자를 높이고, 죄에 묶인 자들을 자유케 하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정한 규율, 즉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시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신다든지,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거나 병자를 고치시곤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하는 자”라고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계명을 세어 총 613개로 분류했습니다. 그 중 248개는 “하라”는 긍정의 명령이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부정의 명령입니다. 랍비들은 이를 쉽게 외우기 위해 248개의 뼈마디를 가진 사람은 1년 365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들에는 대부분 구체적인 실천 지침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울타리와 같은 세부 규정을 만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 혹은 구전율법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미쉬나’라는 문서로 정리되었고, 이 미쉬나를 가지고 토론하고 풀어낸 ‘게마라’라는 책을 만들어 냅니다. 이 두 책을 합친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탈무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장로들의 전통을 어린 아이 때부터 가르치며 성경만큼이나 권위 있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어기신 예수님을 보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무시한다고 정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모세가 받은 율법이고, 선지자는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구약 전체를 거스르는 자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에 집중한 나머지 율법에 본질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표면적인 의미에만 집중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든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본질을 밝혀주십니다. ‘일하지 말라’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안식일’을 누리는 것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졸지 마! 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졸지 않기 위해서 게임을 한다던가 옆 친구와 떠드는 것은 선생님의 말씀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잠깐 교실을 벗어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오거나, 스트레칭을 하고 돌아와 수업에 집중하는 편이 오히려 선생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학생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시거나 폐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분입니다.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기준에 합한 행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겉모습은 ‘명령’으로 보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시각도, 신앙생활을 하는 마음도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의를 위하여, 종교적인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면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알려주시고 또 그것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분이십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과 함께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지 않은 존재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준에 미치지도 못하는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기준을 만족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지키는 자가 아니라 완전케 하시는 자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으로서 오셔서 모든 율법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물로써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를 지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각종 제사와 의식법들을 완전하게 이루어 내셨고,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자녀됨의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탈무드’를 만들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는 되도록 말을 아끼자,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먼저 도와야 한다는 등의 나름의 규칙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결심은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문제는 어느 순간 이 규칙이 ‘신앙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과 멀어진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관계인데, 관계를 지키기 위해 정한 것들에 집중하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은 규칙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입니다. 형식이라는 표면적인 것에 집중하는 우리가 아닌 그 본질을 파악하고 관계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우리의 모습들?
2. 우리의 모습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현 중 하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곧 이어질 내용에 예수님의 권위를 실어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동물을 잡아 피 묻은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들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사에 관련된 율법의 본질이었던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회복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완전케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 규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이루리라.” (마 5:18)
여기서 말하는 "일점일획"은 히브리어 자음 중 아주 작은 부호나 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완전하게 이루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우리이지만,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은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셔서 율법의 본질이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이기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해야 마땅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크고 작은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큰 계명’은 지켜야 하지만, ‘작은 계명’은 무시해도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1계명과 5계명, 여러분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마가복음 7장의 ‘고르반 논쟁’입니다. 원래 부모님을 공경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재물을 “이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라고 말하면, 부모님을 외면해도 괜찮다고 랍비들이 가르친 겁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과 도둑질을 한 사람, 어느 쪽이 더 잘못했습니까? 답은 명확합니다. 둘 다 잘못된 일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시 태도에 대해서도 바로잡아 주시고 계십니다.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크건 작건 모두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께서 주신 온전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크고 작은 기준을 나눌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술과 담배는 멀리하면서도 정작 기도할 시간은 바쁨으로 핑계를 댄다던가, 작은 거짓말이나 편법은 개의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거나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최선을 다하지만 중요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소홀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또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 5:1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와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를 비롯한 공동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예배의 처소입니다. 작은 것 하나, 만나게 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
3.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
마지막 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에 가장 종교적, 도덕적, 율법적으로 가장 의롭다 여겨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탈무드와 같이 수많은 조항들을 만들고 철저하게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는 몇 걸음 이내로 걸어야 하고, 하루에 몇 번 기도해야 하는지, 어떤 손으로 먼저 옷을 입어야 하는지까지 정해놓고 이를 삶에 철저히 적용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보다 더 의롭게 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의'가 겉모습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이었습니다. 같은 ‘의’라는 페트병에 담겨져 있지만 거룩을 지키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한 의로움과는 거리가 먼,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나은 의'는 율법 조항을 더 많이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잊고 있었던 본질인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율법을 완벽히 지킬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수없이 다짐해도 수없이 무너지는 연약한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위해 율법을 완성해주신 의로우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받아들일 때,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그 완전한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가 받습니다. 이 전가된 의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 복음의 본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율법을 대함에 있어 외식이 아닌 본질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그 의를 덧입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는, 우리의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점점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을 품게 되면 이전에는 나를 옭아매는 것처럼 느껴졌던 율법들이 자유함 가운데 기쁨이 됩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단순히 명령을 지키는 데에서 벗어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자연스레 애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 본문들에서 살인, 간음, 맹세, 보복, 원수 사랑 등 율법의 조항들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제시하시며, 율법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셨고,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단순한 행동의 금지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사랑의 실천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고난주간 우리가 가져야 할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맘때에 많은 행사들이 있습니다. 성경통독, 특별새벽기도회, 각종 금식 등 참 좋은 일들입니다. 우리 교회도 고난주간에 사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여주기나 자기만족과 같이 ‘외적인 의’나 단순한 행사로 끝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활동들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을 통하여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더욱 예수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과 또 저와 여러분의 모든 가정과 일들 가운데에 표면과 형식에 집중하여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적용
제가 결혼을 하고 난 뒤에 바뀐 것들이 있습니다. 본래는 집에 참 늦게 늦게 들어오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저렇게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저녁 여섯시면 여섯시, 열시면 열시 딱 시간을 정해놓고 집에 최대한 빠르게 가려고 노력합니다. 또 내가 한 일들에 빈틈이 있지는 않은지 오늘 옷은 괜찮은지 아내의 참견이 꼭 필요합니다. 오히려 없으면 서운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답은 ‘관계와 사랑’에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러한 규칙들에 얽매였다면 저는 아마 불행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따로 규칙을 정하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빨리 가려고 노력합니다. 아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좋아하는 행동은 더 자주 해주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않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율법이 나를 얽매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관계설명서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우리는 이미 의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권자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의인답게 자녀답게 시민권자답게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쁨으로 또 자유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며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다시금 율법과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기억하시고 또 붙드시길 소망합니다.
율법의 본질은 관계의 회복이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이 율법을 완전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본질을 기억하며 살아갈 때에 날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기 위해 기쁨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 율법의 짐을 버려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짐을 ‘자신이 지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자유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인 자가 아니라, 완성된 율법을 가진 자녀 된 자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방종과 다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고, 지키며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율법의 본질을 삶으로 살아내며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