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정도로 멋진 복음(12)십자가로 무너진 벽, 부활로 열린 길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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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사랑하는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수많은 교회 간판에, 찬양 가사에, 전도지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말씀의 뒷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복음의 핵심입니다.

1.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진짜 이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시려는 분일 거야.
내가 잘못하면 벌을 내리시겠지.
하지만 성경은 그 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2. 심판의 실체: 어둠을 사랑하는 마음

그 다음 절인 19절은 심판의 내용을 이렇게 밝힙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예수님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행위가 악하므로’입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합니다. 나는 나름 착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그래도 양심껏 살아왔는데?
그러나 성경은 단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다.
그리고 그 죄는 단순히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고 나 자신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죄는 단절을 만듭니다. 관계를 끊습니다. 하나님과의 나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습니다.

3. 죄가 만든 벽: 세상은 지금 심판 아래 있다

죄가 쌓이면 벽이 됩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직장 동료 사이에 벽이 쌓입니다.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벽이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종교 간에도, 이념 간에도 벽이 생깁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바리새인과 세리, 제사장과 창녀 사이에도 벽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과 북한, 미국과 중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도 여전히 벽은 높게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철학을 발달시키고, 종교를 만들고,
도덕을 가르치고, 전통을 세우고,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이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벽은 죄로 인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해법: 십자가

사람이 세운 벽은 사람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그 벽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병자를 고치셨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 남은 하나님의 방법.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벽, 바로 성전의 휘장을 찢어내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벽이 무너짐으로써,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십자가가 무너뜨린 벽, 교회가 세운 공동체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도 무너뜨렸습니다.
원수였던 그들을 하나로 만든 사건. 그것이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서로를 개, 돼지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게 된 기적.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고전 2:2)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갈 6:14)

6. 부활: 십자가 능력의 클라이맥스

그러나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만약 죽음으로 끝났다면,
십자가는 슬픈 이야기로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십자가 능력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죽음을 넘어서신 그분의 사랑이 오늘 우리를 살립니다.

