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강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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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과 수단
목적과 수단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캐나다와 한국에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캐나다든 한국이든 진보와 보수모두가 자신들이 나라안에 쌓여있는 문제들을 해결할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외쳐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상당수의 국민들은 그 말들을 사실은 곧이곧대로 믿지를 않습니다.
제가 한국의 통계를 한번 가져와 봤습니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언론인들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신뢰도 조사입니다. 2023년에 조사를 한것이니까 제법 최신자료입니다.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가 15%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정평가가 훨씬 압도적입니다. 82%입니다.
공무원은 상대적으로 조금 낫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사업가들, 예능인들 보다는 훨씬 낮게 평가받고 있다는 통계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들이 학벌이나 명성이 부족하지는 않을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의 하는말과 실제 그들의 정치하는 모습이 너무 다르게 보이는 괴리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말만하면 국민들의 머슴이 되겠다고 하고 섬기겠다고 하지만 실제 국민들이 체감하는 것은 항상 힘을 과시하고 국민들의 위에 군림하려 하고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사익에 치중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기업가들 역시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만 적어도 기업가들은 정치인들처럼 입만열면 국민을 섬긴다는 말은 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기업임을 알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면이 있습니다.
좀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치인처럼 교회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섬기겠다는 말일것입니다.
목회자들도 자기를 소개할때 무슨 무슨 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마치 정치인들의 구호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하게 됩니다.
작고하신 저의 아버님이 살아생전에 제가 해외에서 목사로 사역하는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목회를 크게 반대하셨는데 나중에는 저의 가장 큰 후원자가 되어주셨었습니다. 어느날 저희아버님께서 아파트 경로당에서 우리 막내가 목사인데 캐나다에 유학을 하고 지금은 캐나다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분으로부터 큰 질책을 받으셨습니다. 요즘 목사가 얼마나 사고를 많이 치는데, 목사들때문에 얼마나 세상이 시끄러운지 아느냐고 하시면서 목사인것이 뭐가 자랑이라고 말하냐느며 크게 질책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저하고 화상통화를 하시는데 , 성광아 오늘 내가 경로당 가서 그 이야기했다고 혼났다.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아버지 요즘 일반사람들이 목사 별로 안좋아합니다. 괜히 아들 목사라고 이야기해서 왕땅당하지 마세요 라고 말씀드린적이 있습니다.
왜 한국사회에서 목사의 위치가 그렇게 추락했을까요? 정치인과 거의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라리 거룩한 말을 않했더라면 그나마 치부가 가려졌을텐데 거룩한 말, 좋은 말은 다 해놓구선, 정작 그 자신들은 온통 욕심과 탐욕을 버리지 않으니 그 말과 행동의 큰 차이때문에 더 큰 불신을 얻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사인 우리들은 그러한 우리자신들의 모습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택한 받은 거룩한 사람이라고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의경을 할때 길거리에서 음주 단속을 하면 항상 시비를 거는 두 종류의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교사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그룹이었습니다. 혹시 교사출신있으시면 용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 별의별 트집을 다 잡아 음주측정을 거부하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다그런것은 아니지만 꼭 그런 상황에서 직업을 물어보면 두 종류의 직업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이 처음에는 사명으로 죽기로 교회를 세우고 난뒤 어느새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고 교회를 사유화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많이 목격합니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텐데 어느새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가 헷갈리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목회자들이 그런 자신들의 모순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이러한 스스로의 괴리현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로 복음은 빛을 잃고 점점 세상가운데 설자리를 잃어가게 될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제자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Thou shouldst eat to live; not live to eat.
너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 먹기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
목사로서 제 자신에게 질문해봅니다. 너는 살기 위해 복음이 필요한것이냐? 복음을 위해 삶이 필요한 것이냐?
젊었을때는 사명하나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한다고 큰소리 쳤지만 나이가 들고 목회의 년수가 붙으면서 제가 과연 정말로 사명하나로만 사역하는 목사인가? 하는 질문을 해볼때, 그 속에 목회자로서 여러 야망과 꿈이 함께 섞여져서 쌓여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렇습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말하지 않고 교회에서 목사로 사역한다고 말입니다. 저의 그러한 고백속에는 제가 천사처럼 목회하지는 못해도 탐욕과 욕심으로 목회는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각오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로서 사역하면서 저의 이러한 고민의 주제를 성도님들을 통해서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 직분이 필요한것인가? 직분을 얻기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인가?
참 말이라는 것이 비슷한데도 그 느낌과 의미가 확달라집니다.
제 표현이 좀 강해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해를 위해서 조금 센 표현을 사용하겠습니다.
저 여자는 술집에서 일해 그런데 대학생이야.
저 여자는 대학생이야 그런데 술집에서 일해.
어떻습니까? 두번째 것은 왠지 타락한 한 여대생에 대한 말같지요? 대학생인데 술집에서 일해.. 그런데 반대로 술집에서 일하는데 대학생이야는 뭔가 불우한 환경이지만 나름의 길을 찾아 몸부림 치는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물론 이것도 사람마다 이해하는 것이 좀 다를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한국말이 뒷부분에 결론이 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이야.. 술집에서 일해. .그것이 결론이니까요.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이 저는 제가 고민하는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이어서 한번 나누어 보았습니다.
