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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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

제가 교회랑 사택을 오갈 때나 아니면 밖에 어딜 갈 때나 꼭 이주혜 전도사님 손을 꼭 쥐고 가는 걸 꽤 많은 분들이 보신 것 같아요. 그 때마다 권사님들 몇 분은 “나 봤어요~ 두 사람 손 꼭 쥐고 다니는거~”라고 하면서 놀리듯이 말씀하신 것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래서 요즘은 손 꼭 쥐고 걷다가 교인분들이 보고 계신 것 같으면 손을 후다닥 떼기도 합니다. 손 잡는 거야 당연히 손 잡기만 해도 좋으니까 손을 잡는데, 손을 떼는 건 뭔가 그래도 손 잡고 다니는 걸 보여지는 것이 살짝 쑥쓰럽기도 하고 해서 그렇게 하는데요.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희는 손을 잡거나 하는 등 스킨십, 신체 접촉을 자주 하게 되고, 그리고 이것은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하기 보다는 사실 두 사람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많은데요, 이것을 저희는 영어로 Sexuality라고 표현을 합니다.
섹슈얼리티는 성과 관련된 태도, 감정, 욕망, 행위, 정체성 등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인데요, 요즘은 이 뜻이 많이 제한되어서 성애로만 표현하기도 합니다. Homosexuality, 동성애. Heterosexuality, 이성애 이런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섹슈얼리티는 그보다도 더 큰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게 되면, 부모는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하겠지요. 그런데 사랑하면 그냥 “사랑해”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그냥 예쁘다고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아기한테 볼을 막 부비적 댄다거나 쓰다듬는다거나 뽀뽀를 해준다거나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막 볼따구를 한 입 깨물어주고 싶다 라고 하는 욕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혹은 반대로 아이가 잘못을 했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들어서 때리면서 혼내기도 하는 등으로도 나타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섹슈얼리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관계적 존재성, 감정, 친밀함의 능력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나타내고 잘 사랑하기 위해서 드러나면 좋은데, 반대로 섹슈얼리티라고 하는 것이 범죄나, 좋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때는, 다른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도 사람의 수치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샤워를 하기 위해서 욕실에서 옷을 벗는건 괜찮지만, 백주대낮에 사람들 많은 곳에서 알몸이 되게 된다면 그건 그 사람도 부끄럽고 심지어는 보는 사람도 부끄럽게 만드는,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죠.
오늘 함께 읽은 호세아 예언서는 예언서들 중에서 굉장히 독특하게도 그런 성적인 언어가 아주 중점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예언서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사랑으로서의 성과 섹슈얼리티가 등장하지만 반대로 아주 큰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기도 한다는 것이 드러나는데요, 어떤 말씀을 전하는지 한번 보고자 합니다.

역사적 배경

자 저희가 예언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가장 먼저 살펴봐야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1장 1절에 등장하는 저자 소개지요.
Hosea 1:1 NKRV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유다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 때에 살펴본 히스기야가 왕이 된 시대고, 이스라엘에서는 저희가 지난 주에 살펴본 아모스서에서 북이스라엘을 아주 크게 부흥시킨 왕으로 기억하는 시대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사실 여러분 이게 말이 안되는 말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웃시야왕 재위 중에 사망했기 때문인데요,
2 Kings 15:8 NKRV
유다의 왕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여기서 아사랴는 웃시야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는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가 유다의 여러 왕들이 지나갈 만큼 오랜 기간 동안 활동했다 라는 것이구요, 다른 하나는 히스기야와 여로보암의 특징이 각 왕국의 마지막 부흥기, 다른 말로는 딱 저 두 왕 이후에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는 시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히스기야와 여로보암2세의 시대라고 언급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의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이스라엘의 멸망과 심판에 대해서 아주 크게 강조합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전하는 말씀에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 하나가 있는데요, 바로 호세아 본인의 결혼과 아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서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보낸 다는 것입니다.

고멜과 아이들

1장에 등장하는 스토리 자체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겁니다.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서 자식들을 낳아라 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호세아가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는데요, 아들-딸-아들의 순으로 자녀를 낳는데 이 이름들이 참 이상합니다. 장남은 이스르엘이라고 해서 여로보암 2세의 증조 할아버지 격인 예후가 아합과 이세벨을 쳐서 반란을 일으킨 장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이스르엘의 피, 즉 예후가 왕이 될 때에 흘린 피를 예후의 집에 갚겠다고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시죠. 또다른 뜻으로는 이스르엘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하나님께서 흩뿌려버리신다” 씨앗 같은 것을 흩어버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둘째인 딸은 로루하마라는 이름인데, 루하마 라고 하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말에 로 라고 하는 부정어가 붙어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라는 뜻의 이름을 짓게 했어요. 그리고 셋째인 아들은 로 암미라고 해서 “내 백성”이라는 뜻의 암미에 로가 붙어서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이름으로 붙이게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은 단순히 정말 이름으로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도 한자 이름을 써서 한자를 풀이하면 이름에 뜻을 가지게 되잖아요? 근데 성경은 그런 한자 이름의 뜻보다도 더 깊은 단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전체 인생을 결정하게 되기도 하구요, 아니면 이사야가 이야기한 임마누엘, 이사야의 자녀인 마헬살랄 하스바스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로서 호세아가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데 다 저주 받는 이름들이에요. 무슨 쿠데타가 일어난 곳의 지명을 말하지 않나,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이름들을 붙이고 있는데, 사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제정신이면 이런 이름을 짓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딸인데 어떻게 자녀 이름을 그렇게 지을 수 있을까요?