7. 적용: 요 3:16의 주인공이 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어둠을 사랑하지 말고, 빛을 따라 나오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의 고백을 세례로, 삶으로, 용서와 사랑으로 증명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아는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뒤에는 어떤 말씀이 나오는지 잘 모릅니다. 이 이후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 아들을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고, 그 아들을 믿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심판의 내용은 ‘빛이 왔지만 당신이 자신의 행동이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피하지만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빛으로 나온다. 먼저 이 빛은 1장1-3절에 기록된 바 세상을 창조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곧 생명이고, 이 생명이 바로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만들고 유지하고 운영하는 그 생명의 빛이 사람들에게 왔지만 사람들이 행동이 악해서 빛보다 어둠을 좋아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나는 행동이 선하고 어둠보다 빛을 좋아한다고 생각할거에요. 그러나 사람들은 예외없이 행동이 악하고 빛보다 어둠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죄’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도 모르고 빛도 모르고 생명도 모르고 어둠도 모르고 죄도 잘 모릅니다. 그나마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알려고하면 불행중 다행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면 불행하고, 모르면서 알 생각도 안하면 더 불행합니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에 중독되어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을 살아갑니다. 이 죄라는 독이 퍼져서 우리의 마음, 생각, 말, 행동을 망가뜨렸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빛이 와서 우리에게 비춰줌으로 인해 그 빛을 보기만해도 독이 다 제거되고 계속 살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여 빛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삶이 깜깜하고 답답하고 막막한 것입니다. 이것도 이미 괴로운 심판의 결과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이 악한 것인줄도 모르고 계속합니다. 길에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동은 뻔히 악한 것인데 어떤 사람은 저에게 그것이 환경미화원들에게 할 일을 주는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던졌습니다. 빛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삶이 이와 닮았습니다. 한가지 예를 듭니다. 자기의 행동이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의 행위가 어떠한가? 나는 저 사람이 이해가 안되고 싫다. 꼴도 보기 싫고 소리도 듣기 싫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면전에 대고 욕을 하거나 주먹을 날리기도 하고, 뒤에서 험담을 하거나 연락을 끊어버리거나 저주를 하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니까 내 마음이지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부터가 악한 것이며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과 ‘벽’을 만드는 것이 악한 행위 중 한가지 입니다. 그 벽은 나를 고립시키고 어둠에 갇히게 만듭니다. 그렇게 살면서 사람들이 쌓은 벽은 마치 바벨탑처럼 견고한 성벽이 되어 쌓여 갑니다. 그것은 마치 죄의 탑과도 같습니다. 이웃 사이에 직장 동료들 친구들 가족들 간에 자기 마음에 안들면 벽들을 쌓기 시작합니다. 벽이 높게 쌓이면 이제 그 사람은 안보고 살만큼 쌓이게 됩니다. 왼쪽과 오른쪽에 어마어마한 벽이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에도 있습니다. 종교 간에도 있습니다. 한국과 북한 간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도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도 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도 있고, 바리새인, 제사장들과 세리, 창녀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서로를 보며 짐승처럼 여기고 원수처럼 여기며 죽일 듯이 싸우거나 없는 것처럼 무시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미 받은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런 분열된 삶은 곧 지옥의 그림자와 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해결해보려고 철학, 종교, 도덕, 전통, 돈, 시간, 정성을 다 쏟아내어도 불가능했습니다. 그 관계 사이에는 이미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철옹성과 같은 벽이 생겼으니 무너뜨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빛이 비출수가 없는데 자기들이 맞고 상대가 틀리다고 생각하니 벽을 허물고 빛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지옥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일 듯이 싸우는 사람들을 모두 다 사랑하시는 분이 계세요. 불쌍한 나도 내 눈에는 한심해 보이는 사람들 불의한 사람들 죽일 놈들까지 다 사랑하시는 분,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무식한 사람, 가난한 사람, 예의없고 무례한 사람, 잘난체 하는 사람, 속이는 사람, 더러운 사람까지 다 자기 자녀라고 말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다 입양하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그 자녀들이 다 화목하기를 원하세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하게 하셨죠. 그런데 그 엄청난 가르침, 그 부요한 능력, 그 대단한 기적들로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딱 한가지 비밀로 그 철옹성 같은 모든 벽을 무너뜨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모든 관계 사이에 쌓인 철옹성의 상징이 바로 성전의 휘장입니다. 사실 제일 깨진 사이에 생긴 벽은 하나님과 사람의 벽이거든요. 절대 깰 수 없었던 그 벽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그 능력은 우리의 벽들을 허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증거이자 능력이에요. 서로를 개와 돼지라고 여길만큼 혐오하던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그들이 하나된 공동체의 시작이 교회입니다. ‘부활’은 그 십자가 능력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오늘 다 설명못해요. 바울사도는 우리가 알 것은 십자가 뿐이고,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자 신비로써 평생을 두고 알아가야 할 내용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오늘 바라기로는 여러분이 3장 16절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를 신뢰하거나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먹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바로 ‘세례’입니다.
(잠시 침묵 후, 낮은 톤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의 아침 앞에 섭니다.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걸어오신 주님의 발걸음 앞에서, 우리는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는가? 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죄 많은 세상 한가운데에 내어주셨는가?
(고개를 들어 청중을 바라보며)
요한복음 3장 16절.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두려울 만큼 강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절정이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사건, 즉 십자가입니다.
(조금 더 낮은 음성으로)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더 무서운 사실을 알려줍니다. 바로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조용히 강조하며)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느니라.” (요 3:18)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심판은 단지 미래에 올 불의 날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잠시 침묵 후, 담담하게)
우리는 종종 지옥을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없이 사는 인생은, 이미 지옥의 그림자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왜냐고요?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 (요 3:19)
그들은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무지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의 정체입니다. 하나님 없이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지옥의 예고편입니다.
(톤을 높이며 전환)
