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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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위로가 되려면

2주전 심판이 위로다는 말씀을 나훔을 통해서 봤습니다. 그렇지만 심판이 내 눈 앞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 현실이 그렇죠 - 나와 상관없다는 여러 이유를 찾습니다. 하박국이 그랬나? 그리고 부활은 심판인가?
우리는 미가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고 인자(인애)와 겸손이 동행하는 것이다는 말씀을 이제는 충분히 기억할 수 있도록 들었습니다. 이를 단어로 표현하면 인애, 공의, 의라고 표현합니다. 공의를 쉬운 말로 정의라고 말하고 ‘정의롭게 행하다’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여기에 행하는 기준이 의인데 이를 공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쓰일 때 ‘의롭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의로우신 분’이라고 하죠. 또한 하나님을 향하여 ‘의로우신 하나님’ 이렇게 기도할 때 부르는 명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어떤 행동이 타인을 위할 때 ‘이타심’을 ‘의로운 시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대표적으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의로운 사마리아 인’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나는 괜찮겠지 하는 결과는 결국 나라를 물들여 하나님의 길을 떠날 뿐만 아니라 패망의 결과를 보여주는 역사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과정을 우리는 ‘결과론’적으로 끼워 맞추듯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소선지서를 소 예언서로 부르는 이유는 예언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역사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말도 하겠죠.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니 믿지 않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럴 때 앞 뒤로 쌓인 요나와 나훔을 통해서 이방민족의 대표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심판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장으로 구성된 오바댜는 어떻습니까?
자기 형제였던 나라를 향한 폭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인가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 흔한 것이라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살면서 가깝다는 친구의 배신 그리고 가족의 배신은 우리를 무너뜨리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바꿔보면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갖는다고 말하면서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에 향하는 방향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담에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유사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한 외형에 드러나는 태도, 행동은 잘 알고 있듯 ‘마음의 상태’에서 출발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행동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왜 세상을 살면서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학생으로, 세상 어딘가 걸친 경계인으로, 부모로 각자의 생각과 고민이 있는데 너무나 쉽게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저렇게 생각하면 안 돼하고 말하는 모습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기독인들이 오늘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그래서 눈쌀 찌푸리고 기독교인들이라도 서로 형제가 아닌듯 갈등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바댜가 심판을 말한다면 하박국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우리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표현이나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한다’는 구절들이 있지만 노래의 분위기는 실상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않는다’ 이정도가 아니라 ‘어느 때까지’라는 뒤에 이어진 말씀과 ‘강포로 말미암아 외친다’ 그럼에도 ‘구원하지 않는다’는 2절 전체의 말씀이 하박국의 간절함과 시대적 상황을 함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제국이 훅훅 지나가기 때문에 정신이 없겠지만 유다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습니다. 이집트를 침공하기 위해 항상 제 집 드나들듯 한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나마 절기조차도 마음대로 지키지 못했던 상황을 기억하시길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벨론 제국이 아직 패권을 갖지 못한 시기에 유다는 국제 정세 속에서 약소국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오히려 통치를 한 제국으로 부터 받는다면 그나마 안정적 시기라는 시대를 보냈겠지만 이렇게 신흥 강자가 꿈틀거리면 혼란한 틈에는 늘 약자가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바벨론은 니느웨를 함락시켰습니다. 갈그미스라는 곳에서 약화 된 앗수르와 이집트 연합군을 물리친 것이 주전 605년입니다. 그렇게 지역 패권을 장악하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약소국들에 대한 압박인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지역을 통치하니까 인정하느냐 그렇다면 조공 바쳐라 인 것이죠.