정신나간 호세아

사실 정말 호세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생활도 하고 아이도 셋이나 낳았는데 고멜이라고 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바람이 나서 음행을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실로 자녀들 마저 가졌는데 그 사랑이 깨어지고 있기 때문에 호세아는 지금 아주 분노에 가득차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자신의 아내인 고멜에 대한 저주로 시작합니다.
Hosea 2:2–3 NKRV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여기서 논쟁하다 라고 하는 단어는 저희가 미가서를 살펴봤을 때에도 알수 있듯이 법정 용어로서 고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뜻으로는 고발해서 책망하라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요,
사진에 보이는 것은 누지라고 하는 마을에서 발견된 석판입니다. 여기엔 고대 근동의 문화에 대해서 잘 드러나고 특히 창세기에서 오늘날에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관습들과 그 배경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문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석판에서 나타나는 것이 만약에 어머니가 외도를 해서 다른 남자들과 음행을 했을 경우에는 자녀들이 자신들의 어머니를 고발하고, 그런 여인들은 발가벗겨져서 광야로 쫓아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모욕감과 수치심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보통 남편이 사망한 후에 이런 일이 있으면 자녀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보통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호세아는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외도 때문에 아주 정신이 나간 상태에 있어요. 그래서 호세아는 자신의 아내였던 고멜 뿐만 아니라 자녀들마저 저주하게 됩니다.
Hosea 2:4 NKRV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이것은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보면 호세아가 자신의 재산을 어느 누구에게도 상속하지 않겠다. 다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라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저희가 오늘날에는 만약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이혼하고 자녀들이 뿔뿔이 흩어진다고 해도 자녀들도 어디에서 일을 구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있잖아요? 하지만 고대 근동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자산은 곧 생명줄입니다. 재산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집, 토지, 가축, 농장과 같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이 여기에 다 담겨있기 때문에 “상속”이라고 하는 단어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그 무게가 무겁습니다.
Hosea 2:5 NKRV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여기서도 보시면 고대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등장하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삶에 필수적인 물품들을 반드시 제공해야한다고 법률로 등장하는데요, 이 떡, 물, 양털, 삼, 기름, 술과 같은 것들이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이것들을 호세아가 고멜에게 제공해줘야 하는데, 고멜이 외도를 들키고나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흥, 난 당신같은 남자 필요없어. 내 애인들이 내 먹고 살것을 다 준다고 하는걸?”하고 당당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호세아는 여기서 더 화가 치솟았는지 아예 고멜을 감금해버리겠다고 이야기합니다.
Hosea 2:6–7 NKRV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내가 아주 그냥 이것을 그 남자들에게 못가게 가두고 길을 막아서 “아, 내 남편이랑 있을 때가 더 좋았었구나!”하고 깨닫게 만들어줘야겠어!”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아예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까지 하겠다고 하는데요,
Hosea 2:10 NKRV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이 말씀은 그 내연남들 앞에서 자신의 아내를 홀딱 벗겨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그 내연남들이 구할래야 구할 수도 없게 만들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거의 성폭행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아주 큰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동을 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호세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저희가 지금 읽은 말씀은 한 여인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세 자녀를 가졌지만 그 아내의 외도 때문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남편이 아내와 아이들을 저주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를 거의 학대하고 성폭행하겠다는 내용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거의 남편의 처절한 복수극처럼 보일 정도인데, 저희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요?
Hosea 5:3 NKRV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당연하게도 호세아에게 일어난 이 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에 이것을 읽으면 굉장히 당혹스럽고 무시무시한 말씀이지만 사실 고대 근동에서는 아주 흔하게 나타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인권이 워낙 낮기도 했고, 가부장제 속에서 남편의 권위, 특히 재산의 문제에 있어서 아주 컸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그런데 여러분, 달리 생각해보면 호세아가 아주 극도로 분노해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 본문은 역설적으로 호세아가 고멜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셨는지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냥 이혼서류 작성하면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끔찍하게 사랑했던 이스라엘이 음행하는 것은 하나님마저 아주 정신이 나가서 “복수할거야!”라고 분노하게끔 할 정도로 큰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Hosea 11:3–4 NKRV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자녀가, 평생을 한 몸 한 뜻으로 살아가고자 약속했던 아내가 웬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아버지, 남편, 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호세아처럼 하나님의 분노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수준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큰 배신감을 느낀 호세아, 그리고 하나님은 끝내 어떻게 했을까요? 정말로 고멜, 이스라엘을 쫓아내십니까?
Hosea 2:14–15 NKRV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호세아로 인해서 아주 깊은 수치심과 절망을 느낀 고멜, 또한 하나님으로 인해서 아주 깊은 재앙을 당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다시 타일르고 위로하고 빼앗았던 것을 돌려주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처음 이집트에서 구원하셨을 때처럼,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처럼 돌아오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Hosea 2:16 NKRV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바알은 우상 신인 바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주인님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관계를 회복하시고 나면 더이상 이스라엘의 주인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으로서 사랑하겠다는 말씀을 전하십니다.
자녀와 아버지로서의 관계도 이제 회복되는 데요.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불렸던 자녀들의 이름도 회복됩니다.
Hosea 2:23 NKRV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지금 한국어로 번역되어서 잘 안 와닿을 수도 있는데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씨앗을 흩어버리다, 로루하마는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르엘은 흩어버리다는 뜻 말고도 씨앗을 심다라는 뜻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땅에 심겠다 라는 말씀은 그래서 더이상 흩어지지 않고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심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풀어서 말하면, 로루하마를 루하마로 부를 것이고, 로암미를 암미라고 부를 것이고 그들은 나에게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말씀