그렇다면, 그런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입니다.
(잠시 멈췄다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더 강하게 외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강조하며)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며, 출발점이며, 종착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는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무게감 있게)
우리가 겪는 지옥 같은 현실의 뿌리에는 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세상에 ‘벽’을 세웁니다.
(서사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순간, 하나님과의 사이에 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도 질투와 죽음의 벽이 생겼습니다.
노아의 자녀들, 요셉과 형제들, 유대인과 이방인, 바리새인과 세리… 모두 서로에게 벽을 쌓았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는 듯한 목소리로)
그리고 오늘…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사회 속에도 수많은 벽이 존재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성도와 성도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그 벽은 너무 두텁고, 너무 견고하여, 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고개를 들며, 확신 있게)
하지만! 십자가는… 그 모든 벽을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서로를 원수로 여기던 자들을 화해하게 합니다. 죽기까지 미워하던 이들을 용서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철학, 종교, 도덕, 전통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하나됨의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가인도, 아벨도, 셈도, 함도, 요셉도, 형제들도…
바리새인도, 세리도, 창녀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습니다.
(마지막 전환점)
그리고 이 십자가의 능력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는 여전히 벽 안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완성됩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결론을 향해 나아가며)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구원은 무엇입니까?
화목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 내면의 자아와의 화목.
(일상적 비유로)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가정에 불화가 있다면… 그 집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작은 방에서, 함께 웃고 기도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마지막 절정)
십자가는 그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회복이 영원하다는 보증입니다.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오늘 부활절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떻게 우리의 죄와 벽과 심판을 이기셨는지를 다시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손을 모으며 기도하듯)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소망이 충만히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왜 독생자를 주셨나?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왜 세상에 보내셨는가?
그 독생자를 믿는 사람들에게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하시려고
이것을 다른 말로 심판을 면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은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심판을 이미 받은 삶을 삽니다.
그리고 지옥의 그림자에서 살아갑니다.
심판의 내용은 19절과 같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
인정하기 싫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무지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간접지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구원을 바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십자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내용의 정점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여정의 종점은 ‘십자가’입니다.
1 Corinthians 2:1–2 NKRV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사도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성했다고 했습니다.
또,
Galatians 6:14 NKRV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국에
평생을 놓고 십자가에 대하여 알아가는 것이고, 또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한가지만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죄를 이기는 능력인데,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간접지옥의 원인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중에 한가지는 바로 ‘벽’입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사이에 ‘벽’이 생깁니다. 이 벽으로 인한 고통과 불행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의 자녀들 가인과 아벨은 가인의 시기와 살인으로 인한 장벽이 생깁니다.
이들 자녀들은 평생 서로가 원수처럼 여기며 미워합니다.
노아의 자녀 셈, 야벳과 함 사이에 벽이 생깁니다.
야곱의 자녀들 중에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 벽이 생깁니다.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문명과 문명 사이에 벽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여겼습니다.
바리새인과 종교인들은 세리와 창녀를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무너질 수 없는 장벽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구성원들 간에 벽이 생깁니다.
직장에서 벽이 생깁니다.
가정에서 벽이 생깁니다.
너무 두터워 벽이 산처럼 느껴질 정도로 견고한 진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하나님은 너무 마음이 아파요.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기 때문입니다.
가인도 자녀도 아벨도 자녀입니다.
셈, 야벳도 자녀고 함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셉도 사랑하지만 그의 형제들도 사랑하십니다.
바리새인도 종교인들도 세리와 창녀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사랑하세요.
그래서 그들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화해하게 하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기위해서
그 어떤 철학과 사상과 법과 전통과 문화도 하지 못했던 일을
‘십자가’로 한순간에 이루신 것입니다.
절대 용서못할 원수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용서함으로 화해하고 화목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능력은 죽는 것이 아니에요.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이후에 따라오는 ‘부활’의 능력이 십자가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부활이 있으므로 십자가의 능력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죽기만했다면 아무런 능력이 아니죠.
죽기만했다면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구원과 영생과 행복

구원과 영생과 행복은 곧 화목에서 오는 것입니다.
가족간에 십자가의 능력으로 화목해지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다툼이 많으면 지옥이에요.
그러나 가난해서 풀만 먹고 살아도 화목하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싸우고 다투고 의심하고 미워하며 영원히 사는 것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화목하게 영원히 사는 것은 천국이에요.
아무리 좋은 세계여행을 가더라도 원수와 가면 지옥이고
가까운 근교로 산책을 가더라도 화목하면 천국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시킵니다.
교회를 통해서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됩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내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데
이것은 지식이나 지혜로는 절대 안되고, 돈으로도 안되며, 힘으로도 안되고
오직 십자가의 도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인한 십자가의 능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또 그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보게 하심을 감사하시는 복된 하루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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