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0 주일오후예배: 시편 22; 마가복음 15:34; 히브리서 4:14-1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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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22편입니다. 읽는 것은 시편 22:1-11 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22:1–11 NKRV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그리고 마가복음 15:34 입니다.
마가복음 15:34 NKRV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4:14-15 입니다.
히브리서 4:14–15 NKRV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함께 읽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8장 제2항입니다. 제가 제목을 읽으면 함께 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8장 중보자 그리스도
2.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한 실체를 가지시고 동등하시지만 때가 차매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는데, 인성의 모든 본질적 속성과 사람에게 공통된 연약함까지 지니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이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마리아의 실체로부터 잉태되셨다. 그러므로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되는 이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은 전환이나 합성이나 혼합이 아니라 한 위격 안에서 불가분리하게 함께 결합하였다. 이 위격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지만, 그럼에도 한 분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후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부활절로 우리가 함께 지키고 있는데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큰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며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교회에게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희생해야 하고, 박해와 고난을 받기만 하고 그냥 죽어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믿지 않는 자들보다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생하고 고난을 받아도 소망할 수 있는 것은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런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 땅에서 고난받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소망과 위로가 되는지를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깨닫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는 말씀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을 인지를 하거나, 또는 잘 묵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부활하신 그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높아지셨다는 것이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을 다시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잠시 오셨을 때는 낮아지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유한한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겁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당하셨고, 배고픔과 슬픔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이라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전과는 차이가 있는 하나님으로서 계시는데요. 바로 이전에는 시간적으로 아들이신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기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성육신하시고 승천하신 뒤로는 하나님이자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오직 유일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으로서 이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오늘은 승천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이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교회와 우리, 특별히 고난을 받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승천하신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시편 22편입니다. 오늘은 이 22편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11절을 중점으로 선포할텐데요. 이 시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다윗이 고난 중에 지은 시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의인인데도, 그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데요. 아주 극심한 고난을 받습니다. 바로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즉 이스라엘 백성, 교회로부터 고난을 받습니다. 그것도 아주 극심한 고난을 받게 되는데요. 그 고난을 받을 때 탄식하면서 쓴 시편이 바로 22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먼저 1-2절에서 그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탄식합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모순적인 상황을 발견합니다.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의 편이신 것, 특히 의인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이신 것으로 확신하였는데,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다윗은 받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지 않고 저기 어디 멀리 가 계신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데, 여기서 신음 소리로 번역된 이것은 사자와 같은 짐슴의 울부짖음을 뜻합니다. 사자가 어떻게 울부짖습니까? 바로 아주 큰 소리로 그 주변 공간이 떨릴만큼 울부짖습니다. 그정도로 다윗이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울부짖음에도 자신을 멀리하심으로 자신의 기도에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반응하지 않으심을 탄식합니다.
그것도 어떻게 구체적으로 말입니까? 2절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데도 결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심을 탄식합니다. 다윗은 공간적으로는 멀리 계신 하나님, 시간적으로는 어느 때에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결국 다윗은 계속 자신이 부르짖고 있는데 어찌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왜 그러시냐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내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시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고 고통스럽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여전히 “내 하나님”이리고 고백하면서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행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욥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고백이 3-5절에서 자세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과거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의지한 하나님을 구원하셨던 것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탄식하다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3절 첫 부분의 원어는 “하지만 주는”이라는 강조의 말로 시작하면서 1-2절의 하나님과 대조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1-2절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바로 다윗을 버리신 것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3-5절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면서, 과거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으로 다시 돌아와달라고 간접적으로 