오늘날 성경의 구절들중에 가장 많은 오해를 낳는 말씀중에 하나가 본문의 말씀입니다. 많은 분들이 본문을 복음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사람의 지혜 지식은 아무 필요가 없고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라고 해석합니다. 1절과 2절의 말씀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구절을 잘못해석하면 반 지성주의가 신앙인이 됩니다. 문자그대로 읽고 이해하면 바울이 무슨 철학적 지혜나 수사학적 지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예수 천국 불신지옥만 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정말 그렇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에는 수사학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습니다. 수사학이란 자신이 가진 어떤 주장이나 의견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이 수사학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의 표현력이 미숙하면 그 사람이 무슨 의견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던 상관없이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평가절하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이 철학의 본산이었던 아테네에서 성경명으로는 아덴으로 기록된 곳에서 당시 철학의 주류였던 에피크로스 학파의 철학자(쾌락이 선) 들과 스토아 철학자(내면의 이성과 고요함이 선)들과 진리에 대해서 논쟁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분은 이러한 바울의 에덴에서의 논쟁을 실패로 규정하고 복음은 논쟁으로 되지않고 오직 성령안에서 십자가만을 증거할때 전달된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그럴리가요.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당시 쟁쟁한 철학자들중에 바울과의 진리논쟁을 통해 당시 아레오바고 , 아레오바고는 당시 철학자들이 진리를 토론하고 논쟁하던 토론장이었습니다. 그 토론장의 관리인이었던 디오누시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몇몇의 여자들이 또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실패입니까? 결코 그렇게 말할수 없습니다.
바울의 그러한 지식과 지혜가 있어서 신약성경 3분의 2을 기록할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자라고 40년동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면서 광야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애굽문명과 광야의 상황을 다 경험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설명한 것들을 보라 .얼마나 세밀하고 정교합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한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분란과 당파의 문제입니다. 왜 당파의 문제가 생겼습니까?역설이게도 성경지식이 많고 은사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참 이상하지요? 성경지식이 많으면 좋은일인데, 은사가 많다는 것은 좋은일인데, 왜 그 좋은 것들이 많아서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세워져야지, 왜 교회가 분란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성경지식과 은사들이 복음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신들의 받은 지식과 은사들을 자랑하기 위해 복음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언이 바로 고전 1:11-12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바울 아볼로 게바 심지어 그리스도까지 다 하나같이 주옥같은 이름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 더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왜 이 주옥같은 이름들 밑으로 파벌과 분쟁이 생겨난 것입니까?
이유는 목적과 수단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뛰어난 사역자들의 이름을 이용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용했습니다. 자신의 옳음과 특별함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바울파다 아볼로파다 심지어는 그리스도 파다 그런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말한대로 그들이 진심으로 바울을 따랐더라면 아볼로를 따랐더라면 베드로를 따랐더라면 그들은 결코 분쟁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복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다 복음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주옥같은 이름들 밑에서 분쟁하고 분열했던 것은 그들자신을 위해 사역자들의 명성을 이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교회가 분열하는것은 복음을 따라서가 아닙니다. 복음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자랑을 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 그리스도안에서 자랑을 하면 무엇만 자랑하게 될까요? 나의 모든것은 수단화되고 예수님만 목적되기에 자랑의 결론은 항상 예수님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래서 그 물질로 하나님을 자랑하고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질의 부요함을 누립니다. 은사가 많고 섬김을 아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기에 그것으로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안에서 은사를 사용하고 누리게 됩니다.
목사인 제가 제가 가진 어설픈 재능과 지식을 가지고 복음을 섬기고 교회를 섬겨야 하는데, 어느순간부터 그 복음을 가지고 저의 재능과 지식을 뽐내는데 사용할수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 늪에 빠집니다. 그래서 교회 사이즈가 자신의 자랑이 되고 교회 예산을 가지고 자신의 훌륭함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래서 말도 안되는 불법과 어거지가 교회가 클수록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목회자는 바로 지금 고린도교회와 같은 본말이 전도되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교회 사유화입니다.
복음의 사유화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다면 교회 사유화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이를 위해서 심히 떨고 두려워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1년반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 때 그는 심히 떨면서 두려워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과 5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자신의 복음전도가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복음보다 더 드러내는 것이 될까봐 그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경험과 지식과 열정이 다 복음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기를 그는 진심으로 원하고 또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안에 이러한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과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지식과 경험이 많을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풍성하게 사용하실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도 열심히 읽지만 신문도 열심히 봐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도 이해해야 하지만 세상도 이해할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독일신학자 칼 바르트는 목회자들은
목회자들은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하고 더 많은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복을 구해야 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몹시 떨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결론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를 자랑하는 것이 결론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는 수단이고 오직 복음만 그리스도만 결론이 되고 목적이 되는 그 참된 자기부인 , 신앙의 자리에 늘 서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