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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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서론
‘군중심리’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군중심리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이나 신념에 동조하려는 경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개개인으로는 정말 도덕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이 한 집단에 소속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생겨난 개념입니다. 이 개념에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나치입니다. 그 때 당시 정말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나치라는 집단에 소속되었을 때 일반적으로는 할 수 없는 끔찍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그저 집단의 흐름에 따라 유대인을 학살한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군대에 가서 이런 경험을 직접 느꼈습니다. 내 생각과 판단보다는 그저 내가 속한 집단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생각했지 드는 생각들도 군대 안에서는 당연히 납득하고 따랐습니다. 또한 이런 군중심리가 가장 많이 작용한 곳이 저는 바로 중고등학교 입시라는 생각합니다. 모두가 목적도 없이 그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에 따라 맹목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저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자살을 하는 비극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처럼 세상 속에서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저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고, 비교하며 맹목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 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그저 남들과 비교하며 맹목적으로 따라살다 허무하게 죽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삶을 사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남들을 맹목적으로 따라 살지 않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삶이 변화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본론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는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지만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처럼 해방을 위한 로마와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 말씀은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7절을 보면 ‘많은 표적을 봤으나 믿지 않았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적과 표적이 우리에게 믿음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내가 믿음이 바닥을 칠 때, 주변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과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모욕했을 때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보여주시길 바랬습니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이 내게 믿음을 주고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을 믿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그렇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본 세대인 그들이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맞는 말입니다. 결국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과 기적을 보이더라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거부하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눈 앞에 증거가 있어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믿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속성을 성경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8절은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의 불신앙을 설명합니다.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라고 기록되었다 증언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이 말씀은 바로 이사야 53장 1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종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한 하나님의 종에 대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졌지만 사람들에게 거부받아 고난받은 종에 대한 노래입니다. 여기서 종은 겉으로 보기에 사람이 좋아보이지 않고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종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위해 기꺼이 고난받고 멸시 받고 고통을 받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구원자가 이리 비참하고 볼품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종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예수님에 대해 예언된 말씀입니다. 실로 예수님의 사역을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이 예언을 성취하는 분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과 같으신 분이셨습니다. 고귀한 신분도 아니셨고, 물질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혜와 학식으로 스스로를 높이시지도 않으셨고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거느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낮은 자리에 내려가 섬기셨고 마침내 가장 비참하고 불명예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래서 유대인들이 많은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런 비참하고 추례한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멋있게 표적과 기적만 행하신 멋있고 고귀한 예수님만 믿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부모님의 직업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같이 가다 일하는 부모님의 더럽고 추례한 모습을 보고 모르는 사람인척 했다. 나중에 나이가 먹고 참 부끄러웠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부모님이 그 추례한 일을 통해 벌은 돈은 필요하면서 그 모습은 부끄러워하고 외면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생명과 복은 필요하면서 그런 예수님은 싫어하고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우리는 그래선 안됩니다. 내 생명과 복을 위한 십자가를 필요로만 하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아선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과 영광으로 여기고 우리도 져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40절에서는 또 다시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해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이번에 본문이 인용한 말씀은 바로 이사야 6장 10절 말씀인데 이사야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사명을 받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는 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내용과 의미가 우리가 알던 하나님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시고 죄에서 돌이키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고 심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같습니다. 