촉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독특한 것은 2절에까지 다윗 개인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갑자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왜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대표,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직분자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기초해서 자신의 간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을 고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은 다윗과 같은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 되며, 후에 22-26절에서 나타나듯이 언약 공동체의 찬양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런 공동체의 찬양이 이미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라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3절에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성소에 왕으로 좌정하신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찬양을 늘 받아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이 찬송하는 이유와 본질이셨습니다.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는 이 고백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말씀에 나타난 그분의 위엄과 능력 전체에 대한 고백입니다. 3절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고백이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으로 다시 이스라엘 가운데서 지속되어야 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을 찬양한 것일까요? 그저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만으로도 찬송의 대상이긴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4-5절에서 과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을 때 언제나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해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무슨 뜻입니까? 고난 중에 자신을 찾고, 자신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르짖음의 결과로 5절은 하나님의 “건지심”과 “구원하심”과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결과로 응답하셨다는 겁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건지시고 구원하시고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면 이 “수치”를 가볍게 생각할 때도 있지만, 사람이 정말 큰 수치를 당하면 죽음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의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것이 수치입니다. 그렇기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하시는 것은 죽음 가운데서 건지시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에게 의탁한 이스라엘 조상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는 다윗. 이 다윗은 자신도 이러한 고통에서 구해주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속히 자신을 구해주실 것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을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탄식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탄식이 등장하는데요. 그것이 6-8절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고난당하는 자신에게 사람들이, 특히 같은 이스라엘, 같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비방과 조롱에 대한 탄식입니다. 다윗은 이 탄식을 통해 고난이 길어지는 것도 힘들지만, 그런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행하는 비방과 조롱도 너무나 견디기 힘들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6절은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이라는 문구로 5절까지에서 말한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은 과거 이스라엘과 현재 자신의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에 반대로 엄청난 수치를 당하고 있음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수치를 당하고 있느냐. 먼저는 사람이 아닌 벌레라고 자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을 자기비하를 하면서 자신이 지금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가장 비천한 벌레처럼 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6절 나머지에 나오듯이 사람들이 실제로 다윗을 벌레 보듯이 보면서 비방하고 조롱거리로 삼습니다. 아마도 구체적으로 다윗이 교회의 직분자, 같은 언약 공동체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고난받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다윗이 큰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조롱했을 겁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어떤 말들을 했습니까? “니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너에게 벌을 내려서서 지금 이 꼴이 아니냐?”라는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었습니다. 그러나 욥과 마찬가지로 다윗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고난받습니다. 또는 사울과 그를 따르는 세력이 다윗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뜨려 백성들은 이 소문을 믿고 다윗을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무슨 고난이던지 다윗은 지금 자신을 벌레라고 비하하면서까지 비천한 모습으로 조롱받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윗은 구체적으로 백성들로부터 어떤 조롱을 받고 있는지 말하기 시작합니다. 7절입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바로 행동으로 다윗을 조롱합니다. 다윗을 볼 때마다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듭니다. 비웃는다는 건 잘 아시는 의미이며, 입술을 비쭉거린다는 것은 입을 넒게 열어 조롱하는 행동입니다. 또한 머리를 흔드는 것은 “에휴 쯧쯧쯧”하면서 조롱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다윗을 행동으로 조롱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이제 말로 다윗을 조롱합니다.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사람들이 하는 이 말. 언틋 보면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다윗이 고백했듯이 여호와께 의탁하는 자, 의뢰하는 자는 항상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이 말의 실상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다윗을 조롱하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다윗이 평소에 자주 했던 말을 그대로 사람들이 인용하여 “그래, 너가 여호와께 의탁한다면 구원하실거야. 너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거야. 암만 그렇게 해봐 너에게 그렇게 하시나. 너가 잘못했으니까. 지금 너가 벌을 받는거야.”라며 조롱하는 겁니다. 이들이 이렇게 조롱하는 이 말. 욥의 친구들처럼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의로운 자라는 것을 아시기에 만일 이들이 조롱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하나님의 명예와 공의에 치명적인 위협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조롱은 거짓말입니다. 이들이 알고서 그랬는지, 몰라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하는 이 조롱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이렇게 같은 언약 공동체, 그리고 같은 교회 안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윗을 조롱하며, 다윗은 사람들의 이 조롱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탄식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을 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이어서 다윗이 이스라엘 직분자 중에서 위대하다는 증거로 고난 중에서도 다시 한번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 또는 신뢰를 고백합니다. 그것이 9-10절입니다.