오늘 읽은 호세아의 본문에서는 성적인 표현, 스킨십과 폭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 양쪽 모두의 깊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사실은 굉장히 놀라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말로만 사랑한다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무슨 고도의 정신적인 사랑, 철학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또한 그 사랑이 배신당했을 때에 폭력도 불사할 만큼 큰 분노를 자아내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했는데 배신당하면 가서 때리고 발가벗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전도사님이 사랑하면 때려도 된댔어”하고 두들기시면 안됩니다. 아까 저희가 알아보았던 것처럼 호세아서는 히스기야 시대까지, 그러니까 북이스라엘 왕국이 완전히 멸망해서 앗수르에 흡수되기 까지의 시대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에 의해서 큰 수치를 당하고 폭력을 당한, 그러니까 이미 실컷 두들겨 맞은 이스라엘에게 “왜 너희가 그렇게 됐느냐?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이냐? 를 물었을때, 하나님이 다시 두들겨 패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다 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Hosea 11:8–9 NKRV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은 한번 배신당해서 관계가 끝나면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람난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실 정도로 더 큰 사랑을 품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이 배신해서 멸망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찌 이렇게 사랑하는 너를 버리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세아 개인의 어떤 복수심을 정당화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호세아를 통해 드러나는 말씀인 것입니다.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럼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저희는 어떻게 반응해야할까요?
본문말씀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Hosea 2:20 NKRV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 진실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저희에게 장가 드실 때에, 저희가 하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알다라고 하는 단어는 “야다(יָדַע)”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 인데요, 이 단어는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이 알다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심정을 깊이 알고 있다, 즉 공감하고 있다 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Exodus 3:7 NKRV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서, 경험하고서, 그 근심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씀하실 때 이 야다 동사가 쓰이게 되구요,
Genesis 3:5 NKRV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과 악을 구분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아는 것에서도 이 야다 동사가 쓰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인데요,
Genesis 4:1 NKRV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특이하게 성적인 의미에서 이성을 알게 되다 라는 의미에서 동침하다 라는 뜻으로 이 야다 동사가 쓰이기도 합니다.
즉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라고 하는 말씀은 정말로 하나님의 신부로서 마치 동침한 부부의 관계처럼, 서로의 몸과 마음을 통틀어서 알고있는것, 도저히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Hosea 13:4 NKRV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시선에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다른 국가들에 의존하는 행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른 신들을 아는 것, 즉 음행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저희가 해야할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다른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

제가 결혼하고 나서, 어딜 가든지 이 전도사님 손을 꼭 붙잡고, 혹여나 옆에 차가 지나가면 슬~쩍 옆으로 잡아당기고,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제가 아픈 것처럼 마음이 아파지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이 또한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지게 되면 또 알게 되는 것이 있겠지만 아마 그 사랑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너무 끔찍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더 쓰다듬고 껴안고 싶고, 잘못된 길로 가면 혼내고 싶은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위기에 처해있으면 정말 내 자신을 바쳐서라도 살리고 싶은 아내, 남편, 자녀를 향한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같은 사랑입니다.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로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고민하면서 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서 잘 자라나는 것,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이자 자녀로서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며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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