거기에 일부러 회개하지 못하게 막으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겐 큰 혼란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말씀의 맥락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본래 기록된 이사야 6장을 살펴보면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 9절 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라리 하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지 말고 돌직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해서 그들이 거부하게 해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정확해서 듣는 사람들이 기분 나빠서 거부할지라도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말씀을 들으면 회개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회개 안하게 바꿔놓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게,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사람들이 믿기 쉽게 복음을 바꿔서 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장 8절에 자신을 위해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자를 간절히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좀 복음을 듣기 좋게 전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래도 사람을 회개하고 살라면 좋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일차원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멀리, 더 깊이 생각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이사야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로 복음을 전했으면 더 많이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말로 크게 부흥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왜곡된 복음은 분명 큰 부작용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결국 진정한 회개와 변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돌아오고 믿음을 가졌겠지만 삶은 전혀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욕심을 따라 살고 세상을 따라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차적으로 복음의 변질을 낳아 후에 믿을 사람들도 가로막았을 것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의 삶이 여전히 죄악 속에 있고 하나도 변화된 것이 없다면 후에 믿는 자들도 그 모습을 닮거나 아예 믿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든 점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그로인해 그들을 심판하시더라도 올바른 복음을 지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바라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바라보셨기 때문에 기꺼이 낮고 비천한 자리에 가셨고,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것을 알면서도 올바른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기 원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었던 자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가장 적대했던 공회에 속해 있던 관리 중에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관리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공무원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짤리지 않기 위해 믿음을 속으로만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관리의 원어 ‘아르콘’을 보면 여기에는 지도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오늘 성경이 말하는 관리는 공무원같은 부하가 아닌 국회의원과 같은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이들이 믿음을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합니다.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지도자로서 권력과 사회적 지위, 명예를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앞서 말한 예수님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귀히 여기고 권력과 사회적 지위, 명예를 모두 버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사랑하여서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 지위, 명예를 모두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만약 아직도 내가 사람의 시선과 명예, 평판, 인정 때문에 일희일비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도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세상의 좋은 것을 모두 포기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몇 주간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가장 비참하고 불명예스러운 그 짐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은 꺼려하고 하나님은 인정하는 그 일이 십자가인 것을 알고 기꺼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십자가일까요? 그것은 교회에서 가장 인정받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목사님하고 같이 일하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붙어다니면서 교회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교회가 필요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목사님하고 제일 못만나는 일입니다. 누구도 관심을 별로 주지 않고 중요하다고 생각 안하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더라도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은 일할 사람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자리가 부족해서 문제이지 일할 사람이 부족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사람이 부족합니다. 할 일을 많은 데 일할 사람이 없어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런 일을 기꺼이 감사함으로 하는 자가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세상과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그 기준에 멋있는 하나님의 일만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일은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희생하는 일인데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장 8절에서 자신을 위해 일할 자를 한탄하며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우리 교회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주셨냐면 들판에 익은 곡식은 많은 데 추수할 자가 없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에 보내주시고 싶은 준비된 영혼은 많은 데 그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할 자가 없다는 뜻이였습니다.
이것은 담임 목사님과 같이 일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전도사로서 어찌보면 드러나는 일인 설교를 맡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려는 가가 아니라 사람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사님과 떨어져 세상과 사람이 보기에 낮고 천한 일을 하는 사람도 오늘 말씀에 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한 것처럼 나 아니면 이 일할 사람 구하기 힘들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목사님과 교회에서 인정받고 칭찬받으려고 하면 그는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려는가가 아니라 사람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기준으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 권면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못 받는다고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자신이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기 원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일한만큼 대접받고 대우받기를 원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위해 일한 것이고 하늘에 상급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늘의 상급을 쌓고 하나님의 칭찬을 바란다면 오늘 이와 같이 행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잠잠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십시오. 누가 내가 일하는지 모를 정도로 애쓰고 헌신하십시오. 누가 알아주지 않고 자신이 일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일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일하십시오. 여러분 기계가 잘 돌아가면 어떤지 아십니까? 정말 조용하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기계가 문제가 있으면 시끄럽게 소리가 나고 연기가 납니다. 여러분이 일하시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이 없을 정도가 될 정도로 일하십시오. 그런자가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한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결론
우리가 교회 일을 하다보면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너 교회 오래 다녔는데 교회에서 직분이 뭐니? 너 교회에서 애 많이 썼는데 많은 직책이 뭐니? 너 교회 그 정도 다니고 애썼으면 이젠 한 자리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밥하고 청소하고, 시다바리짓할래? 이제는 교회에서 대접 좀 받아야지. 여러분 이런 소리는 모두 세상의 소리이고 사람의 소리입니다. 지극히 세상과 사람의 관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말씀이 육신되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삽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직분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직책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한 자리를 해먹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에헴하고 대접만 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 바라봤습니다. 기꺼이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고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셨습니다. 거기에 가장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