첫 번째 신뢰의 고백인 3-5절에서 다윗은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였다면, 두 번째 신뢰 고백은 다윗 개인의 삶을 회상합니다. 9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자신을 어머니의 품에서 나게 하시고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자신을 돌보신 것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위대한 사랑 중에 손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 중에서 어머니의 사랑, 즉 모성애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위대한 모성애와 같은 사랑으로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을 다윗은 고백합니다. 3절처럼 9절에서 마찬가지로 다윗은 “하지만 주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자신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지금까지 돌본 것은 다른 어떤 것, 다른 무엇도 아니라 오직 누구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까? 바로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10절에서도 그러한 고백을 이어갑니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다윗은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다”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진 것이라고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다음 구절은 이것을 더욱 더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바로 지금까지 다윗의 삶을 책임지시고 돌봐주신 주권자는 하나님이셨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멀리 떠나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습니다. 고난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손길을 펼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여도 자신은 무기력하게 그 조롱을 온전히 다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손을 놓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고통의 순간.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하나님. 제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제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어려움을 받아야 합니까?”라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아니면 심지어 아예 하나님을 찾지 않거나 하나님을 우리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신뢰의 고백은 결코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주님. 저를 이 고난 속에서 구원해주시지 않는 것이 너무나 괴롭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떠나 계신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님이신 하나님. 저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라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 의뢰하고 의지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마시고 멀리 하지 말라는 간구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가 환난이 대신 차지하고 있어 자신을 고난으로 몰아넣는 압도함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꼭 도와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이 다윗의 간구. 정말 의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욥이 의인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이해되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아내의 말대로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께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의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도 부당한 고난이 찾아왔음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의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자신을 도울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난을 우리가 겪게 되면 우리는 버틸 수 없어 무너지게 될 겁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고독하게 혼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근거 없는 조롱을 쏟아내고 비방합니다. 그것도 같은 공동체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행합니다. 이러한 고난을 겪으면 삶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다윗의 고난보다 더 극심한 고난을 겪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큰 소리를 지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시편 22편에서 탄식한 다윗의 말과 같은 말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탄식을 뱉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방을 당하셨습니다. 거짓말로 고소를 당하셨고,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머리를 흔들며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너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조롱의 말을 쏟아냅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같은 언약 공동체, 같은 교회의 지체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심지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라는 직분자들 마저 “그가 타인은 구원하였는데, 자기는 구원 못하는구나”라며 조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조롱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짓는 죄를 알지 못한다”며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조롱에는 다윗과 다르게 참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결코 참지 못하시는 고난,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에서 끊어졌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아들인 예수님을 죄의 먹잇감으로 그냥 던지셨습니다. 오늘 읽진 않았지만, 다윗은 시편 22편 뒷부분에서 자신이 받는 공격을 짐승들의 공격으로 비유합니다. 이 짐승들의 온갖 공격을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다 받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이 공격과 고난 중에 어떻게 되든 간에 얼굴을 돌려 외면하셨고, 자신의 진노를 다 받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보다 더 친밀하신, 아니 하나님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마음을 아시는 친밀함의 정점에 있으심에도 그 관계가 끊어지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공간에서 실제로 하나님께 버려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의인, 다윗보다도 의인이신 의인 중의 이신이심에도 하나님께 버려지셨습니다. 자신을 의탁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유일하게 자신의 아드님을 외면하셨습니다.
물론 다윗의 고난과 예수님의 고난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인류의 모든 죄에 의한 고난이기에 완전히 다른 고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고난의 그 뿌리까지 경험하셨습니다. 죄의 뿌리를 뽑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2편에서 다윗이 당한 고난보다도 더 극심한 고난을 그리스도께서는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지금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으로 계십니다. 그분이 참 인간으로 계신다는 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인류의 모든 죄, 고난의 뿌리를 경험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다면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신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그 대제사장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시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 넘어지고 깨어지고 고난 때문에 아파하는 그 모든 것을 인간으로서 아신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는 다르게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고난은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고난, 즉 인류의 모든 죄이며, 그분이 죄로 인해 당하신 고난은 그분이 죄인이시기에 당하신 고난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와 인류에 의한 타인의 죄로 인한 고난이셨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보다 예수님의 탁월함이 무엇이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합니까? 바로 구약의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는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드렸습니다. 이와 다르게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닌 오로지 타인의 죄를 위한 속죄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대제사장보다 예수님이 더 탁월한 대제사장입니다.
이렇게 질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그 고난과 죄의 뿌리까지 예수님께서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 당하는 중에 생기는 그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원어의 의미를 더욱 살려서 말하면 연약함을 공유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며 우리에게 주신 유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시라는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인 켄타우로스와 같은 50대 50이 아니라 100프로 하나님이신 동시에 100프로 인간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고통을 알지 못하십니다. 고통은 죄의 산물이며, 하나님과 죄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성령님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으로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류의 모든 죄,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예수님께 쏟아내셔서 실제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대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은 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교회가 위로하고 같이 함께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느낌을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실제적으로 끊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신 분께서 우리와 아버지 하나님을 연결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때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찬송입니다. 시편 22편 후반부인 22절부터는 다윗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말씀들이 등장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윗을 구원함으로 이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죄에서 승리하신 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게 됩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이유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신 그분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 대신해서 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중에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으면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하고 참담한 삶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서도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의지하시면 좋겠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바로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고난 중에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이 다윗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우리의 삶으로 승천하신 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복된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은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내 편이 없는 것 같고, 나를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할 것만 같고, 또는 죽음 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은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비참해지고 어둠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한 느낌이 들 수는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과 단절이 되었지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동시에 인간으로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라는 것에 대하여 감사합시다. 고난 중에 우리에게 생길 수 있는 이 연약함을 그리스도께서는 붙잡아주십니다. 이 사실에 감사합시다. 또한 더 나아가서 우리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라도 하나님을 꼭 붙잡고 놓지 않는 신실한 백성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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