여기에서 하박국의 호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유다가 잘못을 했습니다. 미가서의 내용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즉 북이스라엘의 길로 간다면 멸망의 길인데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니느웨를 통해서 알려 준 것이라면 유다가 앗수르를 피하니까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받는 것이 맞냐는 질문이 하박국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3절에 ‘내가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러자 4절에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한다’는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가서에서도 그러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미가서 2장에서 멸망과 3장에서 그런 중심에 있는 권력자들을 말했다면 4장에서 이루어질 공의가 이방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을 드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가 되지만 결국은 돌아오게 된다는 말씀이 6절부터 예언된 것이죠. 그럴 때 우리가 잘 아는 5: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망하면 이제 끝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신바벨론이 등장해서 유다의 책망의 도구를 사용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불만 표출이 하박국서에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갈그미스 전투 후 그 유명한 느부갓네살의 2차침공이 있은 후 10여년 후 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앞서 살핀 2-4절은 하박국의 눈에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다는 불의하다고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마치 오느날 같은 기독교라 하더라도 창피하고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징계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박국서에 등장하는 ‘강포, 죄악, 패역, 겁탈, 변론, 분쟁 그리고 율법의 행이나 정의의 왜곡’이 현재의 유다 사회를 나타내는 말인 것처럼 매우 유사하게 오늘 한국의 기독교를 표현해도 손색이 없는 단어들이라는 것이죠. 여기 대표적인 ‘겁탈과 강포’라는 표현의 반대가 ‘정의와 공의’(겔45:9)인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무너진 사회 질서와 붕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렘20:8; 겔45:9; 암3:10)
그래도 당시는 나름 요시야 왕 시기인데 그는 이스라엘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왕하22-23, 대하34:1-36:4) 그러나 뜻 하지 않은 요시야의 죽음이후 오히려 유다 사회는 더 깊이 병들어 갔습니다. 오죽 했으면 선지자가 자신의 나라를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신원하고 있다는 것이죠. 당시의 표현 중 열왕기하 24:4 “4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예레미야 22:13–14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 정의와 공의와는 거리가 멀고,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인 시대였다.
그런 하박국 선지자의 첫 번째 질문에 오히려 여호와의 응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내용이 5절에서 11절가지 나옵니다. 그 내용은 갈대아 사람(이 표현이 대부분 느부갓세살 이래의 바벨론을 가리키기 때문) 즉 신 바벨론을 이용해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응답입니다. 그러자 하박국은 12절부터 어떻게 더 나쁜 바벨론이 그래도 덜 나쁜 또는 그래도 명색이 하나님의 백성인데 치게하시냐는 선지자의 탄원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어렵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은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전도할 수 없는 상황과 우리와 같은 작은 교회는 월세를 내지 못하면 문을 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닐 때는 그런 걱정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교회를 운영할 때는 교회의 정의로움과 같은 이유만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운영 방식에서 안 되면 문을 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세상의 운영 방식에 휘둘리냐고 기도하는 것이 꽤 있어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눈으로 보면 보이는 힘이 있습니다. 경찰이 갖는 힘을 공권력이라고 하고 요즘 검사들이 힘을 갖고 있는데 그 힘도 공권력이라고 하면서 기소권 즉 죄가 있는 사람에 대한 판단으로 재판을 받게하는 힘이 있는 것이죠. 학교에서도 힘을 쓰는 친구들이 있고 회사에 가면 사장은 자신이 가진 운영하는 힘이 있죠. 그런데 힘을 잘못 쓰면 즉 법이 주어진 권한을 넘어서면 문제가 생깁니다. 왜 그런 문제가 생기는가 하는 것은 결국 주어진 권한 이상을 쓰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11절에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했고 결국 그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이어서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체게 행하여 범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은 결국 이 땅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렇게 힘을 가진 자들의 월권 즉 ‘지나치게 행하’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유다의 심판은 눈에 보일 때는 더 큰 힘을 사용하는 바벨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서에서 우리를 다스릴 왕이 오신다는 말씀을 이해했다면 왕은 통치를 하실 것인데 통치의 방식이 지금처럼 9절부터 ‘사람을 사로잡는’ 방식 10절에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 점령’하는 방식, 11절에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방식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 ‘고난’과 ‘부활’의 길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도 믿음이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박국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12절부터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바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만세 전부터 계신분’, ‘심판하시는 분’ 13절에 ‘눈이 정결하셔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 그렇게 하나님을 말하다 17절에 그런 분께서 그렇게 즉 새로운 나라를 등장해서 그 나라로 하여금 유다를 치게하는 것이 ‘옳으니이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이해의 출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 할 때만 알 수 있죠. 시편 73편에서도 그러한 궁금 중 즉 어떻게 악인이 더 잘 됩니까? 왜 그들은 장수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서 죽을 때도 고통 받지도 않고 죽습니까라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간구를 시편 기자가 읊조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결론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3년전 대통령을 뽑았고 어찌되었든 근소한 차이라 하더라도 새롭게 당선된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잘 통치해서 더 나은 나라가 되길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두껑을 열어보니 잘못 뽑은 것이죠. 앞서 미가서에서 예수께서 종국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심판과 구원을 대리하시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것은 결코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한 방식의 왕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 오신다는 것은 ‘통치’를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껏해야 자신들의 역사에서 기억되는 다윗 왕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 정도가 되면 세상의 모든 왕들이 머리를 숙이고 이방인도 다윗의 공의를 좇아 찾아와 경배를 할까요? 그렇지 않죠. 결코 세상의 방식으로 오시는 왕은 다윗 이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그 정도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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